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23-31 읽기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믿음으로 석 달 동안 갓난아기 모세를 숨겼다. 그들은 아기가 잘 생긴 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기 때문에 바로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 믿음으로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했다.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 받는 길을 택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다. 모세는 장차 받을 상을 소망했다.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다.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 바라보면서 견뎠다.

모세는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뿌리는 의식을 행했다. 그래서 장자를 죽이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구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마른 땅 지나가듯 건넜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은 홍해에 빠져 죽었다.믿음으로 이레 동안 여리고 성을 돌았더니 성벽이 무너졌다. 믿음으로 창녀(주모) 라합은 정탐꾼들을 호의로 영접해서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망하지 않았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세상 명령, 시대의 조류를 거스리는 일이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6/21/

////Obey and hope!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마지막 문장이 ‘wait and hope.’ 이다. 기다림이 (소망에 대한) 소극적 믿음이라면 순종은 적극적 믿음이다. 

히브리서 11:13-22 읽기

13-16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사라, 이삭, 야곱), 이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다. 그래서 자신들이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라고 고백했다. 

이땅에서 길손과 나그네 신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야할 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만약 떠나온 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했다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다. 바로 하늘의 고향이다. 하나님의 나라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동경하고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다.

17-22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도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다. 이삭은 약속으로 받은 외아들이었지만 기꺼이 바치려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네 자손이라고 불릴 자손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이다. 이삭도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다. 야곱도 죽을 때에 믿음으로 요셉의 아들들을 하나하나 축복하고나서 마지막으로 서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 요셉은 죽을 때에 믿음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나갈 일을 언급하고 자기 뼈를 어떻게 할지를 지시했다.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자기 생각 대신) 약속의 조상이 되어야 할 이삭을 바치려 했다. 이삭은 육신의 장자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했으나 자신을 속인 야곱에게 한 축복을 취소하지 않고 인정했다. 야곱도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 육신의 장자 에브라임이 아닌 므낫세에게 축복했다. 요셉은 이집트의 위대한 총리로 미이라가 되기 보다 히브리식으로 장사되기를 원했다. 모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내 생각,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행하는 이유는 하늘의 고향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마련해 두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동경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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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12 읽기

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존경받을만 하다.

3 성도는 믿음으로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이는 것은 (피조 세계는) 유에서 (있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4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더 나은 제물을 드린 아벨을 의인이라고 증언해 주셨다. 아벨은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증언(인정)하시는 더 나은 제물을 믿음으로 드리자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5 에녹은 믿음으로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갔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옮기셨다. 이 믿음이 엑녹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는 증거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7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하여 경고하셨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방주를 지어 가족을 구원했다. 이 믿음을 통하여 노아는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을 따라서 얻는 의를 물려받는 상속자가 되었다.

8-12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자 순종하여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지만 순종해서 떠난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약속하신 땅에서도 나그네처럼 거류했다. 아브라함은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소망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믿음으로 자신이 나이 많아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임신할 능력을 얻었다. 사라가 약속의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늙고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되었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6/19/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것들의 확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바라시는 것들을 확실하게 알고 믿는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드러났다. 그리고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더 나은 제물을 드리는 삶,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 방주를 짓는 삶, 약속을 믿는 삶. 하나님께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에게 각각 바라셨던 것을 믿음의 조상들은 믿음으로 순종했다. 순종의 열매는 죽음이요 죽지 않음이요 구원이요 자손을 얻는 것이다. 인생이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다 담고 있다. 믿음은 인생 길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길을 가는 것이다. 영원한 임마누엘을 소망하는 것이 믿음이다.   

히브리서 10:26-39 읽기

26-31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된 성도라도, 곧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된 성도라도, 짐짓 (자원해서, 고의로) 죄를 짓고 있으면 더이상 속죄의 제사가 남아 있지 않다. (더이상 속죄받을 수 없다.) 남아 있는 것은 무서운 심판과 반역자들을 삼킬 맹렬한 불뿐이다. 모세의 율법을 어긴 사람도 두세 증인의 증언으로 가차없이 사형을 받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욕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은 얼마나 더 무서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주님은 친히 원수 갚으시는 분이시다. 주의 백성이라도 심판하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32-39 저자는 독자들에게 빛을 받은 직후, 곧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처음 시절에 고난의 싸움을 많이 견디어 낸 것을 되새기라고 권면한다. 성도는 때로 모욕과 환난을 당하고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이런 처지의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도 했었다. 그래도 옥에 갇힌 자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소유를 빼앗겨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 확신을 버리지 말라고, 이 확신에는 큰 상이 따라온다고 강조한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서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이제 아주 조금만 있으면 주님이 다시 오신다.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은 성도가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성도가 믿음에 뒤쳐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성도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이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6/18/

//믿음으로 살아라.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믿음이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마라나타! 이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큰 상이다. 하나님나라의 구성원이 된다. ////오래 참음으로 이 소망을 이루어 가야한다.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변함이 없다. 문제는 우리의 연약함이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섬기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오래 참음으로 약속에 따라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성도의 견인’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에 근거하지만 성도의 오래참음을 요구한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히브리서 10:19-25 읽기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의 형제자매들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께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뚫고 성도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셨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였다. 성도에게 이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시다. 따라서 성도는 이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자기 몸을 친히 찢으시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께 나아가지고 권면한다.) 성도는 예수의 피를 마음에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은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이 약속을 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는 신실하시다. 따라서 성도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소망을 굳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성도는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자고 격려해야 한다. 서로 모이기를 그만 두는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따르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여야 한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6/17/

//성도 한사람 한사람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만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라는 공동체로 구원을 완성된다. 

////믿음은 낮은 자의 편에 서는 구체적인 삶이어야 한다. 가난한 자들,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그곳에 삼위 하나님은 계신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영생이다. 영생을 누리려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참 성소/성전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본다고 보이지 않는다. 자기를 낮추고 서로를 돌아볼 때 보인다. 성도들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사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방법이다. 더욱 그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