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11-21 읽기

11 엘가나(와 한나)는 라마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으나, 사무엘을 제사장 엘리 곁에 있으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

12-17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행실이 나빴다. 그들은 주님을 무시했다. 제사장이 백성에게 지켜야 하는 규정을 무시했다. 제물로 드리는 고기를 규정과 상관없이 제사장의 몫으로 가져갔다. 실로에 와서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이런 일을 당했다. 그들은 종을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보내, 제물이 아직 준비되기도 전에, 삶은 고기 대신 자신들이 구워먹을 살코기를 가져오라고 말하곤 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규정대로 먼저 기름을 태우고 드린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엘리의 아들들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렇듯 큰 죄를 저질렀다.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함부로 대했다.

18-21 어린 사무엘은 모시 에봇을 입고 주님을 섬겼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엘가나와 함께 매년제사를 드리러 성소로 올라갈 때마다, 사무엘에게 작은 겉옷을 만들어서 가져다 주었다. 제사장 엘리는 엘가나와 한나에게 “주님께 간구하여 얻은 아들을 다시 주님께 바쳤으니, 주님께서 두 분 사이에, 이 아이 대신 다른 자녀를 많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축복했다. 주님께서 한나를 돌보아 주셔서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낳았다. 어린 사무엘도 주님 앞에서 잘 자랐다.

//주님을 섬기는 사무엘과 주님을 무시하는 행실이 나쁜 홉니와 비느하스가 대비 된다. 저자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규정을 무시한 것을 주님을 무시한 예로 든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 규정을 무시하면서까지 제사장 직분을 이용해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인양 맘대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주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사무엘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고 짧게 언급한다. 이런 어린 사무엘의 뒤에는 부모가 있었다. 한나가 사무엘에게 만들어 입힌 작은 겉옷은 아마도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명한대로 제사장들에게 지어 입힐 (청색) 겉옷과 같게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크기만 사무엘의 몸에 맞게  XXXS 크기로 지었을 것이다. 어린 사무엘은 모시 에봇을 입고 주하나님 앞에서 섬겼다. 어렸을 때부터 제사장 규정을 제대로 지키며 자란 사무엘 뒤에는 부모의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제사장 엘리는 이런 엘가나 부부를 축복한다. 주님께서는 엘리의 축복을 들어주셔서 엘가나와 한나 사이에 아들 셋과 딸 둘이 더 태어나도록 돌보아 주셨다. ///엘리는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큰 죄를 저질러도 제대로 야단치지 못했다. 잠언29:17 “너의 자식을 훈계하여라. 그러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고, 너의 마음에 기쁨을 안겨 줄 것이다.”

사무엘상 2:1-10 읽기

1,2 한나가 경배(노래)한다. 기도한다.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께서 나를 구하셨기 때문에 내 기쁨이 큽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3 교만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신 주님. 주님은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보시듯 모든 것을 아십니다. 

4-8 용사의 활이라도 꺾으시며, 약한 사람을 강하게 하십니다. 넉넉하게 살던 자들을 먹고 살려고 품을 팔게하시고, 굶주린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게 하십니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게 하십니다. 사람의 생사는 주님께 달렸습니다. 지옥에 보내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빈부귀천도 주님께 달렸습니다. 

9-10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이세상의 기초를 놓으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십니다. 악인들은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십니다. 사람이 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히 깨어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악인들을 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땅끝까지 심판하시고, 주님께서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주신 주님께 노래한다. 한나는 자신을 회복시키신 주님께서 약한자들, 굶주린 자들, 자식을 못 낳던 자들, …, 가난한 자들을 회복시키실 것을 노래한다.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노래한다.) 이렇듯 한나는 빈부귀천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노래한다. //마지막으로 한나는 사람의 생사를 두가지 길로 나눈다. 심판자 하나님은 성도를 왕으로 세우시고 악인은 멸망시킨다고 노래한다. ///교만하지 말고 오만한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저울질 하신다. “메네 메네 데켈 우바르신”(단5:25)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다. 성도가 이 부족함을 채우는 길은 예수 안에 거하는 수 밖에 달리 없다. 나의 마음에 기쁨을 채우는 유일한 길이다. 

사무엘상 1:19-28 읽기

19-20 엘가나 일행은 주님께 경배를 드리고 나서,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엘가나가 아내 한나와 동침했다. 주님께서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한나가 임신을 하고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주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라며, 아들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다.

21-23 엘가나가 자기의 온 가족을 데리고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가 되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젖을 뗀 다음에 사무엘을 주님의 집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사무엘로 주님을 뵙게하고, 사무엘이 평생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려고 한다고 엘가나에게 말했다. 한나는 사무엘을 평생 나실 사람으로 바치겠다고 덧붙였다. 엘가나는 한나의 생각에 좋은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한나에게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그래서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집에 머무르면서 아이를 길렀다.

24-28 마침내 사무엘이 젖을 뗐다. 한나는 아이를 데리고, 제물을 가지고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갔다. 수소를 잡고나서 사무엘을 엘리에게로 데리고 갔다. 한나는 제사장 엘리에게 자기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간구한 것을 이루어주셨다고 엘리에게 말했다. 그리고 사무엘을 주님께, 사무엘의 한 평생을 주님께 바친다고 엘리에게 말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주님의 집에서 주님께 경배했다.

//다윗의 조부 오벳의 이름은 유다 베들레헴 부녀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사무엘의 이름은 어머니 한나가 지어준 이름이다. 한나가 엘가나에게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로 짓자고 의논했다는 기록도 없다.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자들의 파워가 남다르다. 한나는 아들을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라고 불렀다.사무엘이라는 이름이 당연했다. 주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기억해 주셨다는 증거니깐. //한나가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서원을 미룬다. 그러나 서원을 미뤘다기 보다는 당겼다는 것이 맞는 얘기리라. 아이가 될 때까지도 기다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사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 아이가 되도록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여자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 그 즉시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사무엘을 데리고 갔다. //주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기억해 주셨다. 사무엘을 데리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간 한나는 제사장 엘리에게 자신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엘리가 기억했을리 만무다. 그래서 한나는 엘리의 기억을 불러냈다. 엘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과 기도응답으로 자기를 축복했었다는 것을. 그 때 부터 슬픔이 한나에게서 떠났고, 한나의 기도대로 아이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는 한나에 대한 엘리의 축복도 기억해 주신 것이다. //제사장 엘리는 17절에서 주님께서 한나의 말대로 이루어 주시기를 바란다고 한나를 축복했다. 반면 23절에서 엘가나는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곧 한나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한다고 한나를 축복했다. 이렇게 읽으면 젖을 뗀 다음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려는 계획은, 한나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말씀에 대한 한나의 순종이라고 읽을 수 있다. 진정한 축복은 나의 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삶의 주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사무엘상 1:1-18 읽기

1-3 에브라임 지파, 숩의 자손 엘가나는 에브라임 산간지방에 있는 라마다임에 살고 있었다. 엘가나의 아버지는 여로함, 할아버지는 엘리후, 증조부는 도후, 고조부는 숩이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 두 아내가 있었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엘가나는 매년 라마다임에서 실로로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다. 당시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주님의 제사장으로 있었다.

4-8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고 브닌나와 그가 낳은 모든 자녀들에게 제물을 한 몫씩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었다. 비록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나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했다.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다. 이런 일이 매년 거듭되었다. 한나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의 일로 마음이 괴로워서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남편 엘가나는 이런 한나를 다음과 같이 위로했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소?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9-11 한번은 엘가나 일행이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 뒤, 한나는 괴로운 마음에 주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했다. 그때에 제사장 엘리는 주님의 성전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나는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불쌍히 보시고, 저를 기억하셔서, 주님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해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서원했다.

12-18 한나가 주님 앞에서 서원 기도를 드리는 동안, 엘리는 한나의 입술을 지켜보았다. 한나가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어서,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 생각했다. 엘리는 한나에게 술취하지 말고 포도주를 끊으라며 꾸짖었다. 한나는 제사장에게 자신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도 아니며,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자기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말라고 말했다. 너무나 원통하고 괴로워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엘리는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한나가 “제사장님, 이 종을 좋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하고 그길로 돌아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

//엘가나와 엘리. 엘가나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의 이름이고 엘리라는 이름은 ‘높다’라는 뜻이다. 엘가나의 족보는 4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엘리의 조상은 언급하지 않고 두 아들들의 이름과 이들이 제사장이었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높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주인공이다. //한나와 브닌나. 한나는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이고, 브닌나는 ‘진주’ 라는 보석에서 나온 이름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 비싼 진주로 사는 것보다 낫다. 한나이야기에도 신데렐라의 향기가 느껴진다. //저자는 브닌나를 한나의 ‘적수’라고 표현한다. ‘적수’는 근심거리라는 표현이지만, 구약에서 환난이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다. 결국 브닌나로부터 한나는 환난을 당한다. 남편 엘가나의 특별한 사랑도 한나를 브닌나의 괴롭힘과 업신여김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결국 한나는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원통하고 괴로워서 기도했다고 한다. 엘가나가 갑절로 한나를 사랑했어도 하나님께서 닫으신 한나의 태를 열어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결국 한나의 괴로움은 브닌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부르시려고 브닌나를 사용한 것이다. //사사시대의 막바지, 술에 취하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알아도, 성령에 취하는 것이 어떤 것인 줄은 모르는 제사장 엘리의 축복을 받아낸 한나는 더 이상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 제사장 엘리의 축복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원통함과 괴로움을 주님 앞에 토로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통함과 괴로움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한나의 기도는 적수 브닌나에 대한 벌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품에 아들을 안고 싶은 욕망도 아니었다.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방편으로 아들을 요구했다. 아들을 자기의 즐거움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주시는 주님을 즐거움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이미 주님께 드렸으니 더 이상 슬플 이유가 사라졌을 것이다. 나의 즐거움은 무엇인가?    

룻기 4:7-22 읽기

7 옛날 이스라엘에는 한쪽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을 벗어서 주는 것으로 공증을 대신했다. 8 아무개가 보아스에게 “당신이 사시오” 하면서 자기의 신을 벗어주었다. 9 보아스는 원로들과 온 마을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 나는 엘리멜렉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과, 기룐과 말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사겠습니다. 10 나는 말론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들여서, 그 유산이 고인의 이름으로 남아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고인의 이름이 그의 고향에서 끊어지지 않고 친족들 사이에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고 말했다. 11 성문 위 회관에 모인 온 마을 사람들과 원로들이 “우리가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인을 이스라엘을 일으킨 두 여인 곧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에브랏 가문에서 그대가 번성하고 또한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떨치기를 빕니다. 12 주님께서 그 젊은 부인을 통하여 그대에게 자손을 주셔서, 그대의 집안이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베레스의 집안처럼 되게 하시기를 빕니다” 하고 화답했다.

13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아 동침하였다. 주님께서 룻을 보살피시니 룻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14 이웃들이 나오미에게 “주님께 찬양 드립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5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고 어머니 노릇을 하였다. 17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다. 이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다.

18 베레스의 족보: 베레스 – 헤스론 – 람 -암미나답 – 나손 – 살몬 – 보아스 – 오벳 – 이새 – 다윗

//셈이 빠른 아무개는 휴짓장과 같은 주식을 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보아스는 휴짓장과 다름 없는 주식을 산다. 종잇장 주식에 얹어 빚까지 뒤집어 쓴다. 미래를 보고 투자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냥 이 순간에 옳은 것에 투자한 것이다. 그런데 그 즉시 축복으로 되돌아 왔다. 증인들은 주님께서 룻과 보아스에게 복 주시기를 빌었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진다. //두 유력자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섬기는 자 오벳이 태어난다. 세상에서는 유력을 대물려주길 원하나, 하나님나라는 유력자들의 섬김을 대물리게 하신다. 유다 베들레헴 공동체가, 특별히 이웃 여인들이 오벳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들은 보아스와 룻에게서 공통적으로 본 것이 있었는데, 바로 섬김이었던 것이다. ///무엇에 투자할 것인가? 자기 자녀를 유력자로 만들기 위해서만 투자할 것인가? 예수께서는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투자하라고 가르치셨다.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섬기러 오셨다. 죽기까지 섬기러 오셨다. 성도는 이 섬김의 DNA를 이식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