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1-8

마태복음 12:1-8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함께 가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고발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 다윗이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도 안되는 제단에 차려 놓은 빵을 먹은 사건을 언급하셨다. 또 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일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율법책에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소개하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면, 우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신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11/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을 깨달으라고 하신다. 9장에서 (13절) 이미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비/긍휼의 나라요 제사의 나라가 아니다. 안식일 규정은 성전 밖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규정이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 안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물며 성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신) 예수 안에서는 무용지물과 같다. 제사가 율법이라면, 자비/긍휼은 율법이 완성된 사랑이다. 예수 안에 거할 때 성도는 사랑(자비/긍휼)의 법을 따르게 된다. //예수와 함께 길을 간다고 해서 배고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때로 밀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어야 할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물질적으로 가난할 수도 있다. 예수와의 동행이 편한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메는 멍에는 가볍다. 자비와 긍휼이 가득한 사랑이라는 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함도 복이 된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자.

마태복음 11:20-30

마태복음 11:20-30

예수께서는 자기가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고라신, 벳새다가 대표적인 마을이었다. 예수께서는 차라리 이방 마을 두로와 시돈에서 기적을 행했더라면, 그들은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심판의 날에 두로와 시돈이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마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교만이 하늘까지 치솟은 가버나움은 지오게까지 떨어지도록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소돔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심판 날에 소돔이 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복음의 비밀을 지혜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이라고 하셨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또 아들과 아들의 계시를 받는 사람만이 아버지 하나님을 안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초대하신다.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다.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께 배우라고 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에 쉼을 얻게 된다. 예수의 멍에는 편하고 예수의 짐은 가볍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10/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다시 가르치신다. 천국복음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하락된 쉼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취가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쉼이다. 세상에서 으뜸이 되기 위한 지혜와 슬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를 함께 메자고 하신다. 임마누엘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하신다. 그리하면 쉼을 얻는다고 하신다. 세상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신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세상 지혜와 슬기로 따지면 결코 쉽지도 가볍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면 그보다 쉬운 멍에도 없을 것이요 그보다 가벼운 짐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른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임마누엘이다. //천국복음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다. 임마누엘이다.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주님이 피리를 부시면 춤을 추면 된다. 문제는 피리에 맞춰 춤추는 순종보다 내가 피리를 불려는 교만이다. 주님은 스스로 지혜있고 똑똑하다고 하는 이런 교만한 자들을 책망하신다. 고라신 뱃세다 가버나움 사람들이 이런 교만한 자들을 대표한다. 예수님은 저들을 향해서 화를 내신다. 아니 마음으로는 우시며 곡을 하신다. 주님께서 곡을 하시면 우리는 당연히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자. 천국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장터와 같은 세상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다. 예수와 함께 멍에를 메자.

마태복음 11:11-19

마태복음 11:11-19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외쳤다. 하늘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나라가 올 것을 예언했다. 너희가 그 예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요한이 바로 메시야보다 먼저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는 것을 알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요한에 대해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말했다.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9/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된다. 예수께서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로 입증되는 나라다.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 놀이에서 대장/술래를 따라하지 않으면 그 놀이는 재미가 없다. 무리가 대장/술래에 관심이 없으면 더 이상 놀이가 진행될 수 없다. 예수님 당시 지도자 유대인들은 요한도 예수님도 대장/술래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끼리만이 북치고 장구치고자 했다. 한편으로 세리와 죄인들, 소위 사회적 약자들은 하늘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놀이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께서 대장/술래가 되어 하는 놀이에 재미있게 참여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다.하늘나라 놀이가 재미있다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11:1-10

마태복음 11:1-10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일이라는 표현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고 기록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 있다.” 하고 덧붙이셨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자 예수께서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예언자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성경에 기록된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는 구절의 심부름꾼이 바로 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직전, 빌립이 예수께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하고 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해서도 이미 같은 맥락에서 하셨다. 내가 메시야인지 (오실 그분인지)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오실 그분의 메세지는 세례자 요한이 외친 그대로 ‘회개하. 천국이 가까이 왔다.” 였다. 요한은 회개에 대해서는 바로 알고 있었지만, 천국에 대한 이해는 적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례요한에 대해 여자가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고 평가하셨지만, 한편으로 천국에서는 작은 자라고 하셨다. 메시야가 하시는 일은 임마누엘이다.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눈 뜨는 것보다,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듣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핵심이다. 사람은 죽었다 살아나도 나사처럼 몸은 다시 죽는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복을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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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34-42

마태복음 10:34-42

예수께서는 느닷없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부모 자식간에 고부간에 맞서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신다.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주님보다 부모나 자녀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신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주님의 제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선언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지만,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의 제자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맞아 들이는 것이요,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언자를 맞아들이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고, 의인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곧 주님을 맞아들이면 주님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주님의 제자로서 (제자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7/

//예수께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한다면 집안 식구를 사랑해야 한다.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던가? 다만 주님보다 집안 사람을 ‘더’사랑해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집안 사람을 지금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집안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집안 사람들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주님의 제자를 맞아들이은 사람은 주님을 맞아 들이는 것이요, 나아가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집안 사람들에게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우리가 집안 사람들을 지금보다 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주님의 제자라면 집안 사람들을 사랑할뿐 아니라, 작은 사람들도 사랑해야 한다. 작은 사람이란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이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자의 이름으로 온정의 손길을 나눠야 한다. 제자의 이름이라고 해서 우리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옷입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요, 주님이 받을 상을 받는 길이다. 주님과 같은 상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