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13-25

샬롬! 샬롬!
주님의 뜻이 있어서 다윗의 왕위가 솔로몬에게 계승되었다는 것을 아도니야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왜 주님의 뜻을 바꿀 계략을 꾸몄을까? 밧세바는 무슨 생각으로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려고 했을까? 밧세바는 아도니아의 마음을 사는 것이 주님의 뜻(마음)을 사는 것보다 아들 솔로몬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을까?
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솔로몬이 보좌에 앉아 첫번째 내린 명령이 제단 뿔을 잡은 아도니야를 살려주는 일이었는데, 얼나마 지났다고 솔로몬 왕은 형제 아도니야를 죽이라는 명령을 해야 했다. (세상 왕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뭐. 내가 성경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물이니. 솔로몬에게 질투하냐고. ㅎㅎ 질투할게 있어야지.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사건 후로 밧세바도 성경에서 자취를 감춘다.
사람들은 서로 샬롬을 말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샬롬에 가려진 악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악은 항상 사소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샬롬은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온다. 순종없는 샬롬은 없다.

https://quietwaters.blog/2017/05/06

열왕기상 2:1-12

열왕기상 2:1-12

모든 사람이 가는 길. 그러나 그 끝은 다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심판대 앞에서는 다르다. 그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을 한다. 심판대 앞에서 자비와 긍휼을 입을 수 있는 길을 유언으로 남긴다. 굳세고 장부다운 길(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함)을 유언으로 남긴다. 그 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주님께서 지시하는 길을 걷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길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는 안 된다.) 그래야 그 길의 끝이 형통하다. 다윗은 특별히 마음과 정성을 다해 주님께 성실(신실)하면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 오를 사람이 솔로몬에게서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유언으로 전한다.
다윗은 요압과 시므이가 백발이 성성하게 살다가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고 유언한다. 요압과 시므이는 자기 욕심을 위해 산 사람들의 전형이다. 반면 압살롬을 피해 도망할 때 다윗을 영접한 길르앗 사람 바실래의 아들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는 식구가 되게 하라고 유언한다. 바실래는 자비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누리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좋은 예다. 권선징악!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자비롭게 살아야 한다.)
다윗은 죽어 조상과 함께 다윗 성에 묻혔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사십년간 다스렸다. 헤브론에서 일곱 해를, 예루살렘에서 서른 세 해를 다스렸다. (예루살렘에서의 서른 세 해가 헤브론에서의 일곱 해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재위기간 40년이 목동시절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평생이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사는 게 복이다.

https://quietwaters.blog/2017/05/05/

열왕기상 1:38-53

열왕기상 1:38-53

사독과 나단과 브나야와 그렛사람과 블렛 사람이 다윗이 명한 대로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에 태워서 기혼으로 내려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 모든 백성이 솔로몬의 행렬을 뒤따르며 기뻐하는 소리에 세상이 떠나갈 듯 했다. 아도니야와 그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었다.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솔로몬이 왕좌에 앉았으며, 신하들이 다윗에게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축복하였다고 전했다. 다윗도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고 전했다. 아도니야의 초청을 받고 모여든 사람들이 황급히 일어나 모두 제 갈길로 갔다. 아도니야는 솔로몬이 두려워 제단 뿔을 붙잡았다.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잡았다고 사람들이 솔로몬에게 보고했다. 사람들은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이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충신이면 염려할 이유가 없으나, 악이 발견되면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솔로몬은 사람을 보내 아도니야를 제단에서 끌어오게 했다. 아도니야가 솔로몬에게 와서 절을 하자,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집으로 보냈다.

https://quietwaters.blog/2017/05/04/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권위는 우리 인생과 다르다. 누가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다윗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마도 ‘맹세의 딸’이라고 이름한 밧세바에게도 잊혀진 약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자 나단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다윗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 모든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단 혼자의 일이 아닌 각자 맡은 역할들이 있었다. 심지어 일반 백성들도 “솔로몬 왕 만세”로 화답하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 솔로몬이 왕좌에 앉았는데, 왕의 신하들이 새롭게 왕좌에 앉은 솔로몬을 축복한 것이 아니고 선왕 다윗을 축복하였다고 기록한 것이 새롭다. 축복은 새로운 왕이 선왕을 뛰어넘는 왕이 되기를 하나님께 바라는 내용이다. 마치 돌잔치에 참석한 하객들이 아이 대신 부모를 축복하듯이. 이에 다윗도 침상에서 “주님께서 오늘 내 자리에 앉을 사람을 주시고, 또 이 눈으로 그것을 보게 하시니,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고 주님께 감사의 화답을 드렸다고 한다. 모사재인 성사재천!

열왕기상 1:28-37

열왕기상 1:28-37

다윗이 밧세바를 불렀다. 다윗은 주님의 이름으로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것에 대한 약속을 오늘 이행하겠다고 말했다. 밧세바는 다윗 왕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다윗은 사독과 나단과 브나야를 불러 솔로몬을 자신이 타던 노새에 태워 기혼을 내려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솔로몬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임금의 자리에 앉히라고 명령했다. 다윗은 솔로몬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한다고 선언했다. 군대장관 브나야가 다윗이 말한 바가 주님의 뜻하신 것이기를 바란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신 것처럼, 솔로몬과도 함께 계셔서 솔로몬의 자리가 다윗의 자리보다 더 높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나단의 대면보고를 받은 다윗 왕은 (깊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났다. 사무엘이 자신에게 기름을 부었던 그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그렇다 왕위는 대관식(사람의 추대)보다 기름부음(하나님의 선택)이 먼저다.
// 다윗, 사독, 나단 이 세사람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에 비하면 브나야는 평신도 전문인이다.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절차를 명하자 사독이나 나단이 아닌 브나야가 화답했다는 것은 나에게는 무척 인상적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성경은 그를 [‘여호야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알고 계심’)의 아들 ‘브나야’ (‘여호와께서 세우셨다’)]라고 반복해서 그 이름을 기록한다. //하나님께서는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직책이나 직함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서 쓰임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하루!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나부터)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되기를 바라는 주일 아침이다.

열왕기상 1:11-27

열왕기상 1:11-27

다윗은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자라는 주님의 평가가 떠오른다. 그는 하나님과 대화하던 사이였다. 직접적인 대화를 끊어진 후에도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우둔해지는 다윗의 영성을 지켜주셨다. 그런데 다윗이 칩거에 들어갔다. 다윗은 아비삭의 시중을 받으면서 나단의 대면보고마저 받지 않고 죽을 때를 기다리는 듯 했다. 아도니야가 실세였다.
나단은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아도니야의 국정농단?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그는 다윗의 왕위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윗이 밧세바에게 솔로몬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히겠다고 맹세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그저 다윗이 원하는 바였다면 나단은 그때 바로 잡았을 것이다.) 나단은 다윗의 약속이 하나님 앞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도니야의 국정농단에 대한 대면보고를 시도한다.
어쩌면 아비삭은 나단의 대면보고를 막기 위해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신하들이 심어 놓은 문고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왕의 침실에 접근할 수 있는 밧세바를 내세웠다. 그리고 드디어 다윗 왕의 침실을 열었다. 밧세바와 나단은 이구동성으로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된 것이 다윗의 뜻이 아니라면 반역이요, 자신들은 숙청의 대상이라고 보고한다. 아도니야의 초청을 받지 못한 자신들이야 말로 다윗의 종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아도니야의 국정농단이 다윗의 뜻인지 아닌지 알려달라고 결단을 촉구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면 천하의 다윗이라도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사건이다. 중요한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가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 안에서 공동체적 교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선배든 후배든 영적인 멘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주변에 나의 영적인 문제를 언급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나에게 영적인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영성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