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3:1-18 읽기

1-6두로에 관한 경고다. 다시스까지 해상무역을 펼쳤던 두로가 황무해졌다고 하신다. 이 슬픔이 깃딤 땅에서부터 들려왔다고 하신다. 주님은 바다무역으로 부요하게 된 해변 주민들에게 잠잠하라고 명하신다. 시홀과 나일과의 무역으로 열국의 시장이 되었지만 미래를 이끌 청년들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였고 출산율도 바닥을 쳐서 미리가 없는 시돈을 향해 부끄러워하라고 명하신다. 방패역할을 하던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애굽도 고통당할 것이라고 하신다. (두로를 찾는 다시스 배들에게) 그냥 다시스로 건너가라고 하신다. 다시스로 하여금 두로에(해변주민에) 대한 애가를 부르라고 하신다.

7-14오래된 기쁨의 성, 땅끝 다시스까지 무역을 하던 성, 다시스 배가 들어오면 면류관을 씌워주며 환영하고, 바다 무역상들이 고관이요 존귀함을 받던 성. 이 두로가 황무해짐은 누구가 정하신 일인가? 만군의 주하나님께서 정하심이 아닌가. 주하나님께서 두로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한 자가 멸시를 받게하시지 않는가. 다시스여 더이상 두로에 속박받지 말고 나일 같이 스스로 충만하라. 주하나님께서 열방을 흔드시며, 주하나님께서 가나안의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심을 보라. (교만으로 주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시돈아 네게 다시는 기쁨이 없다. 깃딤으로 거처를 옮겨도 거기에서도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신흥국 갈대아(바벨론) 땅도 앗수르에 의해 황무해지지 않았느냐.(나중에는 앗수르가 다시 바벨론에 의해 망한다.) 다시스 배들아 슬퍼 울어라. 너희의 견고한 무역상대가 파괴되었다.

 15 (그러나) 칠십년 후 두로는 슬픔의 노래가 아니라 기생의 노래가 불려지는 땅이될 것이라고 하신다. 잊혀졌던 두로는 음녀로 등장해 기묘한 연주와 노래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게 될 것이다.  칠십년 후의 두로는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아닌 음란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로의 몫이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당신의 백성을 배불리 먹이실 것이다.

>>해상무역으로 부요하게 되어 하나님 없이 교만해지고 흥청망청 지내던 두로는 심판을 받는다. 칠십년 후 다시 재기한 것처럼 보이나 이번에는 음란장사로 부를 쌓으니 심판을 면할 수 없다. 하나님 없는 곳에 쌓아두는 재물은 결국 누구의 것이 될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은 탐심으로 가득한 부자 이야기도 하셨다. “…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라며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남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의 결국을 가르치신다. 야고보는 내일 일을 모르는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적용한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고 한다. 오늘 두로의 이야기다.

이사야 22:15-25 읽기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 것은 죽기까지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이라고 하셨다.

15-19주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재무장관이자 총리인 셉나에게 말씀하신다. 셉나에게 왜 높아지며, 왜 스스로 무덤을 팠느냐고 하신다. 주하나님께서 셉나를 단단히 결박해서 세게 던져버릴 것이라고 하신다. 셉나가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쳤다고 지적하신다. 수치를 끼친 셉나는 결국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하나님께서는 이런 셉나를 직위해제 하시며 지위를 낮추실 것이다.

20-25 대신 그날에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불러 셉나를 대신할 것이라고 하신다. 엘리아김이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의 살림을 맡은 총리/재무장관이 돌 것이라고 하신다. 엘리아김에게 다윗의 집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다.  엘리아김의 지위는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견고할 것이라고 하신다. 엘리아김은 집안/족보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자랑은 교만으로 교만은 맡은 지위를 녹슬게 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들도 삭아 떨어져 모든 명성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하신다. 주하나님의 말씀이다.

>> 교만하고 자기를 위해 일한 셉나가 쫓겨나며 낮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셉나를 대신하여 일을 맡은 엘리아김의 운명 또한 쉽지 않다. 엘리아김은 못에 지나지 않는다. 단단한 곳은 주하나님이시다. 반석이신 우리 주님이시다. 단단한 곳에 박힌 못도 세월이 지나면 삭고 부러진다. 엘리아김은 후손들도 각자 단단한 곳에 스스로 박히는 못이 되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자기만 좋은 못으로 단단한 곳에 박혀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녹슬 가르치는 자(목회자)에게만 매달려서는 안된다. 스스로 단단한 곳에 주님께 뿌리를 내려야 한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바울은 에베소에 편지한다. 주님께 뿌리를 내리는 증거는 바로 형제 사랑이다.

이사야 22:1-14 읽기

1-5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 (환상의 골짜기는 어디? 현대인의 성경은 환상의 골짜기를 예루살렘이라고 번역한다. ) 사람들은 지붕에 올라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기 위해설까? 예루살렘은 잔치로 소란하며 즐거워하던 고을이었지만 이제는 살육당한 고을이 되었다. 그것도 전쟁중에 적의 칼에 죽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십보 도망쳤던 지도자들은 다함께 잡혀 결박당하였고 백보 도망쳤던 자들도 결박당했다고 하신다. 통곡한다. 백성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는 자신을 위로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한다. (뒷절에 보면 사실 통곡하며 자복해야 할 사람은 유다백성들이다.) 환상의 골짜기에서 일어난 모든 혼란은 주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고 하신다.

6-11 엘람사람과 기르 사람이 무장하고 환상의 골짜기로 진격해서 아름다운 골짜기를 가득메우고 성문을 향해 공격준비를 했다. 그들은 유다 눈에 끼였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는다는) 꽁깍지를 벗겨버렸다. 유다는 그제서야 병기창고에 무기가 없이 풀만 무성하고 예루살렘(다윗)성벽도 무너진 곳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에 대비해서 수로를 만들고 집을 헐고 언든 자재로 성벽을 보수했다. 성벽사이에 해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전쟁준비가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공경이었다.

12-14 그날에 만군의 주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통곡하라고 하신다.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고 하신다. 한마디로 회개하고 주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일 죽으리니 오늘이라도 배부르게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자고 한다고 하신다. 하나님으로 기뻐하지 않고 배부름과 술취함으로 기뻐하는 것이 죄악이라고 하신다. 죽기까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라고 하신다. 만군의 주하나님의 말씀이다.

>>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최선의 전쟁준비는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경영하는 대신 인간의 노력만 기울였다. 자신들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자 하루라도 먹고 취하자고 했다.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 것이 죽기까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다.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함께 하나님께 무릎꿇고 경외하는 소망의 그 날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경외하는 남은 자 몇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뿐이다.

이사야 21:1-17 읽기

1-10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해변광야를 바빌로니아로 번역한다.) 해변광야를 휘몰아 칠 폭풍이 몰려올 것이라고 하신다. 이사야는 해변광야에 대한 경고의 묵시가 참혹 하다고 말을 한다. 엘람과 메대로 하여금 바벨론에 의해 고통받는 모든 민족의 탄식을 그치게 할 것이라고 하신다.  묵시의 참혹상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사야 자신이 해산하는 두려움과 고통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고 보지도 못하겠다고 고백할까?  이사야는 자신의 마음이 혼돈스럽다고 한다. 앞에서 신탁했던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함께 하나님께 무릎꿇는)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이사야는 떨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일어나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회상을 차려놓고 먹고 마신다. 주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는 곧 닥칠 바벨론의 함락을 파숫꾼의 보고로 알게하신다. 두줄로 (파죽지세로) 달려 온 기병대는 바벨론을 함락시킨다. 바벨론이 함락되었다. 바벨론의 우상들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다.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는 이사야가 유다가 바벨론에게 짓밟히고 타작당했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이사야는 유다에게 이스라엘의 만군의 주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함락도 전한다.

11-12 두마에 대한 경고가 이어진다. 세일산에서 이사야를 찾는 것으로 보아 에돔에 관한 경고라고 하겠다. 두마는 밤이 (고통의 시간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이사야에게 묻고, 이사야는 아침이 오겠지만 밤도 (다시) 오겠가고 대답한다. 밤이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두마가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대답한다.

13-17 아라비아에 대한 경고가 이어진다. 드단 대상들 데마의 주민들에게 아라비라로 피난온 사람들을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쇠멸할 게달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게달은  바벨론의 압제에 동참했을 민족일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아라비아 (드단 데마 게달) 사람들에게 정한 기한내에 패망할 압제자의 편에 서지 말고 피난자들을 영접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신다.

>> 어떻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이사야 20:1-6 읽기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 앗수르가 아스돗을 쳐서 취한 해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허리띠를 풀고 신을 벗으라고 하신다. 속옷?만 입고 벌거벗으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사야에게 삼년동안 벌거벗은 몸과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라고 하신다. 다시말해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게 벌거벗긴 채 포로로 끌려가는 수치를 보일 것이라고 신탁하신다. 구수와 애굽을 의지하려고 했던 자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앗수르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려고 구스와 애굽을 의지하던 (믿던) 나라들이, 구스와 애굽의 처지를 보고 앗수르로부터 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 유다역시 앗수르의 압제를 피하기 위해 애굽에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애굽은 믿을 만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신다. 애굽편에 섰던 아스돗만이 아니라 아스돗이 의지했던 애굽과 구스도 결국은 앗수르에게 패할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는 무엇에 충성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우리의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께 성실(충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이사야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곧 수치를 당하여도, 예수께 충성한다는 뜻이다. (어제 말씀에서도 애굽도 앗수르도 이스라엘도 패망과 수치를 지나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믿음=순종=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