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에브라임 지파, 숩의 자손 엘가나는 에브라임 산간지방에 있는 라마다임에 살고 있었다. 엘가나의 아버지는 여로함, 할아버지는 엘리후, 증조부는 도후, 고조부는 숩이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 두 아내가 있었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엘가나는 매년 라마다임에서 실로로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다. 당시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주님의 제사장으로 있었다.
4-8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고 브닌나와 그가 낳은 모든 자녀들에게 제물을 한 몫씩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었다. 비록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나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했다.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다. 이런 일이 매년 거듭되었다. 한나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의 일로 마음이 괴로워서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남편 엘가나는 이런 한나를 다음과 같이 위로했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소?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9-11 한번은 엘가나 일행이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 뒤, 한나는 괴로운 마음에 주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했다. 그때에 제사장 엘리는 주님의 성전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나는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불쌍히 보시고, 저를 기억하셔서, 주님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해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서원했다.
12-18 한나가 주님 앞에서 서원 기도를 드리는 동안, 엘리는 한나의 입술을 지켜보았다. 한나가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어서,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 생각했다. 엘리는 한나에게 술취하지 말고 포도주를 끊으라며 꾸짖었다. 한나는 제사장에게 자신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도 아니며,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자기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말라고 말했다. 너무나 원통하고 괴로워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엘리는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한나가 “제사장님, 이 종을 좋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하고 그길로 돌아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
//엘가나와 엘리. 엘가나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의 이름이고 엘리라는 이름은 ‘높다’라는 뜻이다. 엘가나의 족보는 4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엘리의 조상은 언급하지 않고 두 아들들의 이름과 이들이 제사장이었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높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주인공이다. //한나와 브닌나. 한나는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이고, 브닌나는 ‘진주’ 라는 보석에서 나온 이름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 비싼 진주로 사는 것보다 낫다. 한나이야기에도 신데렐라의 향기가 느껴진다. //저자는 브닌나를 한나의 ‘적수’라고 표현한다. ‘적수’는 근심거리라는 표현이지만, 구약에서 환난이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다. 결국 브닌나로부터 한나는 환난을 당한다. 남편 엘가나의 특별한 사랑도 한나를 브닌나의 괴롭힘과 업신여김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결국 한나는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원통하고 괴로워서 기도했다고 한다. 엘가나가 갑절로 한나를 사랑했어도 하나님께서 닫으신 한나의 태를 열어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결국 한나의 괴로움은 브닌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부르시려고 브닌나를 사용한 것이다. //사사시대의 막바지, 술에 취하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알아도, 성령에 취하는 것이 어떤 것인 줄은 모르는 제사장 엘리의 축복을 받아낸 한나는 더 이상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 제사장 엘리의 축복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원통함과 괴로움을 주님 앞에 토로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통함과 괴로움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한나의 기도는 적수 브닌나에 대한 벌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품에 아들을 안고 싶은 욕망도 아니었다.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방편으로 아들을 요구했다. 아들을 자기의 즐거움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주시는 주님을 즐거움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이미 주님께 드렸으니 더 이상 슬플 이유가 사라졌을 것이다. 나의 즐거움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