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1:1-12 읽기

주님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하신 말씀.

나이 많은 사람들은 들어라! 유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라! 과거에는 일어난 적이 없던 일이 일어난다. 이 새로운 일을 자녀들에게 말하고 자자손손 전해라. 풀무치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갉아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썰어 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 말끔히 먹어버렸다. 술을 즐기는 자들아, 깨어나서 울어라. 포도주를 즐기는 자들아 통곡하여라. 포도 농사가 막하였으니 새 술을 만들 포도가 없다. 셀 수 없이 많고 강한 메뚜기 떼같은 군대라 우리의 땅을 공격했다. 그들의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고, 날카롭기는 암사자의 송곳니와 같다. 그들이 우리의 포도나무를 망쳤다. 우리의 무화과 나무도 그루터기만 남겨놓았다. 나무껍질을 다 벗겨서 줄기가 하얗게 말라버렸다. 백성아, 울어라! 약혼자를 잃은 처녀처럼 울어라. 성전에 날마다 바치는 곡식제물도 동나고 부어드리는 제물도 떨어지니, 주님을 모시는 제사장들이 탄식한다. 밭이 황폐하고 곡식이 다 죽고, 포도송이가 말라 쪼그라들고, 올리브 열매가 말라 비틀어지도록 땅이 통곡한다. 농부들아, 슬퍼해라. 포도원 일군들아 통곡해라. 밀과 보리가 다 죽고 밭 곡식이 모두 죽었다. 포도나무가 마르고 무화과나무도 시들고 석류나무 종려나무 사과나무 할 것 없이 모두 말라 죽었다. 백성의 기쁨이 모두 사라졌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통곡하라고 말씀하신다. 백성의 기쁨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주님을 모시는 제사장들도 배를 채우지 못하니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기쁨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이어야 하는데, 주님을 떠났으니 기쁨이 모두 사라진 것은 당연한 결과다. 주님은 자연재해로, 외부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을 재앙가운데 빠뜨리신다. 그리고 백성에게 통곡하라고 명령하신다. 나이 많은 사람들조차도 땅으로부터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아니 땅조차 통곡했다는 일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재앙가운데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이 은혜다. 주님은 요엘을 통해 애통하는 자의 복을 선포하신다. 예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위로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사기 21:13-25 읽기

13-14 이스라엘 자손들은 림몬 바위에 숨어 사는 베냐민 자손들에게 화친을 선언했다. 베냐민 자손이 돌아오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르앗 야베스에서 데려온 여자들을 그들과 결혼시켰다. 6:4로 여자의 수가 모자랐다.

15-24 이스라엘 백성은 베냐민 지파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베냐민 사람들 가운데 아내를 맞이하지 못한 (이백 명) 사람들에게 실로에서 열리는 주님의 축제에서, 실로의 처녀들이 춤추러 나오면 보쌈해 가는 것을 허락했다. 여자들이 전쟁포로로 잡혀간 것도 아니고,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주지 않겠다는 맹세도 깨뜨린 것이 아니라고 회중의 장로들은 결정했다. 베냐민 사람들은 결정에 따랐다. 그리고 자기들이 유산으로 분배 받은 땅으로 돌아가서 성읍들을 재건하고 거기서 살았다. 실로에서 주님의 축제를 마치고 이스라엘 자손도 각자 자기 지파와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각자가 유산으로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갔다.

25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모두가 각자 유산으로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으니, 하나님의 다스림 대신 저마다 자기의 뜻대로 산다. 하나님나라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곳이요, 하나님의 다스림이 곧 하나님나라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꼴이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장로들 생각처럼 베냐민 지파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다. //사사기는 사사들의 영웅전이 아니다. 성도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야기들이다. 왕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아서다.

사사기 21:1-12 읽기

1-7 미스바 총회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11지파) 베냐민 사람과 결혼시키지 않도록 하자는 맹세도 했었다. 베냐민과 싸움에서 이기고 베델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이스라엘 중에서 한 지파가 없어지고 말았다고 울부짖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지파가 있는 지 알아보았다. 주님 앞에 나오지 않(았)으면 죽이기로 맹세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에 대하여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과 통혼하지 않도록 주님께 맹세했기 때문에 살아 남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아내를 구해 줄 방도를 몰라 걱정했다. 

8-12 조사 결과 길르앗의 야베스에서는 한 사람도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래서 회중은 용감한 군인 만 이천명을 길르앗 야베스로 보내 남자를 모두 죽이고, 남자와 동침한 일이 있는 여자도 모조리 죽였다. 그들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 가운데 아직 남자와 한번도 동침하지 않은 처녀 사백명을 찾아내서 가나안 땅 실로에 있는 진으로 데리고 왔다.

//잘못된 맹세는 또 다른 잘못된 맹세를 불러왔다. 베냐민 사람들을 쳐서 벌하고자 맹세했던 미스바 총회는 베냐민 사람과 결혼시키지도 않겠다고 맹세를 했었나보다. 베냐민 지파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씨를 말리려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베냐민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난 후, 베냐민 지파와의 절혼 맹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강구한 것이 미스바 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의 남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아내들도 죽이고 처녀 사백명을 찾아내서, 살아남은 베냐민 사람들이 그들을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잘못된 맹세는 댓가를 치르고 무르면 되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기 싫어 또다른 폭력을 일삼은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총회로 모여서도 자기들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맹세가 난무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사사기 20:29-48 읽기

29-36a 세쨋날, 이스라엘은 매복전략을 짰다.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 자손에게 전과 같이 밀리는 척했다. 서른 명 가량 죽었다. 베냐민 자손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에게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성읍에서 멀리 떨어진 큰 길까지 추격했다. 이스라엘 주력부대는 바알다말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기브아 주변에 매복했던 이스라엘 부대가 쏟아져 나왔다. 전투는 치열했지만 주님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셨다. 베냐민 자손은 자기들에게 재앙이 미친 것을 알지 못했다. 베냐민 군사 이만 오천백 명 모두 쳐죽였다. 베냐민은 패전했다.

36b-46 이스라엘 주력부대는 매복부대를 믿고 베냐민 앞에서 지는 척하면서 바알다말로 물러났었다. 베냐민 군대가 이스라엘 주력부태를 추격하느라 성읍에서 멀리 떨어지자 매복부대는 기브아로 돌격하여 기브아 성읍 주님을 다 쳐죽였다. 기브아 성읍에서는 연기가 구름기둥처럼 치솟았다. 뒤돌아 본 베냐민 사람들은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이스라엘 주력부대는 연기 구름기둥을 신호로 베냐민에게 반격을 시작했다. 겁에 질린 베냐민은 후퇴를 했으나, 이스라엘 주력부대와  성읍을 치고 나온 매복부대 사이에 끼여 협살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을 포위하고 기브아 맞은쪽까지 추격해 베냐민 사람 만 팔천 명의 용사를 죽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쪽 림몬 바위로 도망친 패잔병들을 추격해 큰 길에서 오천 명의 군사를, 기돔까지 쫓아가서 이천 명의 군사를 죽였다. 베냐민은 이만 오천명의 용사를 잃었다.

47-48 육백명은 광야 쪽 림몬 바위에 넉달간 숨어서 살아야 했다.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베냐민 자손들에게 돌아와서 사람이나 가축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모두 칼로 쳐서 죽이고 성읍들을 불살랐다.

//사관은 두번에 걸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응징한 사건을 기록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쳐죽인 베냐민 자손 군인의 수가 이만 오천백 명과 이만 오천 명으로 백명 차이가 난다. 15절에서 베냐민 군인은 총 이만 육천 칠백 명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림몬 바위로 숨어버린 600명을 전멸당한 베냐민 군인과 합하면 이만 오천 육백, 혹은 이만 오천 칠백 명이어야 하니, 약 천명 정도 차이가 난다. 사실 숫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싸움을 택한 베냐민의 군대는 육백 명을 제외하고 다 진멸당했다. 수치스러운 일을 한 기브아 불량배들을 감싼 댓가는 이처럼 참혹했다. 악을 감싸는 것만큼 교만한 일은 없을 것이다. 악을 감싸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육백명을 숨겨주심으로 베냐민 지파의 명맥을 이어가신다. 이들 육백명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아 베냐민 지파를 계승한다. 이런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나왔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숫자의 크고 작음은 하나님의 일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 자손들에게 돌아와 (아마도 기브아 성읍으로 돌아와) 사람이나 가축 할 것이 없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성읍을 불살랐다. 이것도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 의문이다. 지나친 폭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외침들이 결국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이유역시 심판의 도구 이상으로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심판은 선이지만 폭력은 악이다.)

사사기 20:8-28 읽기

8-11 레위 남자의 고발을 들은 온 회중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되고 제비를 뽑아 기브아를 쳐야한다고 외쳤다. 모든 지파는 십분의 일을 군인들이 먹을 양식으로 부담하고, 군인들은 기브아로 가서, 기브아 사람이 이스라엘 안에서 저지른 수치스러운 일을 벌하자고 결정했다.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같이 기브아 성읍을 치려고 모였다.

12-17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에게 사람을 보내어 베냐민 지파 가운데서 일어난 악한 일로 기브아에 있는 불량배를 치려고 하니 그들을 넘겨달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기브아 불량배들을 죽여 이스라엘에서 이런 악한 일을 없애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냐민 자손은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려고 기브아로 모여들었다. 베냐민 자손은 기브아 주민 가운데서 뽑은 칠백명 외에 이만 육천 명의 군사를 모았다. 기브아에서 뽑은 칠백 명은 모두 왼손잡이들로 무릿매로 돌을 던져 백발백중 시키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총회에 모인 사십만 명의 용사가 있었다.

18 웬일로 이스라엘 자손이 베델로 올라가 하나님께 어느 지파가 먼저 올라가 베냐민과 싸워야 하는지 물었다. 주님은 유다지파가 먼저 올라가라고 답하셨다.

19-23 첫번째 이스라엘 자손과 베냐민 자손의 싸움에 베냐민 자손이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쓰러뜨렸다. 패한 이스라엘 자손은 베델로 올라가 주님께 울면서 다시 베냐민과 싸워야 하는지 물었다. 주님은 다시 싸우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용기를 내어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24-28 이튿날 다시 이스라엘과 베냐민 자손이 맞붙었다. 이번에도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이스라엘 군인 만 팔천 명을 쓰러뜨렸다.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베델로 올라가서 주님 앞에 울며 금식하고 주님께 화목제와 번제를 드리고 주님께 또다시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워도 되냐고 물었다. 주님께서는 ‘올라가라. 내일은 틀림없이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때 하나님의 언약궤가 베델에 있었고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있었다.)

//총회로 모였는데 하나님의 생각과 대책을 듣기도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기브아를 쳐야 한다고 결정했다. 하나님께 벌을 맡기지 않고, 자신들이 힘을 모아 기브아를 치기로 했다. 용서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악을 악으로 갚고자 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에게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불량배들을 넘겨주는 대신 이스라엘 전체와 싸우기로 했다. 총회에 참석하지 못한 배냐민 자손은 소명할 기회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의 결정에 그냥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발백중의 무릿매를 다를 줄 아는 기브아 출신의 칠백용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지파들의 십분의 일도 안되는 군사를 모았지만 맞서 싸울 자신이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처음부터 ‘싸울까요? 말까요?’ 하고 물어봐야 하는데, 스스로 싸우기로 하고서야 주님께 어느 지파가 먼저 베냐민과 싸울지 물었다. 주님이 유다지파를 지목하셨고, 첫째 날과 둘째 날, 분명 주님이 올라가라고 하셨는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두 번 모두 베냐민 지파에 패했다. 내전이라고 하여도 싸움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에게 패했다면 그것도 주님의 뜻이다. 물론 그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것은 쉽지 않다. 베냐민을 또 다시 치러 올라가는 것을 묻기 전에, 패전의 이유를 물어야 했다. 아이성 전투를 기억해야 했다. 그래도 삼세번이라고 세번째 주님 앞에서는 ‘싸울까요? 말까요?’로 질문이 바뀐다. //사관은 드디어 베델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제사장 비느하스를 언급한다. 이스라엘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께 바르게 제사 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