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9편 읽기

시인은 다짐한다. 시인은 혀로도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악한자를 향해서도 입에 재갈을 물면 물었지 말로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시인은 결심대로 입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은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말을 참으니 걱정 근심만 깊어 갔다고 노래한다.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결국 주님께는 입을 열어 아뢴다.

주님, 알려주십시오. 시인은 인생의 끝이 언제인지,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주께 묻는다. 덧없이 지나가는 인생을 얼마나 더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시인은 주께서 인생이 짧다고 답해 주셨다고 노래한다. 주님 앞에서는 찰라요, 없는 것이나 같다고 노래한다. 인생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노래한다. 화려했던 시절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살아온 걸음걸음이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노래한다. 재산을 쌓는 것도 허사라고 노래한다. 쌓아두어도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고. 그래서 시인은 주님만 바라본다. 주님만이 시인의 희망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에게 주님만이 희망이라면, 시인은 죄악에서 건짐을 받아야 한다. 주께만 구원이 있다는 시인을 조롱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달라고 기도한다. 시인은 잠자코 있겠다고 주께 아뢴다. 주께서 시인의 희망이심을 보여달라고 기도한다. 시인은 주께서 시인을 채찍질하는 것을 거둬 달라고 간구한다. 주께서 시인을 치시면 죽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어리석은 자들이 시인을 조롱한다고 주께 항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인생의 허무함을 인정하고야 만다. 그래서

시인은 주께 기도한다. 주께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시인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을 보시고 응답해 달라고. 시인은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길 원한다. 죽기전에 다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며 미소지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시인에게 환한 미소로 웃어주시길 기도한다.

>>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라고 편지한다. 시인의 노래와 다를 바 없다.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혀에 재갈을 물고서라도 악한 말을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들은 구원의 길이 없다고 시인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한다. 죄인인 자신을 측은히 (자비롭게) 봐 달라고. 그래서 시인이 미소지을 수 있도록. 이땅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다가 영원히 주님과 살아갈 수 있도록.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재산을 쌓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쌓으라고 하신다. 순종이 믿음을 쌓는 길이다. 작은 일 하나하나에 순종하며 사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미소를 보게 하소서.

시편 38편 읽기

시인은 주께 책망을 받는다. 그것도 뿔이 단단히 나신 주께 징계를 받는다. 화살에 찔린 고통과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압박을 받는다. 시인은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몸에 성한 곳이 없다고,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뼈마디까지 아프다고 고통의 노래를 부른다. (주의 진노가 자신의 죄로 말미암음을 알고 노래한다.)

시인은 자신의 죄악을 지적받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몸의 상처는 썩어 악취가 난다. 시인은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시인한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슬픔에 빠진다. 허리도 쑤시고 피부도 성한 곳이 없다. 몸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불안으로 신음한다.

시인은 주를 찾는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습니다. 나의 탄식을 주께서 아십니다. 시인은 자신의 심박도 약해지고 동공도 풀리기 시작한다고 주께 아뢴다. 사랑하는 자와 (가족과) 친구와 친척들도 시인에게 등을 돌린다. 원수들은 이때가 기회라고 시인을 해치기 위해 올무를 놓고 음모를 꾸민다. 시인은 이 모든 상황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이 초래되었으니 핑계댈 말이 없다고 인정한다.

시인이 바랄 것은 오직 주님뿐이다. 시인은 주님의 응답을 기다린다. 시인은 자신의 잘못으로 벌받는 것을 원수들이 기뻐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 만약 잘못을 하고도 자신은 징계를 받지 않는다며 교만했을지도 모를 자신을 경계한다. 시인은 자신이 넘어지게 되었다고 근심가운데 있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다시금 주께 죄악을 시인하고 죄를 뉘우친다 (슬퍼한다). 시인의 원수들이 죄악을 인정한 시인을 강하게 몰아부친다. 시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을 따라) 죄악을 시인한 것을 물고 늘어진다.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시인이 죄를 인정했으니 시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외쳐댄다. (빌라도 앞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하던 모습이 연상된다.)

시인은 주님의 자비를 구한다.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벌을 받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 아니다. 벌을 통해 잘못을 깨닫고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다.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고린도 성도를 변화시킨 모습을 나열한다 (고후 7:11). 열성, 진리에 대한 변호, 죄악에 대한 의로운 분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주를 그리워하는 마음, 열정, 응징 . 우리도 주께서 성도의 구원이심을 알아야 한다. 시인의 노래처럼.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벌을 받아도 뉘우치면 주께서는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버리지 않으신다. 멀리하지 않으신다. 주께서 나의 구원이시다.

시편 37:23-40 읽기

시인은 확신한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주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신다는 것을. 혹여 비틀거려도 주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은 젊어서부터 늙은 지금까지, 의인이 버림받는 것과 그의 자손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간증한다. (결국 의인은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사람은, 곧 의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시인은 적용한다. 이런 의인은 자자손손 큰 복을 받는다. 그러니 청자들에게도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에 힘쓰면서 이땅에서 살아가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공의를 사랑하시고, (의를 행하는) 성도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은 자자손손 영원토록 주의 보호를 받는다. 악인은 그렇지 않다. 악인의 자손은 끊어질 것이다. 의인은 땅을 차지하고, 언제나 거기에서 살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의인의 혀는 공의를 말한다. 의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 의인의 발걸음은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 않는다.

악인은 의인을 죽일 기회를 엿본다. 그러나 주님은 의인을 악인의 손에 넘기시지 않는다. 악인이 거짓으로 고소한들 주께서는 의인에게 유죄를 선고하지 않으실 것이다. 시인은 주를 기다리며 주의  법도를 지키라고 명령한다. 주께서 주를 기다리며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를 높이시고 (새)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물론 악인들이 뿌리째 뽑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노해한다. 악인의 세력은 무성한 잎을 뽐내는 나무같이 크게 보이지만, 한순간이 지나면 흔적조차 사라지고 아무릴 찾아도 다시 찾아볼 길이 없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흠없는, 정직한 사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래가 (새하늘과 새땅이) 주어지나 범죄자들을 모두 다 멸망할 것이라고 노래한다. 악한 자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선언한다. 의인이 구원받아 새하늘과 새땅을 누리는 것은 주께로부터 온다. 이땅에서 재난을 받을 때 주께서 의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주께서 의인들을 도우셔서 구원하여 주신다. 의인들이 주님을 피난처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시1:6)”

>>   주를 기다리며 주의 법도를 지키는 삶. 곧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삶. 흠없는, 정직한, 평화를 사랑하는 삶.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되 이자를 받지 않는 삶. (아니 받을 생각없이 꾸어주는 삶.) 이것이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일이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이런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노래한다. 이런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노래한다.

예수께서도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 하늘 나라를 소유하며, 위로받으며, 땅을 차지하며, 배부르며, 자비를 누리며,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고 가르치셨다.

시편 1편의 결론은 계속해서 불리운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시1:6)”

시편 37:1-22 읽기

시인은 악한 자들이  형통하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샘하지 말라고 노래한다. 악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고 그 이유를 밝힌다. 그러니 주님만 의지한고 선을 행하라고, 이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라고 명령한다. (새땅이 있다는 뜻이다.)

시인은 기쁨을 오직 주님에게서 찾으라고 노래한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노래한다. 주님만 의지하면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이땅에서 성실하게 사는 우리의 의로움을 빛과 같이, 우리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주님만 애타게 찾으라고 명령한다. 악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의 길이 평탄해 보이고, 악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듯 보여도 마음상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렇다고 악한 자들 불의한 자들에 대한 노여움도 버리라고 하신다. 격분을 가라앉히고 불평하지 말라고 하신다. 노여움, 격분, 불평은 우리로 오히려 악으로 기울게 할 뿐이라고 노래한다.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반드시 (새)땅을 물려 받게 될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으라고 말한다. 악인은 멸망하고야 한다. 형통한 것 같던 악인의 자취는 사라지고 말것이라고 노래한다. 대신 겸손한 사람들이 (새)땅을 차지할 것며, 겸손한 자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노래한다.

악인들이 (여전히) 의인을 모해하며, 악인들이 여전히 의인들을 보고 이를 갈지라도, 주님은 오히려 악인을 비웃으실 것이다. 주님은 악인의 길을 인정하시지 않으신다. 악인의 길을 망할것임을 아신다. 악인들은 칼로, 활로,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쓰러뜨린다. 자기 길을 똑바로 걷는 사람을 죽이려 든다. 갑질을 해댄다. 그러나 악인들이야 말로 자기들의 칼에 찔리고 악인들의 활은 꺾이고 말 것이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많은 재산보다 낫다고 노래한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지만 의인은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흠 없이, 정직한 사람을 주님께서 보살펴 주신다. 매일매일, 자자손손 보살펴 주신다. 재난을 당할 때도 부끄럼움을 당하지 않게 지켜주신다. 기근이 들어도 굶어죽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은 망할 것이다. 주님을 대적한 자들은 가뭄에 풀밭이 타들어가듯 없어질 것이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악인들은 빌리기만 하고 갚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거저주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은혜를 베풀고 거저주는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신다. (새)땅을 주신다.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게 하신다. 그러나 주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땅에서 끊어질 것이다. 악인은 멸망당한다.

>> 복있는 자의 길과 악인의 길은 확연히 갈라진다. 새땅을 소망하며 살라고 하신다. 아니 이땅에서도 새땅에서 사는 것처럼 은혜를 베풀고 거저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하루하루 정직하게 살아가면 주께서 자자손손 보살펴 주신다.

시편 36편 읽기

악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반역의 충동만 있다. 악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 악인들의 눈빛은 지나치게 의기 양양하다.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사기와 속임수의 말만하지 슬기를 내어 좋은 일을 (선한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일을) 하기는 이미 틀린 자들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이웃을 속일 궁리나 하고 범죄의 길을 고집하고 한사코 악을 버리지 않는다.

시인은 주님을 찾는다. 주님을 부른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들과 달리)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차 있다. 주님은 미쁘신 분이다. 우람한 산맥처럼 의로우신 분이다. 깊은 호수처럼 공평하신 분이다. 주님은 외모로 사람을 택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사랑은 한결같다. 시인은 한결같은 주님의 사랑이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고 노래한다. 사람들이 주님의 날개, 곧 최고의 사랑아래를 피난처 삼는다고 노래한다. 주님의 사랑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은 주님의 집에 있는 것으로 배불리 먹고 마신다고 노래한다.

주님의 사랑에 피한 사람들은 생명 샘에서 흐르는 시내의 단물을 마시며 주님의 빛아래 환히 열린 미래를 본다. 시인은 주님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한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달라고 노래한다. 오만한 자들이 결코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짓밟지 못하게 해달라고, 악한 자들이 시인에게 갑질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시인은 주께서 베풀어주신 (밥)상에 앉아 악을 일삼는 자들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함을 본다.

>>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잘못에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당근 하나님을 모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인처럼 주님을 찾는 사람,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무엇이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바로 아는 사람들이다. 바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주께서 베풀어 주시는 밥상에서 배부르게 먹고 마신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하루를 또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어서고, 또 일어서서, 영원히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