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1-9 읽기

1 바울은 갈리디아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느냐고 묻는다. 2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는지?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는지? 3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의 질문에 즉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꼬집는다.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아 믿음을 시작한 갈라디아 사람들이 , 왜 육체로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지 묻는다. 4 바울은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 많은 체험이 모두 허사가 되었냐고 묻는다? 정말 허사로 끝마치려고 하는지 묻는다. 5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성도가 율법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소식(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6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 //바울이 사용한 ‘믿으니’라는 동사는 의지/신뢰/충성하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할례를 명받았고, 율법은 출애굽 후에나 주어졌다.

7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 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아라’ 하고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에게 명령한다. 8 바울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고 가르친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신 말씀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이라고 설명한다. 9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교훈한다.

//믿음은 소유하는 것이다. 믿음에서 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을 얘기 하면서,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를 논한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는다고 단언한다.  성도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은혜에 율법의 행위를 덧붙이는 것을 경계한다. 예수께서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이방 사람들이랴! 성도가 받은 복 중의 복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게, 충성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는 온전히 믿음으로 살 수 없으니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이 믿음(충성)은 성령의 열매다.

갈라디아서 2:11-21 읽기

[바울은 복음을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은혜’ 라고 풀어냈다. 그래서 디도의 무할례도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 곧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습관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정리했다.]

11 그런데 베드로가 안디옥에 와서 유대교 신앙고 전통 때문에 잘못했을 때, 바울은 베드로와 대면해서 책망했다고 말한다. 12 베드로는 안디옥에 와서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곧 예루살렘에서 할례 받은 사람들이 오자 두려워하여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던 자리를 떠났다. 13 함께 있던 유대 사람들도 베드로와 함께 위선을 했다. 바나바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다. 14 바울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되라고 강요합니까?” 하고 따졌다. 

15 바울은 자신이나 베드로나 유대 사람이고 이방 출신의 (율법을 모르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알기에, 자신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것이라고 바로 잡는다. 바울은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따르는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한다. 17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는 것을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따르는 것이라면,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제대로 따르지 못해 죄를 짓게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죄를 짓게 하는 분이라는 말이 되는데,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18 (예수께서)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헐어버렸는데 그것을 다시 세우면, 세우는 자가 범법자가 된다고 말한다. 19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고백한다. 대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산다고 고백한다. 20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 살고 계시고, 바울이 여전히 육신으로 사는 사람은 바울 사랑하셔서 바울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21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 은혜로 성도를 의롭다고 하여 주신다.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복음은 유대교 신앙과 전통에 뿌리를 둔다. 베드로도 심지어 바나바도 복음의 진리를 떠나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따르기 위해 위선을 했다.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을 위해 이방사람들에게는 이방인이 되어야 하는데 이방인인 체했다고 나무랐던 것이다. 바울이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이 없는 자와 같이 되어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했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어 약한 자들을 얻고자 했다. 그런데 베드로와 일행은 얻고자 한 사람들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같이 된 ‘척’했기  때문에 위선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척’하는 위선은 감출 수가 없다. 

//바울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 바울은 믿는(동사)가 아니라 믿음(명사)를 강조한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 충성(믿음)을 다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더이상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신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 뜻대로 사는 삶을 산다고 고백한다. 다시한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며, 하나님은 이 은혜로 성도를 의롭다고 해 주신다. 율법에 (유대교 신앙과 전통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충성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교훈한다.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충성(신실함)이다. 신실함(충성)은 (행위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갈라디아서 2:1-10 읽기

1 그 다음에 십사 년이 지나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2 바울이 예루살렘에 다시 간 것은 계시를 따른 것이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예루살렘에서 공적으로 사적으로 설명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한 이유를, 자신이 지금까지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일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3 바울은 예루살렘에 동행한 디도가 그리스 사람이며,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다고 밝힌다. 4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은 할례를 강요해서, 바울 일행도 (할례의) 노예로 만들고자 했지만, 바울 일행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포기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5 바울 일행은 거짓 신도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는데, 굴복하지 않은 이유는 복음의 진리가 언제나 갈라디아 교회와 함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6 바울은 유명하다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제안도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들이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여간 유명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밝힌다. 7 오히려 그 유명한 사람들도 베드로가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았다면, 바울은 할례 받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았다고 알게 되었다. 8 곧 베드로는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바울 자신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9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으로 인정받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하나남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일정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오른 손을 내밀어 친교의 악수를 했다. 이렇게 바울 일행은 이방 사람에게로 가기로 했다. 10 예루살렘의 유력자들은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라고 당부했다. 바울은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바울이 마음을 다하여 해 오던 오래된 습관이라고 마무리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자신이 박해하던 그 믿음이라고 말했다. 바울이 첫 예루살렘 방문 이후에 14년 동안 한 일은 결국 유대교 신앙과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박해하던 ‘그 믿음’을 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년 동안 바울은 고향 다소에서,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서 무리들을 가르쳐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흉년이 들이 들어 힘들어 하는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가지고 다시 방문한 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 아닐까 한다 (행11참조). 이 모든 것이 계시에 따른 것이라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분명히 한다. 바울은 디도의 무할례를 언급하면서, 복음은 유대교 신앙과 유대교 전통에 따라 자신이 박해하던 ‘그 믿음’임을 재천명한다. 그래서 복음은 할례자나 무할례자와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야고보, 베드로, 요한도 복음이 할례나 무할례와 상관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인정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 역시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뛰어 넘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이다(약1). 바울에게도 이런 경건이 오래된 습관이었다. 

갈라디아서 1:11-24 읽기

11-12 바울은 ‘다른 복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 무엇인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밝힌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사람에게서 받은 복음이 아니요, 바울이 배운 복음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받은 복음이다.

13-17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적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솔직하게 밝힌다. 수신자들이 이미 듣고 알듯이,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고, 하나님의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바울은 이스라엘 동족 가운데서 유대교 신앙에 앞서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성이 있었다. 그런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 보이셨다. 바울은 자신을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다고 간증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보이셨을 때, 바울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의논) 하지 않았고, 먼저 사도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에도 올라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 갔다.

18-24 삼년이 지나서야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베드로를 만났고, 베드로와 함께 보름 동안 지냈다. 바울은 베드로와 주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 그 뒤 바울은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 유대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는 바울의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전에 없애버리려고 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도, 바울로 인해 하나님께 줄곧 영광을 돌렸다고 간증한다.

//바울은 ‘다른’복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사람에게서 나거나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만나 받은 것이라고 밝힌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먼저 사도된 사람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사도들을 만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삼년이나 지나서고 (그동안 아라비아에서 사도적 역할을 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것도 베드로와 야고보만 먼저 만났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박해하던 그 믿음을 전하는 바울로 인해 하나님께 줄곧 영광을 돌렸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바울이 박해하던 ‘그 믿음’이다. 유대교 신앙과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박해하던 ‘그 믿음’이 곧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은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임을 교훈한다.

갈라디아서 1:1-10 읽기

발신자: 바울과 바울과 함께 있는 믿음의 식구. 바울은 사람들이 시키거나 사람들이 떠넘겨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심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수신자: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

인사말: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수신자들에게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성도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음.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아멘 (하나님께 영광, 수신자들에게는 평화)

6-10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속한 성도들, 곧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것에 놀란다고 편지를 시작한다. 물론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마치 다른 복음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한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바울 일행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발신자들을 대표하여?) 수신자들에게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사람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것이나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고 반문을 써가며 강조한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자신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다른(6절) 헤테로스 – 순수하지 않다. 불순물이 섞였다는 뜻. 다른(7절) 알로스 – 다르다. 다른(8,9절) 파라 – 옆에 붙은, 근사. 결국 바울이 말하는 ‘다른’복음은, 바울이 본문에서 풀어내듯이, 순수하지 않은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변질된 복음, 근본은 같을지 몰라도 본질에서 벗어난 복음, 왜곡된 복음이다. 따라서 참 복음과 다른 복음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제쳐놓고 다른 것을 강조한다면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기 쉽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