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5-18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너희는 분명히 복수일 것이다. 그러니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에서 시작하겠지만 그 마침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교회가 품어야 할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읽어야 한다. (빌립보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과 ‘너희 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울타리를 친다.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6-8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요약하고, 9-11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야 말로 모든 사람이 성부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의 열매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하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권면한다. 하나님께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의 삶이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편지한다. 다시말하면 빌립보 성도들 안에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주셨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성도들의 소원이되어 살아가도록 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다.

성도 공동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 흠이 없고 순전하여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살아야, 세상의 빛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빌립보성도들이 이렇게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자랑거리라고 말한다. 빌립보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 하나님께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믿음으로 바울을 후원하니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피흘리기까지 복음전도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기쁨으로 다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 성도들과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하나됨을 기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기뻐한다.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 편지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 빌립보서의 기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기쁨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기쁨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하고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가 계셔야 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빌립보서 1:27-2:4

복음(믿음)과 고난

이 얼마나 대비되는 두 단어인가?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고난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디모데에게는 아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라고 가르친다.

빌립보 성도들에게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한마음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한마음과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 당하는 고난이 바로 구원의 증거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으라고 바울을 가르친다. 성도들에게는 이와 같은 싸움이 있다. 빌립보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지체인 바울 안에서 보고 듣는 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싸움(노력)을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서로 권면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위로해야 하고, 성령 안에서 교제하고 긍휼과 자비를 나눠야 한다. 한마음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해야 한다. 타툼이나 허영으로 경쟁해서서는 안된다. 대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 스스로를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들을 일을 돌아보아야 한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할 때 바울 자신의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지체로 서로 하나가 되는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은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한 노력(싸움), 믿음의 경주를 해야한다. 믿음의 경주는 그리스도를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한 마음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체들이 성장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체들이 연합할 때 기쁨이 충만하다고 한다. 나의 기쁨은?

빌립보서 1:12-2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다. 1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고 밝힌다 (새번역). 공동번역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갇혔다고 번역하지만 개역개정처럼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가 개인적으로 더 뜻깊게 다가온다. // 이번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보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안경을 끼고 빌립보서를 읽고 싶다.

바울의 매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는 형제도 생겼다. 형제들 중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바울은 편지한다. 바울은 형제들이 겉치레로 하는 참으로 하든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기쁘고 또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복음전파의 목적이 숫자놀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성도들과 함께 지어져 가는 것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처한 사정보다도 그 자신이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지체라는 사실로 (그리스도의 몸이 자라는 것을)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은 19절에서 (자신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듯)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울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안다고 고백한다. 이 구원은 바울이 감옥에서 풀려날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온전히 지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고 편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내안에 그리스도’가 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들, 교회 공동체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하물며 바울 자신에게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는 (2:20)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삶이라고 편지한다.

궁극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내안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요, 세상을 떠나서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울은 좀 더 살아서 빌립보 성도들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고백한다. 한구절 한구절이 다 어렵다. 그러나 바울이 바라는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랴.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아름답게 단장하면서 하객들에게 신랑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것외에 무슨 자랑이 또 있으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빌립보서 1:1-11

감옥 안에서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쁨으로 간구하는 이유를 빌립보 성도들이 첫날부터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삶이다. 곧 성도의 삶이다. 전도나 선교는 복음을 위한 일의 극히 작은 한부분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한 일을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일이라고 확신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은 구원, 곧 성도의 성화요 영화다.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성도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화는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함께 지어져 가는 과정이요 영화는 그 열매다.

바울은 자신도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지어져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고백한다. 빌립보 성도들을 바울 자신의 복음 사역에 참여한 자라고 인정한다. (후원유무를 떠나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지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심장같은 존재로 소개한다. 빌립보 성도들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온 몸에 피를 공급하는 심장의 역할을 기도로 감당하고 있다고 쓴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의 (바울 자신도 포함) 성화와 영화가 바울의 기도에 대한 열매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11절 마지막.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라고 하니 몸둘바를 모르겠다. 눅 12 :37 에서 예수님은 복있는 종에 대해 이렇게 비유하셨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삶! (그리스도 예수에 하나로 묶인)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할 제목이다.

여호수아 24:19-33

‘우리도 주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라는 백성들의 맹세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하나님을 능히 섬기기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신)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신)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격려가 아니라 이 무슨 저주스러운 독설인가?

여호수아는 주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서약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만일 너희가 주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복을 주시던 주하나님께서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백성들은 다시한번 ‘우리가 주하나님을 섬기겠나이다’라고 여호수아에게 다짐을 한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주하나님을 선택하고 주하나님을 섬기리라 한 것에 너희 스스로 증인이 되었다고 확인하니, 백성들이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증인이 되었다고 대답한다.

여호수아는 지체없이 이스라엘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주하나님께 향하라고 명한다. 백성들은 ‘우리 주하나님을 우리가 섬기고 주하나님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겠습니다’ 라고 응답한다. 이렇게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들과 함께 주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언약을 맺는다.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다는 의미는?) 하여간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언약맺은 이 사건과 언약을 맺으면서 제정한 율례와 법도를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주하나님의 성소 곁 상수리 나무 아래에 큰 돌을 세워 언약의 증거로 삼았다. 여호수아는 이 큰 돌이 언약의 증거가 되리라 라고 하면서 주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증거돌을 세운후 백성들을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었다. (120세에 죽은 모세보다 10년을 덜 살았고, 모세는 죽기까지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는데 여호수아에게는 끊임없이 늙었다는 수식어가 붙였다.) 여호수아는 죽어 자신이 기업으로 받은 딤낫 세라에 장사되었다. 사관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주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주하나님을 섬겼다고 기록한다. 또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다고 덧붙인다. 여호수아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 자손이다. 사관은 세겜땅은 야곱이 백크시타를 주고 하몰에게서 산 밭이라고 주석을 단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의 죽음과 함께 제사장 엘르아살도 죽어 장사되는 것으로 마친다.

// 은혜는 결코 값싸지 않다. 순종없이 맹세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보화가 감추인 밭을 사는 것이고 값비싼 진주를 사는 것이라고 비유하셨다. 밭이든 진주든 자신이 가진 소유 모두를 팔아야 살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서약은, 곧 하나님나라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은 버리겠다는 서약이다. 많이 가진 자든 적게 가진 자든 자신의 소유 전부를 팔아 버려야 얻을 수 있다. 어떤 부자에게는 수십 조원 이상이 될 수도 있고 정말 가난한 자에게는 공짜가 될 수도 있으나 전부를 팔아야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구약에서도 동일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를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라고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 결국은 사야한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은 주어졌지만 점령해야 할 땅이다. 하나님나라는 주어졌지만 순종으로 누려야 (사야) 할 나라다.

주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동안에 이스라엘이 주하나님을 섬겼다고 한다. 결국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 영생이다. 참 안식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기록하고 큰 돌이 주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었고 백성들이 한 맹세를 (들은) 증거라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의 증인 됨을 망각할 때 하나님은 돌들로 증거를 삼아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다.) 우리 성도들은 22절 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증인이 된다. 성도라면 적어도 한번은 (세례 때) 삼위 하나님 앞과 여러 성도들 앞에서 서약을 한다. 성도는 서로가 이 서약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관계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