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0, 131편

130 – 1, 2 주님께 부르짖는 시인. 제발 자신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귀를 기울여 달라고 탄원한다. // 결코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이 아니다.

3 시인은 죄인임을 고백한다. 주여 누가 설 수 있습니까? //그래서 주 앞에 가까이 서지 못하기 때문에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눅 18:13참조) 부르짖는다.

4 시인이 부르짖는 이유는 죄사함이 오직 주께만 있기 때문이다. 두려운 주님이지만 그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5 시인은 물리적으로는 주님께 가까이 할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 주님께 귀를 기울여 달라는 부르짖음은 곧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으로 바뀐다. (용서의 음성을 듣고 싶어한다.)

6 그래도 파수꾼이 아침 교대 시간을 기다리듯 주님의 응답이 더디다고 느낀다. // 그래도 아침은 온다. 국방부 시계는 돈다. 나의 때가 아닌 주님의 때까지 감내해야 한다.

7 이스라엘아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지칭할 것이다.) 주님을 바랄지어다. 아침이 오듯 주님도 주님의 때에 응답하신다.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으로 함께 하신다. 4절에서 노래한대로 죄사함은 오직 주께만 있다.

8 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신다. // 예수님은 한창 높아진 바리새인이 아니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을 바랄 수 밖에 없다. 의롭다 하심은 용서를 받았다는 뜻이다.

131 – 1 시인이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그 눈이 오만하지 않고,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시인의 노래는 바울이 “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라고 로마 성도들에게 당부하는 것과 서로 통한다. 시인은 이미 은혜를 입은 자처럼 살고 있었다. 은혜를 입은 자가 할 일은 주님을 바라는 것이다.

2 시인은 자신을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평온하게 안긴 모습을 노래한다. // 방금 젖을 빨고 난 아기가 아니라 이미 젖을 뗀 아이다. 엄마품에 안긴 이유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인은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을 노래한다.

3 이스라엘아, 너 하나님의 사람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주님을 바랄지어다. // 영생은 임마누엘이요, 임마누엘이 곧 영생이다.

 

 

시편 129 (1-8)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죄악의 소굴에 들락거리고 망할 길에 얼씬 거리고 배웠다고 입만 살아 있는 자들이 있다 (시편1편 메시지 번역에서). 시인은 이들, 곧 악인에 대해 저주의 노래를 부른다.

시인은 저들(악인들)이 어릴 때부터  이스라엘을 (복있는 사람을) 괴롭혔다고 말한다. 그것도 어릴때부터 꾸준하게 복있는 사람을 괴롭혔다고 거듭 반복한다. 그러나 저들은 복있는 사람을 결국 이길 수 없었다.

저들은 복있는 자를 육체적으로 학대했지만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저 악인들의 멍에를 박살내시고 저 악인들의 사슬을 끊어주셨다. 학대에서 구원해 주셨다. // 복 있는 자의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신다.

이렇듯 복있는 사람을 괴롭게 하고, 복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미워하는 자들은, 곧 악인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 것이다. // ‘수치 중의 수치는 주님의 버림을 받는 것이다’ 이다. 주님은 그 날에, 곧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고 하실 것이다. 주여 주여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갔는데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물러가라’라는 예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수치가 어디에 있을까?

시인은 악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이 마를 것이라고 한다. 추수꾼은 알곡이 아니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저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결코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세상 복에 취해 하나님의 복을 걷어차는 어리석은 자들의 마침이다.

시편 128 (1-6)

복이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

  1. 복이 있도다.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길로 행하는 자여.

  2. 시인은 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바로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것이다. 착취를 당하지도 착취를 하지도 않는 삶이 복되고 형통하다고 노래한다. // 시인은 대박을 복이라고 노래하지 않는다. 물론 궁핍도 복은 아니다. 그렇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잠언 기자는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잠 30:8)”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구하라고 하셨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일용할 양식을 얻는 삶이 복이다.
  3. 복되고 형통한 삶은 가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아내와 자녀들을 결실한 포도나무와 어린 감람나무로 비유한다. 풍성함이다. 물질의 풍성함이 아닌 기쁨과 화평으로 가득하다.
  4.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누리는 복이다.
  5. 시인은 주님께서 완전한 복을 누리게 해주실 시온을 바라보며, 주님이 함께 하시는 예루살렘의 번영을 소망하며 주님의 길을 걸으라고 한다.
  6. 이 믿음의 유산을 자자손손 전하라고 노래한다. 이 믿음을 자자손손 전하는 것이 복이다. 평강이다.

// 이 복이 끊어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4절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가 오늘 시편의 주제다. 그래서 주님을 경외하라고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라고 노래한다. 혼자가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걸어가라고 노래한다. 가족만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로 온전한 임마누엘을 소망하며 주님의 길을 걸어가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당대만 아니라  자자손손 걸어가라고 노래한다. 복을 눈덩이처럼 굴리라고 한다. 내가 점점 크게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도록.

시편 127 (1-5)

임마누엘은 믿음의 자녀들에게 이어져야 한다.

1~2 주님이 주재자가 아니시면 전도자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집을 짓는 것도 성을 지키는 것도 먹고마시는 일상의 수고도 헛되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길 원하신다. 잠은 쉼이다. 내 것을 내려 놓는 것이다. 참된 안식이다. // 사람의 꾀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은신대로 정직하게 살라고 하신다. 수진제가치국(평천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 임마누엘이 곧 쉼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3~5 시인은 갑자기 자식이 많은 자는 복되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자식들을 주님이 주신 선물이요 주님이 주신 상이라고 노래한다. 특별히 많은 자녀들이 복이요, 자녀들로 말미암아 원수들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 특별히 믿음의 (믿음으로 낳은) 자녀들이 많은 자는 복될 것이다. 이땅에서 원수들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을뿐더러, 주님 앞에 섰을 때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을 받을 것이다.

// 시인이 노래하는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고 일상을 위해 수고하는 것은 가정을 이루고 가정을 지키고 가정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정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다. 특별히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되었다. 가정을 이루고, 가정을 지키고,  수고해서 일용할 양식을 먹고 살아도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는다면 헛되지 않을까? 따라서 많은 자녀들은 하나님의 많은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시편 127편에서 두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가정은 헛되지 않으며, 이 헛되지 않음은 하나님께 많은 자녀를 받는 복으로 확신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믿음의 복은 후대로 이어져야 한다. 물론 육신의 자녀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자녀들일 것이다. 이땅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의 노래다.

유다서 1:17-25

17 사랑하는 자들아. 주재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과대비되는 신실한 자들이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사도들이 가르쳐준 말을 기억하라고 당부한다.

18 사도들은 이미 마지막 때에 자기의 정욕대로 행하며, 경건한 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19 경건하지 않아 자기의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을 분열을 일으키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라고 선언한다. //  이런 자들은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경건하지 않은 곳에 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육에 속하며 성령이 없는 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다.

20/21사랑하는 자들에게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다고 당부한다. // 육에 속하며 성령이 없는 자들과 달리 성령과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은 분열을 조장하는 대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연합한다.

22/23 그리고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명한다. // 어떤 의심일까? 어떤 사람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명하며, 또 어떤 사람들의 죄된 행실은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명한다. // 어제 천사장이라도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보았다(9절). 하물며 우리랴.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다. 우리역시 주님의 용서가 필요한 자들이다. 그러면 당연히 죄는 미워하되 죄인에 대해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겨야 한다. 예수님은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 받을 것이요 라고 가르치신다.

24/25 시작 문안인사에서와 같이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히 있기를 축복하며 편지를 마친다. //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있는 나라, 곧 하나님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