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2:5-11

고린도후서 2:5-11 (공동번역)

5-8 어떤 사람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있다.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도 어느정도 아프게 한 것이다. 바울은 너무 심한 어조로 들릴까봐 어느정도 라는 수식어를 썼다고 덧붙이니 굉장히 마음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이 수신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 상당한 벌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한다.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빠져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에게 사랑을 다시 베풀어주라고 권면한다.
9-11 바울이 이전 편지를 쓴 이유는 고린도 성도들이 마음 아팠던 그 시련을 얼마나 잘 견디어 내는지, 또 바울의 교훈을 얼마나 잘 순종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적은다. 바울은 수신자들이 용서하면 자신도 그를 용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용서는 수신자들을 위해 그리스도 앞에서 하는 용서라고 말한다. 용서야 말로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적은다. 성도의 용서를 훼방하는 것이 사탄의 책략이라고 가르친다.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받은 벌이란 무엇일까? 바울이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아 ‘왕따’로 읽힌다. 그들이 진리를 떠났기 때문에 왕따했을 것이다. 교회적으로는 치리에 해당한다. 그래도 상당한 벌을 받았으니 사랑을 다시 베풀어 주라고 권면한다. 그렇지 않으면 왕따가 지나친 슬픔에 빠져들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이것은 진리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앞에서 그들을 용서하라고 당부한다. 용서를 훼방하는 사탄의 책략에 속지 않고 용서하라고 강권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자들이 용서를 할 수 있다. 용서 받은 자로 용서하며 살라고 하신다.

고린도후서 1:23-2:4

고린도후서 1:23-2:4 (공동번역)

23-24 바울은 고린토에 가지 않기로 작정한 것은 고린도 성도들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이런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잘 아신다고 덧붙인다.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이미 굳건해졌기 때문에, 자신들의 방문이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지배(간섭)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서로의 행복을 위해 동역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2:1-4 바울은 이전 방문에서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보다. 그래서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고린도 성도들이야 말로 자신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인데 방문해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셈이라고 말한다. 만남의 기쁨보다 만나서 마음이 슬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바울도 기뻐하고 고린도 성도들도 기뻐하도록 방문대신에 그 편지를 (이 편지 이전에 다른 편지를) 썼었다고 말한다. 그 편지를 바울은 괴롭고 답답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썼다. 그때도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쓴 것이 아니고, 고린도 성도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고백한다.

//대면하는 교제는 때때로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만남의 기쁨은 잠깐이고 잔소리를 하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다 괴롭다. 가족이 명절에 만날서도 그러할 때가 있다. 아무리 의도가 좋은 말이라도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있다. 진리 안에서 교제하는 성도들 사이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진리를/말씀을 적용하다보면 충고를 하게 되고, 충고는 피차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쉽다. 이럴 때는 대면하여 말을 주고 받는 것보다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감사의 말을 먼저 적을 수도 있다. 상대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더 필요한 것은 서로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가능하다. 내 뜻을 내려놓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지킬 때 기쁨이 넘칠 것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고린도후서 1:12-22

고린도후서 1:12-22 (공동번역)

12-13 바울일행은 고린도 성도들을 대하면서 인간의 꾀를 부리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솔직하고도 진실하게 살아왔다고 양심을 걸고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 편지도 사실을 사실대로 썼으니 수신자들에게 읽은 그대로 알아들으시면 된다고 쓴다. //인간의 꾀는 악인의 꾀다. 전도자는 하느님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드셨는데 사람들은 공연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라고 깨달았는데 (공동번역), 개역개정에서는 사람들은 공연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를 사람들이 꾀를 냈다로 번역한다. 인간의 꾀를 따르면 죄인의 길에 서게 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사실을 사실대로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오직 주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둔 사람만 할 수 있을 것이다.
14-15 믿음 안에서의 교제라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서로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런 확신으로 바울 일행은 고린도 성도들을 찾아가 교제의 기쁨을 나누길 원한다.
16-20 바울 일행은 고린도를 방문하고 마케도니아로 갔다가 고린도에 다시 들려 고린도교회의 도움을 가지고 유다를 방문하고자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자신의 계획이 경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적인 동기로 세운 계획이 아니라며 하느님의 진실성을 걸고 맹세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이 아니시듯 자신들도 언제나 진실하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래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바울 일행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아멘으로 응답한 결과가 계획변경이라고 말한다.
21-22 그리스도를 통해 고린도 성도들과 바울 일행을 굳세게 해주시고 기름을 부어 사명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 바울 일행은 고린도를 방문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고난과 위로 가운데 교제의 기쁨을 나누고자 했으나 일정이 바뀌었다. 일정이 바뀌자 고린도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이 이랬다저랬다 바뀔 수 있느냐며, 바울의 계획이 경솔했다면서 사도권을 의심한 모양이다. 바울(일행)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시듯, 자신들도 언제나 진실하다고 답한다. 다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아멘으로 응답한 결과가 방문계획 변경이라고 답을 한다. (물리적 방문보다) 그리스도를 통해 고린도 성도들과 바울 일행의 교제가 굳건해 지기를 바라시는 성령하나님의 인도라고 대답한다. //사실 바울일행의 방문 변경을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인간의 꾀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솔직하고도 진실하게 살게 하소서.

고린도후서 1:1-11

고린도후서 1:1-11 (공동번역)

1 예수의 사도된 바울로와 교우 디모테오가 고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와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쓴 편지. //사도와 교우가 한쌍이고 하느님의 교회와 모든 성도가 한쌍이다. 하느님의 교회와 모든 성도가 동격이라면 예수의 사도가 된 것과 사도와 교우도 하느님의 뜻으로 되었기에 동격이다. 성도간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2 발신자들은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수신자들에게 내려주시기를 빈다.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 하느님의 자녀다. 가족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인자하신 아버지요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며 4 환난을 당하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위로 받는 성도라야 온갖 환난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다. //하느님이 위로의 원천이지 우리 힘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6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으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많다. //그냥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당하는 고난이다. 6 바울 일행도 그리스도와 함께 환난을 당한다. 고린토 교회와 아카이아 성도들은 바울일행이 환난에도 위로 받는 것을 보며, 동병상련의 위로와 고진감래의 구원을 받는다. 7 바울일행은 독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위로를 받기에 마음이 든든하다.
8-11 바울 일행은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고 살 희망조차 잃게 만드는 환난을 당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처지가 되자 그들은 자신을 믿지 않고 죽은자를 다시 실리시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과연 하느님은 바울 일행을 죽을 고비에서 건져주셨고, 앞으로도 건져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 일행은 이 희망으로 기도요청을 한다. 하느님은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바울 일행에게 축복 내리시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다.


@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 아버지의 위로가 따른다. 복음과 함께 하는 고난이다.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설 때 당하는 불이익이다. 우리가 받게 될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의자녀가 되는 구원이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이 희망으로 기도 한다.

이사야 39:1-8

이사야 39:1-8 (공동번역)

히즈키야가 병에서 회복되자 바빌론의 왕 발라단의 아들 므로닥발라단이 사절단을 통해 편지와 예물을 보내왔다. (히즈키야의 회복을 주변 국가들에서도 알고 있었나보다.) 히즈키야는 사절단을환대하고 자기의 보물 창고 안에 있는 모든 귀중품을 보여주었다. 히즈키야는 왕궁과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앗불싸!

이사야가 히즈키야 왕에게 사절단이 어디에서 왔으며, 사절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다. 히즈키야는 바빌론에서 온 사람들이며, 궁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보물 창고 안에 있는 모든 귀중품들을 봤다고 대답했다.

이사야는 히즈키야에게 다음과 같이 야훼의 말씀을 전했다. [네 왕국에 있는 모든 것, 네 선조들이 오늘날까지 고이 간직하였던모든 것이 바빌론으로 옮겨져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너에게서 태어날 너의 친아들 중 더러는 바빌론 왕궁으로 끌려가서 내시가 될 것이다.] 히즈키야는 이사야가 전해준 야훼의 말씀이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대답했지만, 자기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평화와 안정이 계속 될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일어난 일을 순서적으로 기록하지 않은듯하다. 하여간 병에서 회복한 히스기야의 소문은 바빌론에까지 전해졌고, 바빌론은 사절단을 보내 동맹을 제안한듯하다. 이때 히스기야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바빌론 사절단은 일종의 스파이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상한 심령을 돌보신 야훼 하나님을 드러내야 했다. 히스기야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보화인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과시욕에 눈에 보이는 보물과 귀중품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런 것들은 열방들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열방은 이런 것들을 더 가지고자 탐하지 않던가? //앗수르의 항복요구 서신을 주님 앞에 놓고 기도했던 히스기야는 바빌론의 화친 서신을 가지고는 주님 앞에 나가지 않았다. 전쟁이든 평화든 모든 일을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그 결과 히스기야는 자랑했던 보화와 귀중품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자손들 가운데 포로로 끌려가서 내시가 될 자도 있을 것이라는 신탁을 듣게 된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신탁이 이루질 것이라고 받아들이면서 한 편으로 당대의 평화와 안정에 취하고 만다. 후손이 포로로 끌려가 내시가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하나님나라를 상속해야할 의무를  포기했다는 의미다. 하나님나라를 상속받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는 것이 병고침보다 더 상한심령으로 기도해야할 제목이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보화는 무엇인가? 예수가 보화가 아닌가? 그런데도 세상가치를 따라부와 명예와 권력과 학벌과 인간관계로 자랑질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빼앗길 보화로 끝나는 간증을 종종 듣게 된다.  하나님 대신 ’ 나‘를 삶의 주어로 사용하면 자기자랑이 된다. 하나님의 다스림만이 가장 중요한 보화요, 나머지를 다 팔아서라도 사야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고백한 세례자 요한의 소리가 마음을 울린다. 내가 흥해야 주님도 흥한다는 착각에 빠져서 살면 안 된다.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믿을) 때, 주님이 흥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