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17-36 읽기

바로는 요셉에게 자기가 연이어 꾼 꿈을 얘기했다. 그리고 점술가들은 해석하지 못했다. 요셉은 바로에게 두개의 꿈은 한가지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여주신 것이라고 대답하고 꿈을 해석해 주었다. [일곱 좋은 암소와 일곱 좋은 이삭은 7년의 풍년을 의미하고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와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은 7년의 흉년을 뜻한다. 후에든 일곱 흉년이 너무 심해 이전 풍년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꿈을 연이어 꾼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정하셨고 속히 행하신다는 뜻이다.] 요셉은 바로에게 명철하고 지혜있는 사람을 택해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라고 조언한다. 아니 일곱해 풍년에 감독관을 두어 애굽 땅의 곡물 오분의 일을 거두어 각 성읍에 쌓아 저장하여 일곱 흉년에 대비하라고 대책까지 바로에게 말했다.

>> 꿈꾸던 자 요셉이 꿈을 해석하고 꿈을 경영하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 임마누엘! 말씀을 읽는 사람이  말씀을 해석하는 자가 되는 것까지는 쉽다. 그러나 말씀을 경영하는 자로 세움을 받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역시 임마누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말씀을 해석하는 성도라 해도 번민할 수 밖에 없다. 구덩이에 떨어지고 옥에 떨어졌던 요셉이 꿈을 경영하는 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임마누엘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비천한 곳에서도 임마누엘을 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고 하신다.

창세기 41:1-16 읽기

만 이년 후에, 2 years later. 바로가 꿈을 꾸었다. 아름답고 살진 입곱 암소가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암소에게 잡혀 먹는 꿈이었다. 꿈에 (놀란) 바로는 바로 깨었다가 다시 잠이들어 연이어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가늘고 동품에 마른 일곱이삭에게 먹히는 꿈이었다. 바로는 꿈에서 깼다.

아침에 깨어난 바로는 꿈으로 마음이 번민했다. 점술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꿈을 말해주었으나 그 누구고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자신과 떡 굽던 관원장이  친위대장의 옥에 갇혔을 때의 일을 바로에게 말했다. 술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라고 말 한 것은 아마도 요셉에게 은혜입고도 지난 2년동안 그 은혜를 잊어버린 배은망덕이라기보다 바로에게 죄를 지어 감옥에 갔던 그 사실을 기억한다는 뜻일 것이다. 술맡은 관원장에게는 바로에게 자신의 죄를 다시 상기시키게 하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복직될 정도로) 충실한 신하여서 자신의 꿈을 해석해준 요셉을 바로에게 소개했다.

바로는 사람을 보내 요셉을 불렀다. 요셉은 용모와 복장을 단정히 하고 바로 앞에 섰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는데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고 해서 불렀다고 말했다. 요셉은 자신이 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꿈을 해석하신다고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꿈을 해석하시면 바로의 번민은 사라지고 편안해 질 것이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해석도 바로의 번민을 날려주지 못했다. 점술가와 현인들이 뭐라한 들 신과 같은 바로보다 권위가 낮았기 때문이리라. 점술가와 현인들이 통일된 답을 내 놓았다면 몰라도, 그들은 바로의 환심을 사기위한 각각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다. 그는 꿈의 해석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말했다. 바로의 번민을 날릴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바로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복음을 전했다. 요셉의 마음에는 꿈의 해석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꿈을 꿈대로 경영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요셉은 꿈꾸는 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꿈을 해석하는 자다. 그리고 앞으로는 꿈을 경영하는 자가 될 것이다. 꿈꾸게 하시는 분도,꿈을 해석해 주시는 분도, 꿈을 경영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결국 임마누엘이 답니다.

창세기 40:1-23 읽기

친위대장 보디발이 요셉을 가둔 옥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잡혀들어왔다. 보디발이 여전히 친위대장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의 수종을 들게 했다. 요셉은 성실하게 그들을 섬겼다. 여러날이 지났을 때 술 맡았던 자와 떡 굽던 자가 꿈을 각각 꿨다. 그들은 꿈을 해석하지 못해 근심했다. 근심의 빛을 알아본 요셉은 자초지종을 물었고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자기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술 맡았던 관원장이 먼저 꿈을 얘기했고 요셉은 꿈을 해석해 주었다. 요셉은 술 맡았던 관원장에게 당신이 잘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집에서 나를 건져주소서라고 청탁했다. 요셉은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했다. 떡 굽던 관원장은 요셉이 술 맡았던 관원자의 꿈을 해석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꿈도 해석해 달라고 요셉에게 부탁했다. 요셉은 떡 굽던 관원장의 꿈도 해석해 주었다. 삼일째 되던 날은 바로의 생일이었다. 바로는 모든 신하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자리에서 바로는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을 시켜주었고 떡 굽던 관원장은 사형을 선고했다. 요셉이 꿈을 해석한 대로 되었다. 그러나 술맡은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다.

>> 친위대장이 여전히 보디발이라면, 보디발이 요셉을 옥에 가둔 것은 음탕한 아내로부터 요셉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고, 요셉을 집사가 아닌 말단 공무원으로 등용시켜 집에서만 아니라 자신의 일터에서도 요셉의 형통을 누리고자 했을 듯. 일찌기 하나님과 함께하는 요셉의 형통을 알아본 보디발의 꼼수/고단수 랄까… 
 
>>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렇다고 남의 꿈을 말해달라고 하는 요셉의 배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답은 임마누엘에 있을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형통을 순간 순간마다 경험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은 그자리에서 꿈을 풀어주셨다. 그러나 이런 요셉이라도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고, 술 맡은 관원장에게 ‘당신이 잘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집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라고 청탁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듯한 이 표현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결국 술맡은 관원장의 은혜를 구하고 바로에게 구원을 기대한 요셉을, 하나님께서는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잊혀진 존재로 만드신다. 두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신다.

창세기 39:1-23 읽기

1  (다시 요셉이야기가 이어진다.) 요셉은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애굽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에게 팔렸다. 그런데 한글 번역 1절은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로 시작한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40일동안 시험받으신 구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요셉은 하나님께 이끌려 애굽에 내려간 것이다.

2 – 6a 주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 (아비 야곱을 등에 업고 형들에게도 호가호위하던 요셉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자신의 허세를 모두 내려놓았을 것이다. 요셉은 더이상 아비 야곱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요셉이 의지할 것은 이제 아비 야곱이 들려주었을 주하나님 밖에 없었다. 겸손해진 요셉에게 주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어 애굽사람 보디발의 집에서 일했다. 보디발은 주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 요셉을 형통케 하시는 주하나님을 보았다. 보디발은 이런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요셉에게 위탁하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자 주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주하나님의 복이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 보디발은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달리 간섭할 일이 없었다. // 창세기 저자는 (모세는) 애굽사람 보디발을 주인이라고 반복해서 부른다. 요셉은 종이다. 보디발과 요셉의 주종관계가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인이(보디발이) 종에게  (요셉에게) 그의 소유를 다 위탁했다.

6b – 10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요셉의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해서 동침하기를 청했다. 요셉은 거절했다. 요셉은 주인 보디발이 그의 소유를 다 자기에게 위탁했지만 주인이 금한 것이 있는데 바로 주인의 아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주인이 금한 것을 행하는 것은 큰 악이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 오늘도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다.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은 율법이전에도 악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요셉의 고백은 간음이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고백이기보다는 간음은 인륜을 범하는 것이요, 주인에 대한 배신이 곧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인은 (주인의 아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날마다 요셉을 유혹했고 요셉은 거절 거절하다 결국 여인이 있는 곳에는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11 – 20 그러나 한 집에서 어찌 마주칠 일이 없으리요. 요셉이 일을 하러 집안에 들어갔는데 마침 집 사람들은 하나도 집안에 없었고 그 여인만(주인의 아내라고 더이상 부르지 않는다.) 집안에 있었다. 그 여인이 요셉의 옷을 잡고 동침하자고 꼬시자 요셉은 자기 옷을 벗어두고 집밖으로 나왔다. 그 여인은 요셉을 옷을 들고 집 사람들을 불러서 요셉이 자기를 오히려 성추행 하려고 했다고 거짓말했다. 요셉이 옷을 벗고 성추행하려고 해서 자신이 크게 소리를 질렀더니 옷을 내버려두고 도망했다고 꾸며댔다. 그 여인은 자기 주인이 (남편이라고 하지 않고 주인이라고 부른다.)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히브리 종 요셉이 자신을 성추행하려고 했다고 거짓으로 고자질 했다. 주인 보디발은 자기 아내의 말을 듣고 심히 노했다. 주인 보디발은 요셉을 잡아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가두었다.

21 – 23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주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요셉에게 사랑을 베푸셔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에게 맡곁고 제반 사무를 모두 요셉이 처리하도록 일임했다. 간수장이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요셉은 일처리를 잘했다. 이는 주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창세기 저자는 주석을 단다. 주하나님께서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

>> 임마누엘! 요셉이 범사에 형통했던 이유는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은 요셉이 간청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심을 알고 주인되신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따라오는 은혜다. 아비 야곱을 등에 업고 형들에게 호가호위 하던 요셉은 노예로 애굽땅으로 팔려가는 길에서 자신이 의지할 주인은 아비 야곱으로부터 들은 주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요셉과 함께 하셨다. 내것을 꽉 움켜잡고 임마누엘을 간청해 봤자 얻을 수 없다. 요셉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에 세상 주인에게도 성실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던 이유도 음행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주인에게 불성실함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다. 당시 문화로 음행이 더 큰 죄였을까? 아니라고본다. 종이 주인에게 불성실 한 것이 더 큰 죄였을 것이다.) 하여간 임마누엘은 주인되신 하나님께 성실한 (충실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범사에 형통을 꿈꾼다면 임마누엘를 구하라.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고 하신다.

창세기 38:1-30 읽기

유다 이야기로 잠시 방향을 튼다. 유다는 동생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 때 주역이었다. 아마도 이때문에 유다는 아비 야곱도 멀리하고 형제들도 멀리하고 아둘람으로 내려가서 히라와 가까이 지냈을 것이다. 유다는 아둘람에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야곱이 유다의 결혼에 관한 반응은 기록에 없다.) 유다는 가나안 여자에게서 엘이라는 첫아들을 낳고 둘째 오난 세째 셀라를 낳았다. 세째를 낳을 때 유다는 거십에 있었다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고 있는데 거십이 어딘지는확실치 않다.

유다는 장자 엘을 위해 다말이라는 며느리를 얻었다. 주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엘을 주하나님이 죽이셨다. (엘의 악이 무엇인지 기록에 없다.) 유다는 오난에게 형수를 취해서 동생의 본분을 다하라고 했다. 오난은 다말을 취했으나 형의 대를 잇게해 주지 않으려고 땅에 설정하고 말았다. 주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오난의 일도 악했다. 주하나님은 오난도 죽이셨다. 유다는 세째 셀라도 죽을까하여 셀라에게는 다말을 취하라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말에게 수절을 명한 후에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며 친정을 쫓아보냈다.

얼마 후에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 곧 유다의 아내가 죽었다. 유다는 상처의 아픔을 딛고자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을 깎기로 했다.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유다가 딤나에 왔다고 알려 주었다. 다말은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셀라에게 자신을 아내로 주지 않은 유다를 과부 옷을 벗고 창녀의 행색으로 꼬시기로 했다. 유다는 다말을 며느린 줄 몰라보고 염소 새끼 한마리에 몸을 사기로 했다. 다말은 염소 새끼를 받을 때까지 유다의 끈 달린 도장과 지팡이를 담보로 맡기라고 하였고 유다는 그렇게 했다. 다말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 하였다. 다말은 다시 창녀행색을 벗어버리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었다. 유다가 친구 아둘람 사람에게 염소 새끼 한마리를 주고 끈달린 인장과 지팡이를 찾아오라고 부탁하였지만 그는 창녀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만다. 오히려 그지역에는 창녀가 없다는 소식만 가지고 왔다. 유다는염소 새끼를 주려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석달쯤 지나 (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다말의 임신 소식을 알렸다. 다말이 행음하였으니 다말을 끌어내어 화형을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다말은 끈달린 도장과 지팡이의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했다고 유다에게 알렸다. 유다는 자신의 도장과 지팡이를 알아보고 다말이 자신보다 옳고 셀라에게 다말을 주지 않은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물론 유다는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다말은 쌍둥이를 낳았다. 손이 먼저 나오던 아기가 도로 들어가고 뒤따르던 아기가 먼저 태어났다. 베레스라고 불렀다. 먼저 나오려던 아이의 이름은 세라라고 불렀다.

>> 모세의 율법을 소급적용하면서 본문을 읽어서는 안된다. 유다가 아비 야곱을 떠나 아둘람에서 독립한 것도, 가나안 여자와 결혼한 것도, 엘이 악하고, 오난이 형수취수를 하지 않은 것, 유다가 성매매 한 것, 유다가 며느리와 동침한 것, 이 모든 것이 율법에 반한 악한 행동이지만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다. 다시말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옳고 그름은 있었다는 뜻이다. (율법은 애굽 노예 생활을 통하여 완전히 무너진 합리적인 상식을 다시 세우는 하나님의 열심이 아닐까 한다.) 유다 집안에서 벌어진 악행들은 율법에서 하지 말라고 해서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결국 유다는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라고 인정한다. 다말이 의롭다고, 곧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더 합당하게 행동했다고 인정한다. 세상을 향해 성경을 손에 들고 핏대를 세울 필요가 없다.

>> 예수께서는 합리적이고 마땅한 행동에 사랑을 더하셔서 하나님나라의 법을 완성하셨다. 이 사랑의 법을 적용하는 것이 항상 문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순종하는 힘을 주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