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1:1-16

  1. 발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수신자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 유다는 그리스도 예수와는 주종관계를, 형 야보고와는 형제관계라고 밝힌다.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로/가족으로 대해주시지만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는 역시 주종관계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도 이것을 잊어 버려서는 안된다. 성도들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얻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호하시는 (지켜주시는) 사랑이다.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라는 문안인사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낸다. //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들은 형제들간에 화평(평강)을 나눠야 하고 이웃들을 사랑해야 한다.
  3. 유다는 사랑하는 수신자들에게 (이미 받은) 구원에 관하여 편지를 쓰려고 했었지만 믿음의 도, 곧 (앞으로 받을) 구원을 위해 힘써 싸우라는 권면의 편지를 써야할 필요를 느꼈다고 편지를 쓰는 이유를 밝힌다.
  4. 왜냐하면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이들은 심판이 정해진,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기로 기록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로 방탕한 생황을 하는 자들이다. 유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홀로 하나이신 ‘주재’라고 수식어를 단다. 주재는 다스리는 분, 주인 곧 왕을 뜻한다.
  5. 이 모든 것은 이미 주어진 가르침이다. 유다가 편지를 하는 것은 (이미 받은) 구원에서 떨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중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기 때문이다. // 출애굽해 내신 백성들을 멸하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들을 멸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수 있을까?
  6. 하나님을 찬송하고 섬겨야 할 천사들 중에서도 자기 처소, 자기 직분을 떠난 천사들을 하나님께서 심판의 날까지 흑암에 영원히 결박하셨다고 한다.
  7. 소돔과 고모라를 음란하다가 영원한 불의 형별을 받은 예로 든다. 그러니 이런 사건들을 거울(교훈) 삼으라고 편지한다.
  8.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도 5-7절에 예를 든 경우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한다.
  9. 천사장 미가엘도 심판자의 자리 앉지 않고 주님을 심판자의 자리에 모시는데
  10. 이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은 주님의 자리에 앉는다. 높아지고자 하는 본성, 곧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멸망당할 사람들이다.
  11. 유다는 이들에게 화있을 것이라고 저주한다. 이들이 가인과 발람의 길을 따르고 고라처럼 행하다가 멸망을 받았다고 분명히 한다.
  12. 문제는 이들이 교회안에 들어와 함께 애찬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저들의 신은 배다. 자신들의 몸만 챙긴다.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존재들이다. 예수님이 저주하신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같이 뿌리채 말라버릴 나무같은 존재들이다.
  13. 저들은 두 마음을 품어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물결이요, 흑암가운데 영벌을 받을 존재들이다.
  14. 유다는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을 언급한다. 주님께서 거룩한 자들과 함께 심판하러 임하신다.
  15. 주님은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경건하지 않는 모든 일에 대하여 경건하지 않은 죄에 대하여 유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 주님께서 거룩한 자들과 함께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신다. 결국 거룩은 경건이다.
  16. 경건하지 않음의 특징은 원망과 불평이다. 주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다. 이들은 자기의 정욕을 따른다. 자기 자랑을 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 오늘 본문은 주석 없이 읽어내가가 쉽기 않다. 특별히 천사장과 에녹이야기는 1세기 교회 성도들에게는 친숙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여간 성도들에게는 경건치 않은, 주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과의 싸움을 이겨야 한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들에게 암과 같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요한삼서 1:9-15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

  1. 장로는 가이오에게 나그네된 형제를 홀대한 (나그네된 형제를 대접하라는 장로의 가르침을, 곧 장로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칭 으뜸인 자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을 언급한다. // 디오드레베를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언급함에 주목하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던가? 디오드레베는 결국 이방인들의 집권자처럼, 곧 세상 가치로 사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장로는 디오드레베가 행한 일을 잊지 않겠다고 적는다. 영접하지 않았고 악한 말로 장로와 형제들을 비방하고 오히려 나그네된 형제들을 맞아 들이지도 않았고, 심지어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다고 알린다. // 가이오와 대비되는 디오드레베
  3. (그래서) 가이오에게 악한 것, 곧 디오드레베를 본받지 말고, 선한 것, 곧 하나님의 가르침을 본받으라고 당부한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다고 적는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예수님은 산위에서 가르치셨다. 결국 악을 행하는 자라는 것은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자가 어찌 하나님을 뵐 것인가?
  4. ‘데메드리오’는 또 누구? 하여간 데메드리오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리로부터 증거를 받았다고 편지한다. 요한도 함께 있는 형제들과 데메드리오를 (선을 행하는 자라는 것을) 증거하고 본받으라고 권면하는 듯. // 데메드리오는 가이오처럼 나그네된 형제들을 영접하고 돌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한분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셨다.

13,14. 장로 요한은 쓸 것이 많지만 역시 대면하여 가르치고 배우기를 원한다.

  1. 평강이 네게 있을 지어다. 요한은 많은 친구들이 가이오에게 문안한다고 편지하며, 가이오에게도 친구들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고 부탁한다. // 평강. 하나님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다.

요한삼서 1:1-8

주 안에서 = 진리 안에서

  1. 요한은 요한이서에서와 같이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한다. 바울은 딤전에서 장로는 (감독은)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장로인 요한이 자신이 돌보는 사랑하는 성도 가이오, 곧 교회의 지체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는 것이다.
  2. 요한은 사랑하는 자, 가이오의 영혼이 잘되도록, 그래서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 // ‘잘된다’는 것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성공이지만 ‘좋은 것을 얻는다’라는 뜻이 강하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는 성부 하나님을 소개한다.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성령 안에서 신실하게, 온전하게 순종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순종이 강건하게 한다.
  3. 장로 요한은 형제들로부터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기뻐한다고 편지한다. //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사랑을 행한다.
  4.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고 편지한다. // 생명이 있다는 증거다.
  5. 진리 안에 행하는 자녀들, 장로가 돌보는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진리 안에 행함을 구체적으로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한 신실함’이라고 적는다. //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한 것이 무엇일까? 구체적인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이다. 형제를 나그네 된 자들이라고 적는 것으로 보아 늘 함께 있는 형제보다, 여행 중이거나, 방문중인 형제를 뜻하지 않을까? 바울이 로마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와 같이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라는 권면에 대한 적용이랄까?
  6. 장로는 나그네 된 형제들이 가이오의 사랑을 증언했다고 밝히며, 전송할 때까지 합당하게, 곧 함께 있는 동안 신실하게 대접하면 좋겠다고 편지한다.
  7.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고 사역하는 사람들이다. // 전도자들, 선교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타이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삶을 사는 성도들 모두들 지칭할 것이다.
  8. 장로들은 이방인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교훈한다. 저들도 진리 안에서 함께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보내는 자나 보냄을 받은 자나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함께 지어져 가야한다.

*반복:  ‘잘된다’는 것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성공이지만 ‘좋은 것을 얻는다’라는 뜻이 강하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는 성부 하나님을 소개한다.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신실하게, 온전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순종이 강건하게 한다.

요한이서 1:7-13

과유불급! 과녁을 벗어나지 말아라!

  1. 세상에는 미혹하는 자들이 많다. 요한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을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 편지하는 이유다.
  2. 요한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미혹하는 자들의 가르침에 조심해서 진리와 함께 사랑하는 자들의 가르침과 일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 곧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온전한 사귐을 누리라고 당부한다. // 임마누엘이 우리가 받을 온전한 상이다.
  3.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 지나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주님보다 앞선다는 뜻일 것이다. 성령의 인도 (깨닫게 하심)보다 나의 경험과 지혜를 앞세운다는 의미가 아닐까? 장로는 지나친 것을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과유불급이다. 당연히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 임마누엘이 깨어진다. // 지나친 열심보다 삼위하나님과의 교제, 임마누엘이 더 중요하다고 교훈한다.
  4.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성도의 사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사귐이다. 임마누엘의 사귐이다. 임마누엘 밖의 사람들과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람은 그 악한 일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어져도 기뻐하는 일)에 참여하는 자라고 판단한다. // 만나지 말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성도는 그들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교훈한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이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되냐고 반문한다. 성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5. 요한도 바울처럼 성도와의 사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우선은 편지로 교제하지만 대면해서 사귐을 나누고자 소망하며 편지 한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야 말로 주 안에서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일이다.
  6. 장로 요한은 다시한번 ‘택하심’을 강조한다. 이번에는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가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 자녀들에게 문안한다고 마무리한다. //네 자매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성도의 교제, 곧 사귐은 하나님의 택하심,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땅한 바다.

// 지나침은 과유불급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전통에 사로잡혀 진리를 지나쳤다고 할 수 있다. 급(과녁)에서 벗어낫다. 우로나 좌로 치우쳤다. 그래서 푯대이신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 택하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우리와 같이 사람 (곧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과녁이(푯대가) 있다.

요한이서 1:1-6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1. 요한이서는 사도 요한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밝힌다. // 딤전 3:5에서 장로(감독)을 하나님의 교회를 볼보는 사람이라고 한다. 요한이서의 수신자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다. 요한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을 참으로 사랑한다고 문안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게 사랑으로 문안한다. // 부녀와 자녀들은 교회 지체중에 연약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는 차별이 없다.

  2. 사랑으로 문안하는 이유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것을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은 진리되신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 진리는 곧 사랑이다.
  3.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삼위 하나님을,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 가운데 함께 있다. // 하나님나라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받은 자들이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다.
  4. 요한은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것을 보며 심히 기뻐한다. // 요한이 강조하는 계명은 물론 서로 사랑하는 것이리라. 계명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요 듣고 행하는 자녀들이다. 자녀의 덕목은 진리에 대한 순종이다.
  5. 요한는 부녀들에게도 서로 사랑하자고 당부한다. 그러면서 ‘서로 사랑하자’라는 계명은 새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이 가진 것이라고 한다. // 진리에 대한 순종으로 성장한 어른 들은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 진리가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다. 물론 사랑이 진리를 훼손할 수도 없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6. 요한은 사랑이 무엇인지도 정의한다. 사랑이란 성도들이 주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계명이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진리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람이 참된 사랑, 곧 진리에 순종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