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7:2-16

고린도후서 7:2-16 (공동번역) 읽기

2 다시한번 마음을 열어 바울 일행을 받아달라고 요청한다. 바울 일행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일이 없고, 아무도 망쳐놓은 일이 없으며, 아무도 착취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3. 그렇다고 고린도 성도들의 잘못이라고 책망하려고 편지를 쓰는 것도 아니다. 바울 일행과 고리도 성도들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사이가 아니야고 반문한다. 4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전적으로 믿고 자랑까지 한다. 온갖 관을 겪으면서도 큰 위안을 받고 기쁨에 넘쳐있다고 말한다. //성도의 공동체 교회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사이다. 운명공동체다. 운명공동체에 필요한것은 용서와 화해다.


5 그러나 바울 일행이 처한 상황은 조금도 쉴 수 없었다. 쉬기는 커녕 가는 곳마다 환난을 당했다. 밖으로는 싸움을 겪었고 안으로는 두려움도 있었다. 6 실의에 차 있는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하느님께서 디도를 보내주셔서 바울 일행을 위로해 주셨다. 7 디도가 고린도성도의 소식을 가지고 온 것에 큰 위를 받았다. 고린도성도들이 바울을 보고싶어하고 바울을 열렬히 옹호한다는 소식에 더욱더 기뻐하고 있다고 전한다. //성령충만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움직이는 바울 일행이라도 꽃길만 걷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환난의 고통과 두려움이 있었다. 하나님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 고난받고 두려움에 처한 성도를 위로하신다.


8 (그래서) 바울은 디도편에 고린도에 보낸 이전 편지가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소식에 후회했지만 9 지금 오히려 기뻐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편지로 인해서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분이 마음 아파한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된 일이니 손해가 아니라고 말한다. 10 하느님의 뜻대로 겪는 상심은 회개할 마음을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한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이 상심을 후회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세속적인 상심은 죽음을 가져올 뿐이다. 11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은 바로 그 상심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루어 준 것이 많았다. 열심을 가지게 되었다.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다. 의분이 생겼다.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워하는 마음과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악을 징벌할 줄 알게 되었다. 이렇듯 고리도성도들은 그 사건?에 있어 조금도 잘못이 없었다는 것을 훌륭하게 증명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 세상염려와 다르다. 예수께서도 세상 염려는 하지 말라고 하셨다. 공동번역은 상심이라고 번역한다. 우리가 상심할 이유가 있다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성도가 구원에 이르는데 유익하다.

12 바울은 이 전 편지를 쓴 이유가, 그 못된 짓을 한 사람이나, 또는 그에게 손해를 입은 사람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성도들의 열성을 하느님 앞에서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전한다. 13 그 결과 바울 일행은 많은 위로를 받았고, 디도의 소식에 기뻐하게 되었다. 디도는 고린도성도의 덕택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14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 성도들을 칭찬했는데, 고린도성도들은 바울을 칭찬대로 디도를 잘 대접해서 바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자랑이 허황된 말이 아님이 드러났다. 15 디도는 고린도 성도들이 자기 말을 순종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환대했다고 회상하며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다. 16 디도의 소식으로 바울은 조금도 꺼리낌없이 고린도 성도들을 신뢰할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고 전한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가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했음을 후회했지만 디도의 소식으로 위로와 기쁨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열성으로 부지런히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악을징벌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유익을 열거한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사람에게는 이렇듯 구체적인 삶의 변화, 성숙한 신앙의 열매가 나타난다.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고린도후서6:14-7:1

고린도후서6:14-7:1 (공동번역)

14 (고린토 교우들에게 마음을 활짝 연)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짝짓지말라고 경고한다.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와 불의가 짝이 될 수 없듯이, 빛과 어둠이 사귈 수 없듯이,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의 마음이 합할 수 없듯이,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같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16 하느님의 성전에 우상이 어울리지 않는 이치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으로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살며 거니신다. 하느님과 성도 사이에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관계가 성립한다.17 따라서 성도는 부정한 것에서 빠져나와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18 하느님은 부정한 데서 나온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맞아 주시는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 7:1 이 약속을 따라 우리는 몸과 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서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생활을 하며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바울은 마음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을 뿐만 아니라 또 자신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달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마음을 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불의와 어둠과 우상과 불신이다. 이런데서 빠져 나오라고 경고한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성립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하지만, 부정한 것에 빠져 있다면 빠져 나와서 부정한 것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성도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 몸과 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며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을 마음에 두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이유다. // 불신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은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 불신자들과는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 없다는 뜻으로 적용한다. 불신자들은 거룩한 성, 곧 새예루살렘에 속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속의 가치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이것은 불신자들을 멀리하고 그들과 싸우라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성도로 하여금 더 정의롭게, 더 빛 가운데, 우상을 따르지 않고 예수를 믿으라(따르라)고 명령한다. 우리가 부정한 데서 나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듯이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다. 예수를 믿는 (따르는) 우리의 삶이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6:3-13

고린도후서 6:3-13 (공동번역) 읽기

3 바울 일행은 자신들의 전도사업이 비난받지 않도록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공공장소에서 고성방가로 전도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바울 일행의 말을 곱씹어 보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4-5 바울 일행은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 일을 한다. 그래서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았다. 심지어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도 겪어내야 했다.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 냈다. //하나님의 일에 무슨 복이 따르는가? 인내의 열매밖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자네 이 길을 가려는가?’ 자문하게 된다. 특별히 심한 노동을 하면서 살았다. 후원을 받은 것은 전문 사역자(목회자나 선교사)가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이 아니다. 6-10 바울 일행은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고 밝힌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그들은 두 손에 정의의 무기를 든다.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간다. 그들은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게 산다. 이름 없는 자 같으나 하늘에 이름을 올린자로 산다. 죽은 것 같으나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는 영생을 누린다.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전도자들이 두 손에 정의의 무기를 들었다고 말한다. 많은 단어 중에 하필이면 ‘정의’를 들었다고 했을까? 복음은 개인적이지 않다. 공동체적이다. 관계적이다. 복음이 공동체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지 못할 때 죽은 것이 된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겸손하고 굶주린 자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이 있다.
11-13 바울은 고린토 교우들에게 숨김없이 말한다. 바울은 고린토 교우들에게 마음을 연다. 더 이상 (어떤?) 고린토 교우들처럼 마음을 닫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영적) 자녀같은 고린토 교우들도 자신들과 같이 마음을 활짝 열라고 권면한다. //마음을 연다. 그것도 활짝 연다. 복음의 포용성이다. 자비다. 긍휼을 베푸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정의는 심판의 도구가 아니다. 정의는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5:11-6:2

고린도후서 5:11-6:2 (공동번역) 읽기

11 (이 땅에서 행한대로 보응받는다고 선포한) 바울 일행은 자신들은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잘 알고 있고, 사람들에게도 이것을 알리길 원한다. 하느님께서 바울 일행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계시듯, 수신자(고린도성도)들도 자신들을 사실대로 알아주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중심을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두려움이란 전적인 약자임을 인정하는 자세다. 12 바울 일행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잘 알고 계신 것을 수신자들에게 내세우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자신들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 수신자들이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에게 반박할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과 교제 유무가 중요하다. 13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미쳤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온전하다면 그것은 수신자들을 위해서 온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미쳤다는 것과 온전하다는 것은 성령 충만을 뜻한다. 14 바울 일행은 하느님을 위해 미치고 수신자인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온전한 것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5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다. //성령이 성도들에게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며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 16 바울 일행은 더 이상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에 순종해서 판단한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따르면) 새사람이 된다고 선언한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다. 18 새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을 뜻대로 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중재자로 바울 일행과 고린도 성도들을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고린도 성도들이 사람들과 화해하도록 자신들에게 임무를 주셨다고 말한다. 19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중재자로 인간과 화해하셨듯이, 이 화해의 이치를 바울 일행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다. //복음의 핵심은 화해다. 하나님과의 화해요 이웃과의 화해다. 화해는 사랑과 용서의 다른 표현이다. 20 바울 일행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절이 되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수신자들에게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화해하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호소한다고 말한다. 21 하느님은 우리와 화해하기 위해서,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부터 무죄 선언을 받게 되었다. //화해와 무죄선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유효하다.
6:1 바울 일행은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수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2 지금이 하느님의 자비의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선포한다. //그리스도를 따르지(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헛된 것이 된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오늘이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구원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절이 되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4:16-5:10

고린도후서 4:16-5:10 (공동번역)

16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어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성도는 낙심하지 않는다. 외적 인간은 낡아져도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진다. 17 이땅에서는 죽을 고비라도,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과 비교하면 잠깐의 가벼운 고난에 불과하다. ( 복음과 함께하는 고난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 곧 영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18 그래서 우리는 잠시뿐인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란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린다.
5:1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몸이 죽으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서 살게(영생하게) 된다. 하늘의 집, 곧 영생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집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집이다. 2 이 땅에서는 신음하지만 하늘에 있는 집에는 신음이 없다. 3 이 땅의 집(육신의 몸)을 잃어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영생)이 있다. 4 그렇다고 이 땅의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죽을 이유는 없다. 이 땅에서도 하늘의 집에서 사는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를 갈망해야 한다. 5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하늘의 집에서처럼 살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성령께서 그 보증이 되신다. 6 바울 일행이 마음이 든든한 이유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주님과 떨어져 살지만 7 보이는 주님이 안 계셔도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8 마음으로는 주님과 함께 평안히 살기 원한다. 9 바울 일행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10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 우리는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우리가 행한 대로 상과 벌늘 받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