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10-23

빌립보서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빌립소서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썼다.

편지를 마치면서, 이번에는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생각해주기 때문에 크게 기뻐한다고 적는다. 바울의 쓸 것을 도우려는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을 전달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물질의 후원때문만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비천하거나 풍부하거나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처한 상황이 달라도 주 안에서는 자족하는 감사를 배웠다고 한다.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바울의 강세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에 있지 않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곧 ‘주 안에서’가 여전히 중심어다. ‘주 안에서’라고 반복하지 않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적는 것은 바울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주 안에서도 바울 자신의 능력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 속으면 안된다. 주 안에 있다고 성도는 욕심을 따라 , 혹은 자기 뜻을 따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자가 결코 아니다. 반대로 주 안에서 능력을 주시면 성도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는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바울의 쓸 것을 도우려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한다. 이미 빌립보 성도들은 여러번 바울의 사역에 참여했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의 시초에, 바울의 초기 사역부터 바울의 사역에 참여했다고 감사한다.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도 한번이 아니라 두번씩이나 (온전히) 바울의 쓸 것을 보내주었다고 회고하며 감사한다. 바울은 후원 (선물)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빌립보성도들과의 교제(사귐)을 열매맺기를 원한다고 편지한다. 에바브로 디도를 급히 보내면서, 빌립보 성도들이 에바브로 디도편에 바울의 쓸것을 보내 준것으로도  이미 바울에게 부족한 것이 없다고 답신한다. 에바브로 디도편에 받은 것은 일차적으로 바울의 쓸 것, 곧 물질의 후원이겠으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지어져 가는 교제의 풍족함을 이야기 하는듯 하다. 그래서 빌립보의 도움을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라고 적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의 연합이야 말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다. 마땅한 성도의 삶이다.) 쓸 것을 받은 바울은 성부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빌립보 성도들의 필요를 풍성한 대로 채워주시기를 기원한다. 서로서로 돕는 형제의 교제야 말로 성부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아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 한사람 한사람에게 문안 인사를 한다. 바울과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문안한다고 적는다.  구체적으로 가이사의 집 사람들을 언급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로 축원하며 편지를 맺는다.

빌립보서 4:1-9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부활의 몸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한 교제를 소망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바울은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요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와같이 주안에 서라’ 라는 권면이 그러므로 이전인지 앞으로 할 말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주 안에서’를 계속 강조해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의 교제와 연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바울은 성도의 교제와 연합을 위해 구체적으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실명을  거론하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후원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역에 구체적으로 동참해 힘쓰던 여인들도 후원하라고, 글레멘드와 또 다른 자신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부탁한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지체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바울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울은 마지막 때에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당부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히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교훈한다. 바울은 일상의 염려보다 죽음에 대한 염려를 염두에 두고 이 교훈을 한 것일 것이다. 바울은 3장 10,11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자신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소망을 말했다.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을 소망하라! 주 안에서 평강을 누리고 기뻐할 이유다.)

다시한번 바울은 ‘끝으로’라는 접속사로 편지를 이어간다. 어디까지 왔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달려야 할 믿음의 경주가 남아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은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덕담을 듣고 칭송을 받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경주를 마칠 때까지 지속적으로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한 일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라고 교훈한다.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한 일들을 가르치고 말과 행함으로 보여주었으니 자신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가르친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친다. 임마누엘!

// 믿음의 경주는 임마누엘, 곧 주 안에서의 경주다. 그리고 믿음의 경주 결승점은 온전한 임마누엘이다. 따라서 믿음의 경주는 심지어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서도 계속되어야 한다. 감옥에 갇혀셔도 주안에서의 기쁨과 평강을 가르치고 말과 행함으로 보여주는 바울. 바울은 죽고 부활해서 영광의 몸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온전한 사귐을 소망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기쁨이여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이땅에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임마누엘을 맛보며 연합의 기쁨과 평안을 누린다. 우리에게도 이와같이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한다. 예수님은 칠십인 전도자가 돌아와 사역보고를 하며 기뻐할 때, 사역의 열매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 참된 기쁨과 평안은 임마누엘에서 온다. ‘주 안에서’에 답이 있다. 이땅에서는 성도들이 주안에서 이와같이 설 때, 연합할 때 맛볼 수 있다.

빌립보서 3:12-21

온전히 이룬 자들은 온전히 이루도록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바울의 소망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이었다(11). 다시말해 자신도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온전한 사귐을 나누길 소망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소망이 있는 이유를 풀어나간다.

바울은 부활의 몸을 이미 얻은 것도 부활의 삶을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불러주신, 붙잡아 주신 이유가 영광스러운 몸으로의 부활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사귐)이기 때문에 그것을 목표로 달려간다고 밝힌다.

바울은 형제들에게 아직은 목표를 성취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지금까지 이룬 일은 잊어버리고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고 말한다. 바울이 향하는 푯대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 순종하여 받을 상이라고 말한다. 성도가 받을 상이 무엇인가? 영생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삼위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귐이다. 그리스도 예수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자들은… 바울은 성도들을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온전히 이룬자들은’ 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온전히 이룬 자’라는 말은 바울이 12절에서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한 것으로 보아 ‘온전하기를 바라는’ 자들로 이해해야 좋을 것 같다. 하여간 온전하기를 바라는 자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들에게는 (개인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그 길을 알려주신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그래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때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계속 행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을 형제들에게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자신을 본받는 자들도 눈여겨 보라고 권면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성도들의 삶이 아닐까? 바울은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에 (푯대이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달리는 것에) 눈물을 흘리며 마음아파 한다. 그들이 부활의 소망없이 멸망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에 슬퍼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자들이다. (주안에서의 기쁨이 아닌 자기 기쁨을 채우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런 자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도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온전한 사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오직 만물의 주재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썩어질 몸을 그리스도와 온전히 사귈 수 있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수 있다.

// 하늘의 시민권자가 가지고 다니는 여권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들이다. 서로 서로를 본받을 믿음의 형제들이다. 주변에 신실한 형제들이 보이지 않을 때라도 우리는 기억할 믿음의 선진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가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늘의 시민권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다.)  하늘의 시민권은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바라는 부적으로 지니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와의 온전한 사귐을 위해서다. 끊임없는 순종, 곧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온전한 임마누엘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다.

빌립보서 3:1-11

주안에서 기뻐하라 (빌3:1-11)
끝으로?! (엉 이제 편지의 절반인데…) 단어장을 살펴보니 빌립보서에 두번 나오는 단어다. 여기서 끝으로는 새로운 시작, 곧 ‘계속해서 이후로는’의 뜻이 강하다. (우리는 졸업을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로 바꿔쓸수도 있겠으나 여기서 멈추지 말고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끝으로/라는 단어를 택하지 않았을까?
바울은 계속해서 ‘기쁨’이라는 주제로 편지를 이어간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지겹지도 힘들지도 않다고 말한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라는 말은 빌립보 성도들이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 할 오히려 안전한 싸이렌 소리라고 말한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기쁨이라는 것은 능동적인 감정이 아니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기쁨의 이유가 있다. 바울은 이 기쁨의 이유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히 한다. 이런 우리가 곧 ‘(마음의) 할례파’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육체의 할례파’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바울은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육체적 할례파) 일을 삼가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육체적 할례파중의 할례파였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바울은 육체의 할례는 자신에게 유익할지 몰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전혀 유익하지 않다고 시인한다. 그래서 바울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배설물로 여긴다고 편지한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주안에서의 기쁨이라고) 고백한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고자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의는 (근심하게 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확신있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사귐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은 죽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고 소망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소망하는 이유는 부활의 몸으로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사귐을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 바울은 자신이 육체적 할례파에서 마음의 할례파 바뀌었음을 선언한다. 육체적 할례파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음의 할례파야말로 주안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마음의 할례파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다.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요, 모든 지혜의 근본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와의 사귐이 있다. 주님과의 사귐이 바울이 말하는 기쁨이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염려하고 근심하지 아니한가?) ‘기뻐하라’에 강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주 안에서’가 기쁨의 원천임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빌립보서 2:19-30

디모데와 디도 = 사귐의 연결고리 (빌2:19-3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빌립보 성도들의 사정을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서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려는 계획가지고 있다고 편지한다. 함께 지어져 가는 지체들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겠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아들과 같이 여기는 디모데를 보내기로 한다. 디모데라면 바울의 심정으로 빌립보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는다. 바울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고 적은 그들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아마도 ‘성도중심’이 아닌 ‘사역중심’의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라고 강조하는 것 같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낼 계획을 하면서도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는 소망도 전한다.

그러나 디모데보다 에바브로디도를 먼저보낸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 디도편에 바울의 쓸것을 전달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 디도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근심중에 있었다. 죽을 병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낫게 해 주셨다. 바울은 에바브로 디도가 나은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도 긍휼히 여겼다고 적는다. 동역자에게 베푼 하나님의 긍휼을 자신에게도 바로 적용한 것이다. 한몸의 지체됨이다. 빌립보 성도들이 에바브로 디도로 근심하였듯이 바울도 근심위에 근심을 하고 있었는데 그 근심을 면했다고 편지한다. 그래서 빌립보 성도들도 근심을 면하도록 에바브로 디도를 급해 보낸다고 적는다. 바울에게는 빌립보 성도들이 에바브로 디도로 근심하는 것도 자신의 근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 빌립보 성도들이 그를 직접 봄으로 기뻐하고, 바울은 자신의 근심을 덜고자 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쁨으로 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기라고 한다. 특별히 디도를 향해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일의 한부분을 담당했다고 적는다. 이와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권면한다.

// 바울은 에바브로 디도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바울을 섬기는 빌립보 성도들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적는다. 바울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일이란 일차적으로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하나님나라를 전하는 자신의 복음전파, 바울의 쓸것을 돕는 선교후원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성령으로 보냄을 받은 자와 보낸자를 후원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제의 기쁨’, 곧 사귐이라고 할 수 있다. 디모데를 보내려는 계획도, 바울자신이 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도를 급히 보내게 된 이유도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