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2:18-38 읽기

사흘만에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며 말문을 연다. 사흘전 형들을 바로의 생명으로 겁박하던 모습에서 바뀌었다. (의도적이었는지, 사흘동암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하여간 요셉은 한명이 가서 막내를 데리고 오라고 했던 제안에서 한명만 인질로 남고 나머지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굶주림으로부터 가족을 구한후 막내를 데리고 오라고 명한다. 그래야 너희가 산다고 말한다. (인질이로 잡힌 한 명이 산다고 하지 않고 너희가 산다고 말을 했다.) 형들은 요셉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형들은 요셉의 일로 범죄한 댓가를치르는 것이라고 서로 말했다. 르우벤은 요셉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자고 말했을때 왜 듣지 않았느냐고 동생들에게 말하며, 지금 요셉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통역을 사이에 두고 요셉의 말을 듣던 형들은 요셉이 자기들이 하는 말을 못알아 듣는다고 생각했다. 형들의 말을 듣던 요셉은 나가서 형들 몰래 울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형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인질로 삼았다. 왜 시므온? (르우벤은 반대했고, 그러면 둘째 형이 선동했다고 생각해서일까?)

요셉은 나머지 형들의 곡물자루에 곡식을 채우고 곡식값도 도로 곡물자루에 넣게하였고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먹을 양식도 따로 주었다. 형들은 곡식을 나귀에 싣고 가나안으로 출발했다. 도중에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곡물 자루를 풀어본 형들은 곡식값으로 지불한 돈이 자루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했는지 하면서 가나안 땅에 돌아와 아비 야곱에게 자초지종[30-35]을 말했다.

야곱은 요셉도 잃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베냐민을 또 빼앗가 가고자 하느냐 탄식하했다. 르우분은 만약 자신이 시므온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아들을 담보로 베냐민을 데리고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을 내줄 수 없다고 했다. 베냐민에게까지 화가 미치면 야곱 자신이 죽는 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바로의 생명을 두번이나 들먹이며 형들에게 한 명은 가서 동생을 데려오고 나머지는 인질로 잡혀있어야 한다고 겁박하던 요셉이 사흘이 지난 후 형들에게 한 명만 인질로 잡혀있고 나머지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가족의 굶주림을 구하고 막내를 데리고 오라고 새로운? 생명보전의 방법을 제시했다. 새로운 제안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라고 바뀐 심경을 토로했다. 십분의 일을 보내는 대신 십분의 일을 잡아두고 십분의 구를 보내기를 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십일조를 하느냐 안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일상에서 십분의 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중요하다고. 본문과 상관없는 엉뚱한 생각인가?) 요셉은 가나안에 남아있는 굶주린 가족의 생명을 걱정했으리라. 고진이와 감래를 야곱에게 안겨주기를 바랬으리라. 오늘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라고 하신다.

>> 내어주지 않으면 잃거나 없어지거나 빼앗긴다. 야곱의 삶에서 배우는 교훈

창세기 42:1-17 읽기

가나안도 흉년을 피할 수 없었다. 야곱은 애굽에는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오라라고 명한다. 곡식을 사오지 않아 굶어죽을 셈이냐고 묻는다. 요셉의 열 형들은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갔다. 야곱은 막내 베냐민을 요셉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 애굽을 오가는 길에 재난이 베냐민에게 닥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요셉의 형들만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갔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곡식을 파는 일도 주관하고 있었다. (곡식을 파는 곳은 각 성읍마다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곡식파는 곳도 두루 다니며 관리했을 것이다.) 마침 요셉이 있는 곳에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사러 왔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요셉은 형들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고 형들은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봤으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요셉은 어렸을 적 꿈을 기억했다.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이라고 몰아갔다. 형들은 요셉이 주인이요 자신들은 종임을 자처하고 정탐꾼이 아니라 한 아비의 아들들로서 아비의 명에 의해 곡물을 사러 왔다고 대답했다.

요셉은 형들에게 정탐꾼이 분명하다고 몰아부쳤다. 형들은 자신들은 열두형제로 가나안에 사는 한 아비의 아들들로 막내는 아버지와 함께 있고 하나는 없어졌다고 설명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만약 정탐꾼이 아니라면 막내를 데려와서 형들의 말을 증명하라고 다구쳤다. 열명중 한명을 보내어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나머지는 인질로 잡아 두겠다고 맹세했다. 요셉은 일단 형들을 삼일 동안 가두었다.

>> 요셉의 첫번째 꿈은 이뤄졌다. 꿈을 이루기 위해 요셉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셉은 다니엘처럼 지도자 수업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요셉의 성실이 요셉을 탁월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요셉이 꿈꾸던 자였다가 꿈을 해석하는 자가 되었고, 꿈을 해석하던 자였다가 꿈을 경영하는 자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신 결과였다. 하나님은 탁월하게 훈련받은 사람을 사용하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낮은 사람주변을 우둔하게 하셔서 그 낮은 자를 사용하기도 하신다. 내가 탁월해져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깨끗한 자가 되어야 한다.

창세기 41:37-57 읽기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요셉의 계획을 좋게 여겼다. 모두를 만족하는 꿈의 해석이요 모두를 기쁘게 하는 대책이었다. 바로는 신하들에게 요셉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명철하고 지혜롭게 하셨으니, 요셉에게 바로의 집, 곧 애굽을 다스리라고 명령한다. 애굽에서 요셉보다 높는 것은 바로 자신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바로는 그 자리에서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웠다. 바로 자신의 인장반지를 빼어 요셉에게 끼워주었다.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목거리도 걸어주었다. 바로가 타는 여분의 수레에 요셉을 태우고 무리로 하여금 요셉의 마차행진에 고개를 숙이도록 명했다. 바로가 요셉을 애굽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삼았다.

바로는 요셉에게 바로의 권세를 주었다. 이제 요셉은 바로의 권세를 등에 업고 못할 일이 없었다. 바로는 요셉에게 ‘사브낫바네’라는 애굽식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리고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주었다. 총리 요셉은 온 애굽을 돌아보았다. 이때 요셉의 나이 삼십이었다. 첫 일곱해 풍년동안 소출이 심히 많았다. 요셉은 각성에 곡물을 저장했다. 쌓아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많았다.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은 두아들을 아스낫에게서 낳았다. 장남을 므낫세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당한 모든 고난을 잊을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뜻이다. 둘째를 에브라임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므낫세는 고진이요 에브라임은 감래라는 뜻이다.

일곱 풍년이 그치고 일곱 흉년이 시작되었다. 주변 각국에는 기근이 왔으나 애굽 땅에는 먹을 것이 있었다. 그러나 애굽 백성들은 흉년으로 수확이 없자 굶주렸다. 백성들은 바로에게 양식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바로는 요셉의 관리를 받으라고 했다. 요셉은 창고를 열어 저장해 두었던 곡식을 애굽백성들에게 팔았다. 애굽백성뿐만 아니라 주변 각국 백성들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올 정도로 온 세상에 기근이 심했다. 요셉이 이 모든 일의 총책임자였다.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애굽에서 지난 십수 년의 세월동안,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을 살았다. 애굽에 도착했을 때부터 친위대장 보디발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함을 알아보았고, 십수년이 지나 애굽의 바로는 요셉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날에는 누가 세상에 임마누엘을 드러내며, 누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칭송받나? 개인이 그렇지 못하다면 교회가 그러해야 하는데… 

>> 므낫세와 에브라임. 사자성어로 번여하면 ‘고진감래’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고진이와(므낫세) 감래라고(에브라임) 붙였다.  이미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누구나 다 부러워 할 요셉이 첫 아이를 낳고서야 이름을 ‘고진’이라고 불렀다는 것에 주목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쭉 형통했던 요셉의 삶도 고생이었다는 뜻이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것을 알고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라고 주신 말씀이다. 성도의 삶이 이렇다.

창세기 41:17-36 읽기

바로는 요셉에게 자기가 연이어 꾼 꿈을 얘기했다. 그리고 점술가들은 해석하지 못했다. 요셉은 바로에게 두개의 꿈은 한가지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여주신 것이라고 대답하고 꿈을 해석해 주었다. [일곱 좋은 암소와 일곱 좋은 이삭은 7년의 풍년을 의미하고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와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은 7년의 흉년을 뜻한다. 후에든 일곱 흉년이 너무 심해 이전 풍년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꿈을 연이어 꾼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정하셨고 속히 행하신다는 뜻이다.] 요셉은 바로에게 명철하고 지혜있는 사람을 택해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라고 조언한다. 아니 일곱해 풍년에 감독관을 두어 애굽 땅의 곡물 오분의 일을 거두어 각 성읍에 쌓아 저장하여 일곱 흉년에 대비하라고 대책까지 바로에게 말했다.

>> 꿈꾸던 자 요셉이 꿈을 해석하고 꿈을 경영하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 임마누엘! 말씀을 읽는 사람이  말씀을 해석하는 자가 되는 것까지는 쉽다. 그러나 말씀을 경영하는 자로 세움을 받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역시 임마누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말씀을 해석하는 성도라 해도 번민할 수 밖에 없다. 구덩이에 떨어지고 옥에 떨어졌던 요셉이 꿈을 경영하는 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임마누엘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비천한 곳에서도 임마누엘을 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고 하신다.

창세기 41:1-16 읽기

만 이년 후에, 2 years later. 바로가 꿈을 꾸었다. 아름답고 살진 입곱 암소가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암소에게 잡혀 먹는 꿈이었다. 꿈에 (놀란) 바로는 바로 깨었다가 다시 잠이들어 연이어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가늘고 동품에 마른 일곱이삭에게 먹히는 꿈이었다. 바로는 꿈에서 깼다.

아침에 깨어난 바로는 꿈으로 마음이 번민했다. 점술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꿈을 말해주었으나 그 누구고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자신과 떡 굽던 관원장이  친위대장의 옥에 갇혔을 때의 일을 바로에게 말했다. 술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라고 말 한 것은 아마도 요셉에게 은혜입고도 지난 2년동안 그 은혜를 잊어버린 배은망덕이라기보다 바로에게 죄를 지어 감옥에 갔던 그 사실을 기억한다는 뜻일 것이다. 술맡은 관원장에게는 바로에게 자신의 죄를 다시 상기시키게 하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복직될 정도로) 충실한 신하여서 자신의 꿈을 해석해준 요셉을 바로에게 소개했다.

바로는 사람을 보내 요셉을 불렀다. 요셉은 용모와 복장을 단정히 하고 바로 앞에 섰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는데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고 해서 불렀다고 말했다. 요셉은 자신이 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꿈을 해석하신다고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꿈을 해석하시면 바로의 번민은 사라지고 편안해 질 것이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해석도 바로의 번민을 날려주지 못했다. 점술가와 현인들이 뭐라한 들 신과 같은 바로보다 권위가 낮았기 때문이리라. 점술가와 현인들이 통일된 답을 내 놓았다면 몰라도, 그들은 바로의 환심을 사기위한 각각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다. 그는 꿈의 해석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말했다. 바로의 번민을 날릴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바로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복음을 전했다. 요셉의 마음에는 꿈의 해석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꿈을 꿈대로 경영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요셉은 꿈꾸는 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꿈을 해석하는 자다. 그리고 앞으로는 꿈을 경영하는 자가 될 것이다. 꿈꾸게 하시는 분도,꿈을 해석해 주시는 분도, 꿈을 경영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결국 임마누엘이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