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14-26
14-21 제자들이 빵을 챙기지 않고 배에 탔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이 빵을 챙기지 않는 것을 책망하는 줄 알고 수군거렸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이 무뎌졌다고 책망하셨다. 예수께서는 먹을 것으로 염려하는 제자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그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시고, 사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남기신 사건을 상기시켜 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깨달으라고 하신다.
22-26 예수님 일행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을 예수께 데려와 만져주시기를 원하자, 예수께서는 그 눈먼 사람을 손을 이끌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 고쳐주셨다. 눈먼 사람은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았다. 예수께서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 사람은 시력을 완전히 회복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고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졌다. 마음밭이 돌짝밭이 된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면 마음밭이 돌짝인 셈이다. 오천명과 사천명을 먹이신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거다. 바리새파 사람들만 이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도 여전히 예수를 죽이려고만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불신이다. 제자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신의 눈이 멀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눈은 멀었다. 완전히 멀지 않았다 해도 맹인이나 다름 없었다.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함께 있서도 예수님의 끊임없는 설명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한편으로 벳새다에서 고침을 받은 맹인은 육신의 눈을 고침을 받았지만, 마음의 눈도 떴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지만 예수께서 두번째 안수하시자 마침내 확실하게 알았다. 육신의 눈을 뜬다고 반드시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마음의 눈을 뜬 그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고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셨다. 왜? 벳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께 맹인을 데리고 나온 이유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저 순회 치유자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는 마을에서는 맹인이 눈을 뜬 것은 그냥 또 한번의 치유의 사건이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징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맹인을 아예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고쳐주셨다. >>복음은 변화된 ‘나’의 소식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킨 ‘예수’의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