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23-2:17 읽기

23 바울은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자신이 신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목숨을 걸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린도에 재차 방문하는 일정이 바뀐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마음에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풀어나간다. 다시말해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는 것보다 (내 고집보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에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24바울 일행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가르치고 감독하는 자로서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방문하기 보다는 동역자의 입장에서 방문해서 함께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고 전한다.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이미 믿음에 서있는 자라고 선언한다.

2:1-4 이미 믿음에 서있는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가서 동역의 기쁨을 나누기보다 가르치고 감독하고 책망하는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아서 고린도로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을 기쁘게 해 줄 사람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인데, 어떻게 자신이 가서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마음 아프게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문하기보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마음아프게 하지 않고 서로에게 기쁨이 된다는 확신이 있다고 말한다.

4-8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의 상황을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심지어 많은 눈물의 기도로 편지를(전서를) 썼다고 말한다. 물론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한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극진한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에  괴로워 하면서 아픈 마음과 눈물의 기도로 편지를 썼지만, (바울 자신이 신실하지 못하다는 비난은)  바울의 마음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받는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 당사자들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프게 한 사람들은 이미 충분한 벌을 받았다고 한다. (누가 어떤 벌을 받았는지?) 그러니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은 바울과 고린도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아픔을 준 ‘그’ 사람을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편지한다.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나친 슬픔은, 아마도 구원에서 떨어질 것이라는 근심이 아닐까?) 바울은 오히려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권한다.

9-11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낸 이유를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모든 일에 순종하는 지 시험하여 알아보려고 썼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앞에서 순종해야 할 가장 큰 제목은 용서라고 한다. 서로 용서해야 사탄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서로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속셈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지 않느냐고 말한다.

12-13 바울은 드로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러 갔고 주님께서 바울에게 거기서도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나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해서, 디로를 만나기 위해 드로아 사람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다.

14-17 바울은 바울 일행의 일정이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어디를 가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바울 일행은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요 멸망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된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곧 생명의 향기, 영생의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가 된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니라고 말한다. 장사꾼이 아니라 일꾼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한다.

>> 내 고집보다 (내 서원보다) 하나님의 뜻에 (성령의 인도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르치려고 드는 것보다 함께 세워져 가는 기쁨을 누리라고 하신다. 책망보다 용서가 필요하다.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할 마음으로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라고 하신다.

고린도후서 1:12-22 읽기

12-14바울 일행의 자랑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행하고, 세상의 지혜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처신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 곧 고린도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편지한다. 사실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바울 일행에 대하여 부분적인 이해 밖에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바울 일행의 자랑이요, 바울 일행이 고린도 교회와 가가야 성도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서로에게 자랑이 되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나보다. (그러나)

15-19 바울은 서로에게 서로가 자랑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편지을 이어간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거듭된 은혜를 받게 하려고 방문 계획을 짤 때, 고린도 – 마케도니아 – 고린도 – 유대의 일정을 짰었다. 그런데 일정에 차질이 생겼나 보다. 바울은 고린도를 다시 방문할 마음이 없었으면서도 고린도를 다시 방문할 것처럼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라고 편지한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듯 바울 일행도 신실하다고 말한다. 바울 일행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실하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 일행도 신실하다고 강조한다.  

20-22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곧 성도들의 뜻 대신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성도들은 내 뜻을 고집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아멘’하는 자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고린도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바울 일행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튼튼히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요, 바울 일행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로 성령을 주셨다고 적는다. 곧 방문 계획이 바뀐 것은 바울 일행이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부어주신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듯 하다.

>> 신실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바울은 서로를 자랑으로 여겨야 할 성도들 간의 신실함은, 성도들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요,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쳐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신실하다는 것은 성도들이 삼위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는 것에 바탕을 둔다고 말할 수 있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으로 신실해 진다. 이럴 때 서로에게 자랑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길이다.

고린도후서 1:1-11 읽기

발신자: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

수신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

문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찬송한다.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한다. 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환난중의 성도들을 위로하신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로하실뿐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 성도들에게 위로가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성도들에게도 넘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위로는 성도들에게 임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고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다시말해 바울 일행에게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이 넘치는 것도 고린도에 있는 교회와 아가야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편지한다. 바울 일행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의 모든 성도들을 위로 한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의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위로로 말미암아 고난을 능히 견디기를 바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뿐만 아니라 위로에도 참여하는 자가 될 줄을 안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위로한 것 같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바울 일행을 위로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 언급한다. 바울 일행은 죽음직전까지 가도록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했다. 스스로를 위지할 수 없는 사형수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만 의지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망에서 바울 일행을 건지셨고, 건지시며, 건지실 것이라고 (믿음과 소망의)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바울 일행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바울 일행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은혜를 입어, 많은 사람의 감사의 제목이 될 수있도록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기도요청을 한다.

>>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바울은 이런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한다. 예수께서는 자비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누리고 슬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누리는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친히 이 하나님나라의 복을 누리셨다. 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바울은 편지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화를  빈다. 고난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 은혜요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는 것이 평화다. 다른 복은 없다.  

>> 고난이 있는 곳에 위로가 있듯이 기도의 제목이 감사의 제목이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라고 분명히 말한다. 바울은 생을 마감하면서 디모데에게도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길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되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 고난받음이 위로다. No pain, No gain.  

창세기 50:15-26 읽기

요셉의 형제들은 야곱이 죽자, 요셉이 자신들을 미워하여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에 보복할까 염려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야곱이 죽기전에 요셉에게 형제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유언했으니 야곱의 유언에 따라 자신들을 용서해달라고 말을 전했다. 요셉은 형들의 이런 전언에 슬퍼 울었다. (요셉은 45장에서 이미 형들에게 자신을 판 일로 근심하지 말라고 했었다. 한탄하지 말라고 말했었다. 자신을 애굽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형들은 친히 요셉을 찾아와서 자신들은 요셉의 종들이라고 말했다. 요셉은  다시한번 두려워하지 말라고 형들에게 대답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은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해하려한 것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뜻)으로 바꾸셔서 많은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으니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반복해 말했다. 오히려 요셉이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기르겠다고 위로했다. 요셉은 (영적) 장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요셉은 형제들과 함께 애굽에서 백십세까지 살았다. 에브라임 증손자까지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보았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유언했다. 자신은 애굽에서 죽겠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보시고 이땅에서 인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해골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겠다고 맹세시켰다. 요셉은 죽어 미이라 처리가 된 후 입관되었다. (매장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두려웠다. 그래서 야곱의 유언을 들먹였다. 야곱의 임종을 누구보다도 오래지킨 요셉은 야곱의 유언을 팔아먹는 형들의 태도에 슬플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울며 입맞추지 않았던가. 지난 일로 근심하지 한탄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요셉은 원수갚은 것은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하며, 거듭 형들의 악행조차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바꾸셨다고 형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영적) 장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성도들도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의 무궁하심을 팔아먹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주인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은 종이라고 말했지만 입발림 소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요셉의 용서에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은혜아래 있다면 죄를 멀리해야 한다. 착하고 충성되게 살아야 한다.

>>   요셉은 영적 장자로서 살다가 죽었다. 요셉의 마지막 유언도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이었다. 나의 유언도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 밖에 달리 없다.

창세기 49:29-50:14 읽기

야곱이 마지막 유언을 한다. 내가 죽거든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다.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매장지로 산 땅이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고 야곱이 레아도 장사한 곳이라고 한다. 야곱은 다시한번 그곳을 헷사람에게 돈을 주고 산 땅이라고 강조한다. 야곱은 막벨라 굴에 장사해 달라고 명하고 숨을 거뒀다. 창세기 기자는 야곱이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다고 표현한다.

요셉은 야곱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울었다. 요셉은 애굽식으로 향처리로 사십일간 야곱을 염했다. 애굽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야곱을 위하여 곡을 했다. 곡하는 기간이 지난 후 요셉은 바로에게 가나안 땅에 가서 아버지 야곱을 장사하게 해 달라고 탄원했고 바로는 요셉이 맹세한 대로 야곱을 장사하라고 명했다. 야곱의 장례식에는 야곱의 아들들 뿐만 아니라 바로의 모든 신하들도 참여했다. 심히 많은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야곱의 장례행렬을 이끌었다. 요셉은 요단강을 건너자 칠일동안 애곡하였다. 가나안 백성들은 애굽사람들 가운데 높은 사람의 장례식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야곱의 아들들은 야곱의 유언대로 야곱의 시신을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다. 창세기 저자는 이곳을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산 매장지라고 다시한번 강조한다. 장례를 마친 요셉과 형제들과 호상꾼들은 애굽으로 돌아왔다. 

>> 야곱은 유언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마지막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의 백성에게 (조상에게) 돌아갔다. 영어 KJV, NIV, NASV 모두 [유언을 하고, 침대에 눕고( 발을 모으고), 마지막 숨을 쉬고 (숨을 거두고)]의 주어를 야곱으로 사용하지만 그의 백성에게 돌아갔다는 피동태로 기록한다. 야곱이 죽은 후의 일이기에 피동태일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백성에게 돌아가느냐 아니냐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적용해 본다.

>> 야곱의 죽음을 애굽의 국장으로 치를 만큼 대단해 보이는 애굽 총리 요셉은 어쩔 수 없는 바로의 종이었다. 애굽을 7년 흉년에서 건져내었다 하더라도 요셉의 주인은 바로였다. 굳이 말을 지어낸다면 노예총리였다. 바로의 입장에서는 애굽에게 형통을 가져오는 바로 소유의  무당 같은 존재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축귀한 여종과 다를 바 없다.) 흉년이 끝나고도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갈 수 없었던 이유였다. 요셉이 탈애굽할 수 있으려면 주인인 바로가 요셉을 놓아주거나 요셉이 죽어야만 했다. 아니면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 야곱은 자신이 묻혀야 할 곳을 알았다. 내가 묻혀야 할 곳은 교회다. 교회의 온전한 지체로 죽는 것이다. 예수께서 값주고 사셨기 때문이다. 이땅에서도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철두철미 순종하며 살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