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주님의 궤가 블레셋 지역에 일곱달이나 머물러 있었다. 블레세서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을 불러 놓고 궤를 돌려보낼 방법을 강구했다.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은 궤를 그냥 돌려보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궤의 주인인 신에게 속건제물을 바쳐야 병도 낫고 재앙도 거두신다고 말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신(하나님)께 무슨 속건제물을 바쳐야 하는지 물었다. 그들은 블레셋 통치자들과 백성이 같은 재앙을 당했기 때문에, 블레셋 통치자들의 수대로 악성종양 형상으로 금상 다섯개를 만들고, 또 쥐모양의 금상 다섯개를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악성종양 모양과 땅을 해치는 쥐모양의 금상을 만들어 바치고 이스라엘의 신(하나님)께 예를 차리라고 말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신이 혹시 블레셋 사람과, 블레셋 신과, 블레셋 땅에 내리치시던 손을 거두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집트 백성과 이집트 왕 바로처럼 고집을 부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고집을 피우다가 재앙은 재앙대로 다 받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가게 한, 이집트를 따르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들은 수레를 새로 만들고, 아직 멍에를 메어 본 일이 없는 어미 소 두마리를 끌어다 그 수레에 메우고, 송아지들은 어미 소에서 떼어서 집으로 돌려 보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주님의 궤를 그 수레에 싣고, 속건제물을 궤 곁에 두고, 어미 소 두마리가 가고 싶은 대로 수레를 끌고 가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 소가 수레를 끌고 궤가 본래 있던 벳세메스로 올라가면 블레셋에 내린 모든 재앙을 내리신 분이 이스라엘의 신이 맞고, 소가 다른 곳으로 가면 이스라엘의 신이 블레셋을 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재앙을 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0-12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암소들은 수레를 끌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벳세메스쪽으로 가는 길로 곧장 갔다. 블레셋 통치자들이 벳세메스의 경계까지 따라갓다.
13-16 벳세메스 사람들은 밀을 추수하고 있다가 궤를 보고 기뻐했다. 수레는 벳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와서 멈췄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큰 바위를 제단 삼고, 나무 수레를 장작으로 삼고, 암소 두마리를 번제물로 삼아 주님께 바쳤다. 레위 사람들이 수레에서 주님의 궤와 금으로 만든 물건들을 큰 바위 제단에 올려 놓았다. 뒤 따라 왔던 블레셋 다섯 통치자들도 이것을 다 보고 나서 그날로 에그론으로 돌아갔다.
17-18 블레셋 사람이 주님께 속건제물로 바친 금덩이 다섯은 각각 아스돗, 가사, 아스글론, 가드, 에글론을 위한 것이었다. 쥐모양 금상도 이들이 다스리던 다섯 성읍을 위한 것이었다. 벳세메스 큰 바위 제단은 아직도 거기에 그대로 있다.
19-7:1 벳세메스 사람들이 주님의 궤 속을 들여다 보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벳세메스 백성가운데서 (오만) 칠십명을 쳐서 죽이셨다. 백성은 슬피 울었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이렇게 거룩하신 주하나님을 누가 감히 모실 수 있겠느냐며, 주님의 궤를 기럇여아림 주민들에게 전령을 보내 블레셋 사람들이 돌려보내온 궤를 가져 가라고 말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주님의 궤를 옮겨, 언덕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았다. 그리고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해 세워서 주님의 궤를 지키게 했다.
7:2 이렇게 주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 약 이십년 동안 있었다.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의 온 족속은 주님을 사모(슬퍼하며 찾다) 했다.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낼 방법을 강구하느라 일곱달이나 지났다. 결국 블레셋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의 도움을 구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행하신 이스라엘의 신(하나님)의 명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제사법도 연구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믿음이 없어도, 종교적 열심만으로)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내는 데 성공한다. 궤를 운반한 수레는 제사에 쓸 땔감으로 사용되었고 수레를 끌고간 암소 두마리는 번제물로, 궤와 함께 온 금덩이들은 속건제물로 드려졌다. //하나님의 궤를 돌려받고 제사를 드렸다고 ‘샬롬’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주님의 궤 속을 (함부로) 들여다 보았기 때문에 벳세메스 백성 칠십 명을 죽이셨다. (작은 마을에서) 오만 칠십명은 과하다. 그래서 (오만) 칠십 명이라고 기록한다. 이스라엘 성읍 벳세메스에서도 하나님의 궤에 대한 기쁨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결국 하나님의 궤도, 궤가 있는 땅도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의 궤에 대한 마음이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기럇여아림 마을로 보내기로 했다. 기럇여아림에서는 사람들이 와서 궤를 가져갔다. 원치 않는 궤를 넘겨 받은 것이 아니라 와서 친히 옮겨갔다. 모셔갔다. 그리고 벳세메스에서의 불상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해 세워 궤를 지키게 했다. //그러나 20년동안 주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개역개정, 새번역은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온 족속은 주님을 사모했다고 번역하는데, 현대인의 성경과 NIV는 ‘사모’했다를 ‘슬퍼하며 주님을 찾았다’ 라고 번역한다. 결국 짝사랑이었다. 곧 궤를 모셔왔어도, 주의 백성이 주님을 찾았어도 하나님께서 이십년 동안 여전히 침묵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약궤를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이방의 목석의 신들을 섬기듯 대해서는 안 된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