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9

요한복음 4:1-9 (공동번역)

이제 세례자 요한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더 많아졌다는 소식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 (사실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베풀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충돌을 의식해?)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기로 했다. 갈릴래아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거쳐야만 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라는 동네에 이르셨다. 옛날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으로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먼 길에 지친 예수께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왔다. (앞에서 한 번 언급했지만 요한복음의 시간은 헬라어 원어시간으로 읽는게 더 맞을 수도 있다. 그러면 저녁 6시 해질녘이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로 나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가고 없었다.

요4:1-8
//요한복음의 시간은 헬라식으로 일관되게 읽는게 맞다고 본다. 그렇다면 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 나온 시간은 해질녘 저녁 6시경이다. 예수께서 아침 일찍(6시)부터 걸어서 한나절(6시간)만에 (정오에) 먼 길에 지쳤다기 보다는, 하루 종일 (12시간) 걸어서 저녁 6시에 지쳤다고 읽는 게 더 맞다고 본다. 때마침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갔다는 것도 저녁 때라는 것을 방증한다. (점심식사가 생긴 것은 역사적으로 산업혁명 때라고 알려졌다.) 그렇다면 한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 특별한 시간에 우물가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일상을 따라 우물가에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녁 먹을 시간이라 우물가에 안 나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일상에서 주님은 우리들을 만나주신다. 주일예배나 기도시간이나 금식이나 절기나 특별한 시간에도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겠지만, 주님은 일상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따라서 우리도 일상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야 한다. 일상이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의 자리다. 우리를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함께하신다. 주님은 모든 일상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3:22-36

요한복음 3:22-36 (공동번역)

예수께서 유다지방으로 가셔서 그곳에 머무시며 세례를 베푸셨다. 한편 요한은 살림에서 가까운 에논이라는 곳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많은) 사람이 요한을 찾아와 세계를 받았다. 아직 요한이 감옥에 갖히기 전이었다. 요한의 제자들이 어떤 유다인들과 정결예식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어떤 유다인들은 요한을 찾아가 요한이 증언하던 그 분이 (예수가) 세례를 베풀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예수에게 몰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입을 열었다.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앞서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며, 너희들(자신의 제자들)이 이 일에 증인이라고 말했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며, 신랑의 친구도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며 기쁨에 넘치듯, 요한 자신도 예수께서 세례를 베푼다는 소식에 이런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요한은 예수는 더욱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어느 요한의 말인지 확실하지 않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 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요3:22-36
//36절을 개역개정에서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고 번역한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대조하지 않고 믿는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로 대조한다. 앞의 ‘믿는 자’의 믿음도 신뢰/의탁이라는 동적 믿음이다. 뒤의 ‘순종하지 아니하는’은 의지적으로 불신한다는 뜻이다. 곧 의지적으로 거스린다는 동적 불신이다. 우리는 믿음을 지적 정신적 영역으로 미뤄둬서는 안 된다. 일상으로 끌고 나와야 한다. 믿음과 순종은 동의어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자 예수와 경쟁하지 않았다. 둘이 경쟁했다면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께서 모든 것을 얻어야 하고 자신은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수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세워져 간다. 내가 흥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흥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가 썩어져야 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 3:9-21

요한복음 3:9-21 (공동번역)

니고데모는 어떻게 성령으로 새로 날 수 있는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고 반문하신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세상 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고 반문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고 하셨다. 구리뱀을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래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증거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요3:9-21
//축구나 야구를 좋아하는 나는 가끔 외국경기를 볼 때 관중석에서 John316 을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 (우리동네에는 John316 이라는 헤어숍도 있다.) 나름 복음의 메세지를 전하려는 신도의 열정을 표현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고려한다면 요3:16은 성령으로 새로 나야만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은 경기장 관중석에서 요316 팻말을 들고 있는다고 전할 수 있는 단순한 메세지가 아니다. 물론 나처럼 저게 무슨뜻이지 하고 찾아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야 이해할 수 있는 구절임에 틀림없다. //요3:16절이 복음인 이유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모두 죄인으로 판결 받기 때문이다. 요한은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최종심판은 마지막날에 이루어지겠지만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다면 이미 죄인으로 판결받은 것이다. 요한은 여기서도 믿음을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라고 규정한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에 예수께서 믿음으로 대해주셔야 나의 믿음이 맹신이 아닌 의미있는 믿음이 된다. 내가 진리를 따라 살아갈 때 주님은 나에게 믿음으로 대해주시리라. 서로에게 신실함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죽어 마땅한 (아니 죽어있는) 우리들을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다. 하나님의 믿음에 우리도 믿음으로 반응하자.

요한복음 3:1-8

요한복음 3:1-8 (공동번역)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어느날 밤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다. 니도데모는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생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예수께서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3:1-8
//니고데모. 바리새파.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는 부자다. 물질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었다. (아마도 물질적으로도 부자였을 것이다.) 그러니 니고데모도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찾아왔다. 믿음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님으로 인정했다. 니고데모 역시 군증들처럼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가지 기적을 보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의 믿음을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새로 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의 믿음을 사기 위해서는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봐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새로 나야 한다. //니고데모는 새로 (거듭) 나야 한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새로 난다는 것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야 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육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령으로 새로남(거듭남)도 바람처럼 느낄 수는 있다고 하셨다. //요한은 1장 12,13절에서 거듭남(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믿음)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거듭남은 하나님을 아버지(부모)로 모시는 것이다. 갓난아기는 누가 부모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라면서 누가 부모인지 자연스럽게 알아간다. 거듭남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아가는 시작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해주신다. ////거듭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나라다. 천국을 치장하고 있는 온갖 보화는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지혜)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13-25

요한복음 2:13-25 (공동번역)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가축을 쫓아내시고 환금상의 돈을 쏟아버리며 상을 둘러엎으셨다. 비둘기 장수에게는 거두어가라고 명하셨다. 다시는 내 아버지의 입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꾸짖으셨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유다인들은 예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다. 무슨 기적으로 권한이 있음을 증명하겠냐고 예수를 몰아세웠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대답하셨다. 그들은 사십육년 걸려 세운 성전을 단 사흘만에 세운다는 게 말이 되냐며 대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자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두이에 이 말씀을 생각하고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시며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셨다. 사람들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셨기 때문이다.

요2:13-25
//도대체 제자들의 믿음과 군중들의 믿음이 어떻게 다른가? 가나의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믿게 되었다 (11절)고 기록한 요한은, 23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예수의 여러가지 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하고 기록한다. 그런데 24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마음를 주지 않으셨다고 하신다. 23절의 ‘믿게 되었다’와 24절의 ‘마음을 주다'(개역개정에서는 ‘의탁’하다라고 번역)는 같은 단어를 쓴다. 곧 예수께서는 군중들을 믿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군중들은 믿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고 한다. //우리의 믿음이 유효하려면 예수께서 우리를 믿으셔야 한다. 일방적이면 맹신이 된다.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께서 우리를 믿게 하시려면,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한다. 임마누엘이다. 이 방법밖에 다른 길은 없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거하시는 길은 우리 안에 예수의 말씀을 담는 것이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제자들의 믿음이라고 군중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22절에 보면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 후에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고 기록한다.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말씀을 잘 알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머리에는 말씀이 들어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말씀을 마음에는 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사사건건 예수께 대든 이유다. //예수의 말씀, 성경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삼가 행해야 한다. 꾸준히 말씀을 읽어야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신다. 삼위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삶이다. 임마누엘, 곧 영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