에스겔 20:27-39

주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하여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씀하신다. 애굽에서 광야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여전히 범죄하여 주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고 하신다.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인도하여 들였는데도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좇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산당에서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드렸다. 하나님 대신 우상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주님은 산당이 무엇이냐고 하신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산당이 뭔데 거기에 도움을 요청하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이다. 주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조상들을 풍속을 따라 자신을 더럽히며 가증한 일로 행음한다고 지적하신다. 일례로 아들을 화제로 드렸다고 하신다. 이런 우상숭배를 오늘날까지 지속한다고 하신다. 그러니 이스라엘 족속이 주하나님께 묻기를 용납하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주하나님은 가증한 일을 행하는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께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왜? 이들은 두주인을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두마음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들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열두지파에게 편지했다. 두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두주인을 섬긴다는 것이다.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이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존재들이다. 이런 자들을 악인이라고 하신다. 결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주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평가하신 것이다. 아니 이스라엘 족속 스스로가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하는 마음을 품은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은 목석 우상도 섬기도 하나님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주하나님은 두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오히려 주하나님께서는 두마음을 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권능의 손으로 분노를 쏟아 야단치시겠다고 하신다. 야단을 쳐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시고자 하신다. 흩어져 있는 이방 여러나라에서 불러모아 심판하시겠다고 하신다. 이스라엘 조상들을 심판하신 것 같이 포로지에 와서도 두마음을 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는 심판을 통해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벌은(막대기) 벌대로 주어서 언약의 자녀 (줄)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주하나님은 반역하는 자와 범죄하는 모든 자를 제하여 버리신다. 포로로 잡혀와서도 반역하는 자와 범죄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다고 강조하신다. 이런 하나님을 알라고 하신다. //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다시 돌이켜 반역하고 범죄한다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오죽하면 주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라. 그렇게 하려거든 이 후에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두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신다. 두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하신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다. (약1)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마 6:24 새번역)

에스겔 20:1-26

일곱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 에스겔이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다섯째 해 네째 달이니까 에스겔은 2년동안 말씀으로 상징행위로 줄기차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해왔다. 그런데 이스라엘 장로 여러사람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또 에스겔 앞에 나와 앉았다. 장로들은 분명한 심판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상황에서 무슨 다른 말을 들으려고 하나님께 물으려고 했을까? (선민인 우리를 정녕 버리십니까?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을 정녕 황폐케 하시겠습니까?)

주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묻기를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전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알려주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가증한 일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알려주라고 하신다.

주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렇다. 내가 이스라엘을 택해 그들의 하나님이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후손들을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애굽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으나 너희 조상들은 주하나님께 반역하여 주하나님 말씀 듣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않은 그들에게 주하나님께서는 분노를 쏟으며 진노를 쏟으셨다. 애굽에서 종살이 한 이유다. 그러나 주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함이 아니라 주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하신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주셔서 사람이 준행하여 삶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삶이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주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주하나님은 안식을 주어 그들과 주하나님사이에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율법을 받은 광에서부터 주하나님께 반역을 했다. 삶을 얻을 율례를 준행하지 않았고 주하나님의 규례를 멸시했다. 주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인 안식을 크게 더럽혔다. 주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멸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도 주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위해서가 아니라) 곧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참으셨다. 주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가 죽은 것은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따라 주하나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주하나님의 율례를 행하지 않으며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다만 주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껴서 광야에서 완전히 멸하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자손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상들의 율례를 따르지 말며 조상들의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아라. 내가 너희 하나님(신) 주하나님이다. 너희는 나의 율례를 따르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나의 안식이를 거룩하게 하여라. 그래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어라.

그러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러나의 역사. 그들의 자손 역시 주하나님께 반역하였다. 주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켜 행하면 그로 말이암아 삶을 얻을 주하나님의 율례를 따르지않았다고 하신다. 주하나님은 주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몇번이나 참으셨던가? 주하나님께서는 참고 참으시는데 그들은 조상들의 우상을 사모하여 주하나님의 율례를 멸시하며 주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으며 안식을 더럽혔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러자 그들이 심지어 장자를 화제로 드리기까지 했다. 그들은 멸망을 해야 주하나님이 참 하나님(신)이신줄 알게될 것이다.

// 주님은 완전히 멸하시지는 않으시지만 죄를 그냥 두시지 않으신다. 주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사람이 지켜 행하면 삶을 얻을 수 있는 율례와 규례를 주셨다고. 이때만은 유독 ‘그들’이나 ‘이스라엘 족속’이라 적지 않고 ‘사람’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리고 ‘삶’이란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주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주하나님을 알라고 하신다. 이것이 영생이다. 성도가 누려야 할 삶이다.

에스겔 19 (1-14)

주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위해 애가를 지으라고 하신다.

지도자들의 어머니는 암사자라는 표현은 무엇일까? 위정자들에게는 나라가 있다. 나라가 어머니가 되는 셈이다. 어머니가 암사자라는 뜻은 나라가 위정자들에게 권세를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암사자가 사자들 가운데서 젊은 사자중에서 새끼 하나를 키워 젊은 사자로 키우는 것은 나라가 위정자를 세워 왕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자가, 왕이 사람을, 곧 백성을 먹이처럼 물어 뜯고 삼켰다고 애가를 부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방 나라도 유다 왕의 폭정을 기회로 유다 왕을 사로잡아 애굽땅으로 끌고 갔다. (하나님께서 이방을 심판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암사자, 곧 유다 나라는 애굽 땅으로 끌려간 왕을 기다렸지만 소망이 끊어진 줄 알고 다른 새끼를 젊은 사자로 (왕으로) 키웠는데, 왕이 된 이 사자도 백성들을 물어 뜯고 삼키는 폭정을 일삼았다. 선왕보다 심했다. 나라가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다는 황폐해졌다. 이방나라의 밥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번에는 바벨론 왕에게 사로잡혀갔다. (이 역시 하나님의 심판이다.)  오호통재라!

애가는 이어진다. 유다 어머니, 곧 유다 나라는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라고 한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처럼 포도나무도 물가에 심겨져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했다. 한마디로 번성한 나라였다. 그런데 굵은 가지가 (지도자가) 뽑혀 땅에 던짐을 당하고 그 열매는 (백성) 동풍에 마른다고 애가를 지어부르라고 한다. 그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탔다. 포도나무는 더이상 물가가 심기운 것이 아니라, 이제는 광야, 곧 가물이 든 땅에 심어진 바 되었다. 불이 (하나님의 심판이) 포도나무의 열매와 권세잡은 가지를 태웠다. 하나님의 시냇가에서 옮겨 광야에 심겨진 유다의 최후다. 오호 통재라!

// 성도도 하나님의 시냇가에서 주야로 말씀의 물을 빨아 먹지 않으면 말라 버려져 결국 태워질 포도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성도가 열매맺는 가지인 이유는 하나님의 시냇가에 심기운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말씀의 수액을 공급받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농부가 잘라 버려져 땔깜으로 쓸 가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도 이 애가를 기억하며 삼가 조심해야 한다.

예수는 참 포도나무요 하나님은 농부시다.

에스겔 18:19-32

주하나님은 다시한번 명확히 말씀하신다. 조상탓을 하지 말아라.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산다. 대신 범죄하는 영혼은 반드시 죽는다. 연좌제는 없다.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간다.

주님은 다시한번 돌이키라고 하신다. 그래서 만일 악인이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악인이 범죄한 것을 하나도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그는 지금 행하는 공의로 살리라 라고 하신다. 결국은 지금 이순간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키며 사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주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주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주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악인이 돌이켜 악한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반대로 의인이 돌이켜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면 그도 죽는다.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않는다. 그가 범한 허물과 지은 죄로 죽는다고 하신다. 다시한번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주님은 이것이 바로 공평한 잣대라고 하신다. 의인이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면 그 행한 죄악으로 죽고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이 산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인은 살고 악인은 죽는다. 우리가 온전히 의로우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다. 내가 살면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기 정말 어려운 시대에 임마누엘을 구해햐 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공평한 잣대로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다. 오직 의인만 산다. 그런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이 믿음이 에스겔 시대에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에게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서 예수 안에 사는 것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바로 ‘예수 안에서 사는 것’, 곧 임마누엘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 예수 안에 사는 길이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알고 정의와 공의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인이든 악인이든 하나님을 몰라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한다.

회개하고 모든 죄악에서 떠나라고 하신다.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하신다.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너희는 스스로 돌이켜 살지니라. 예수 안에 거하는 수 밖에 없다.

에스겔 18:1-18

주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아버지도 아들도 주인되신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죽으리라고 하신다. 안되면 조상탓으로 돌릴 수 없다고 하신다. 조상탓 내탓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이다. 핑계 댈 곳이 없다. 우리는 (우리 영혼은)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한다면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고 하신다.

주님은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상에게 드린 제물을 먹지 않는다. 우상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않는다. 생리중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사람을 학대하지 않는다.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며 강탈하지 않는다.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힌다. 변리를 위하여 꾸어주지 않는다. 이자를 받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한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한다.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는 의로운 삶은 종교적이기 보다 훨씬 더 사회적이다.

의인은 반드시 산다. 그러나 의인의 아들이라도 정의와 공의 삶에서 /하/나/라도 벗어나면 결코 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 돌아간다고 하신다. 주님은 노아 욥 다니엘이라도 자녀들을 구할 수 없다고 하셨다.

범죄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아비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며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면 이 사람은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산다고 하신다. 물론 의로운 아들이 포악한 아비를 구할 수 없다. 포악한 아비는 동족을 강탈하고 백성들 중에서 선을 행하지 않아 죽을 것이다.

주하나님께서는 각자의 행위대로 갚으신다.

// 주하나님 앞에 설 때 ‘–때문에’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덕분에’라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