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6:28-47:12 읽기

야곱은 유다를 앞장세워 애굽으로 갔다. 고센에 도착하자 요셉이 총리 수레를 타고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나왔다. 요셉은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다’며 위로했다. 요셉은 형들과 아버지 야곱에게 바로에게 어떻게 말을 할지 알려주었다.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아버지 이스라엘과 형제들이 가솔과 모든 가산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땅에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형들 중 다섯을 먼저 바로에게 보였다. 바로는 요셉이 형들에게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요셉이 일러준대로 답을 하고 고센 땅에 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실제로는 요셉이 통역을 했을 것이다.) 바로가 요셉에게, 요셉이 애굽땅을 관리하고 있으니 아버지와 형들이 원하는 대로 고센땅에 거주하도록 하고, 형제들에게 바로의 가축도 관리하도록 명했다.

요셉은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을 소개했다. 바로가 형들에게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형들은 바로에게 자신들을 종들이라고 낮추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선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했다. (창세기 초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복을 베푸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을 받는 자가 무릎을 꿇고 겸손히 순종하것이라고 적용했었다. 영국여왕이 기사작위를 수여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야곱이 바로에게 자신을 종이라고 낮추기보다 바로에게 축복했다는 표현은 공동번역에서와 같이 바로에게 만수무강을 빌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야곱이 만수무강을 빌자 바로는 야곱에게 나이를 물었다. 야곱은 백삼십년을 살았다고 대답했다. 130년을 살았지만 조상들만큼 (아브라함은 175년을 이삭은 180년을 살았다.) 오래 살지는 못했다고 대답했다. 자신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대답했다. 야곱은 바로의 만수무강을 빌고 물러났다.

요셉은 바로에게 허락받은대로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에게 애굽에서 목축하기 좋은 땅 라암셋을 주었다.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의 식구 수대로 먹을 것을 주었다.

>> 고센 땅. 가나안에서 광야를 거쳐 제일 처음 나일 평야을 맞다닥뜨리는 곳이다. 다시말해 가나안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흉년이 끝나면 언제든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애굽문화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 자리잡도록 하였다. 요셉이 어릴 때 들은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다는 반증이다. 어쩌면 남은 5년의 흉년을 마치면 곧 돌아갈수 있겠다는 생각이 앞섰을 수 있다.
>> 야곱은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대답했다. 서른을 갓넘은 요셉의 삶을 형통했다는 것과 극히 대조적인 삶이다. 솔직히 야곱의 삶이 험악했던 이유는 야곱이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외형적으로보면 열두아들을 거느린 족장이 되었으니, 아니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인데도, 속이고 속은 자신의 삶을 험악한 삶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반면 요셉의 삶이야 말로 형제들에게 팔리고 노예가 되었고 옥에 갇혔으니, 외형적으로 험악하게 살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성경은 형통했다고 평가한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살아왔느냐,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했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곧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라면, 요셉처럼 이땅에서 총리의 지위로 부름받았다 하더라도 이땅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된다. 이땅에 미련을 두면 삶이 험악해 진다. 주의 날이 내일인 것처럼 살라고 하신다.

창세기 46:1-27읽기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헤브론을) 떠나 브엘세바에 (야곱의 고향?)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희생제사를 드린 밤에 하나님이 이상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셨다. 야곱이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하나님이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다. 요셉이 네 임종을 지킬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야곱의 아들들은 바로가 보낸 수레에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모든 가산을  이끌고 브엘세바를 떠나 다함께 애굽으로 갔다. 야곱이 애굽으로 갈 때 야곱의 자손들은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포함해서 70명으로 불어났었다. (창세기 기자는 이미 죽은 유다의 두 아들과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을 포함시켜 66이라는 불완전한 숫자를 70이라는 완전한 숫자로 바꾼다. 칠십이라고 두번 적었다.)

>> 브엘세바. 야곱의 아버지 이삭과 조부 아브라함이 장막을 쳤던 곳이다. 야곱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야곱이 애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 도망친 곳도 브엘세바에서였다. 야곱에게는 고향과 같은 곳이라고 하겠다. 이런 브엘세바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린  것은 브엘세바가 야곱에게 고향이어서라기 보다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 곧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야곱이 미지의 땅을 향할 때면 하나님은 어김없이 나타나셔서 언약을 기억하게 하신다.

>>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언약의 절정은 ‘내가 너와 함께’이다. 곧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이 구원이요 영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다. 자꾸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로 살려고 한다. 이런 자는 후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누리지 못한다는 야고보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 야곱은 자손들을 셌다. 하나 둘 셋… 도합 66이다.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유다의 두 아들과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을 더해 야곱의 자손이 70이라고 셈하신다. 완전하다. 사람의 눈에는 부족해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완전하다.

창세기 45:16-28 읽기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정에 전해졌고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기뻐해서 요셉을 불렀다. 바로는 요셉에게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오라고 형들에게 명하라고 했다. 바로가 야곱의 가족에게 애굽의 좋은 땅도 주고 애굽의 기름진 것을 먹도록 베풀겠다고 했다. 아예 자녀들과 아내들, 그리고 늙은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수레가지 내 주었다.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이니 아끼지 말라고 하였다.

요셉은 바로의 명령대로 했다. 형제들에게 선물도 주었다. 베냐민에게는 더 많이 주었고 아버지 야곱에게 보낼 선물도 수나귀 열필에 가득 담았다. 그리고 가나안을 오갈 때 필요한 양식도 실어주었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에게  오가면서 다투지 말라고 당부한다.

애굽의 수레를 이끌로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 야곱에게 도착한 이들의 행령은 어땠을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라 관심조차 없었을까? 야곱은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다는 아들들의 말을 믿지 못해 어리둥절 했다. 밖에서 대기중인 애굽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했다. 이스라엘(야곱)은 ‘족하도다’라고 말했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 왜? 자꾸 애굽이 하늘나라로 연상될까? 애굽을 하나님나라라고 할 수도 없고 바로가 하나님일 수도 없고 바로의 신하들이 천사일 수도 없고 요셉이 예수님 일 수도 없는데… 그리고 왜 자꾸 시편 23편이 입속에서 맴돌까? 시편 23편은 분명 다윗의 노래인데, 야곱의 노래처럼 들린다. 야곱이 족하다고 내뱉었은 말은 분명 다윗이 노래한 ‘부족함이 없다’ 와는 오히려 정반대 같은데. 야곱이 족하다는 말은 세상풍파를 겪을대로 다 겪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다윗은 영혼의 소생을 노래했지만 야곱은 육신의 기운이 소생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다윗은 주께서 베풀어주실 밥상, 주께서 기름을 머리에 부어주시며 존귀케 해 주심, 주께서 채워주실 포도주잔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돌아가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노래하는데… 야곱은 기껏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볼 것을 기대하지 않는가? (야곱은 요셉을 만나 애굽땅의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시편 23편을 읊조리게 하고 하나님나라를 생각하게 한다.
>> 그러나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한 야곱 같이, 한국 교회는 진정 예수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말씀이 여전히 문밖에서 대기 하고 있는데 말씀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께서 여전히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데… 예수를 만나야 기운이 소생하고 영혼이 소생하는데. 살아계시며 다시 오실 주님을 보기를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데… 요셉의 기우처럼 여전히 다투고만 있는 한국교회가 아닌가… 오늘은 생각이 뒤죽박죽이다. 
 
>> 하늘의 좋은 땅, 곧 하나님나라의 좋은 것이 다 우리 것이라고 하신다.

창세기 45:1-15 읽기

요셉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고 시종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요셉이라고 알리고 펑펑울었다. 요셉이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시종들이 눈치챘고 이 소식은 바로의 궁정까지 전해졌다.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 야곱의 안부부터 물었다. 혼비백산 놀란 것은 오히려 형들이었다. 요셉에게 가까이 가서 탄원하던 유다마져도 움찔하고 뒷걸음질 쳤을 법했다. 요셉은 형들을 가까이 불러 자신이 요셉임을, 형들이 애굽에 판 요셉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판 것에 대해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말라고 했다. 이 모든 일은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말한다.   

요셉은 이제 속히 가나안으로 돌아가 아버지 야곱을 모셔오라고 형들에게 당부했다. 고센땅에 머물며 아직 다가올 5년의 흉년동안 부족함이 없이 지내라고 아버지 야곱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요셉은 자신이 다시한번 열둘의 하나 요셉이라고 강조한다. 형제들에게 요셉이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를 아버지 야곱에게 전하고 속히 모시고 오라고 부탁한다.

운다. 요셉과 베냐민이 껴안고 울었다. 요셉은 형들과 일일이 입마추며 안고 울었다. 그제서야 형들의 입이 떨어졌다.

>> 요셉이 열일곱이 갓넘어 팔려와 서른에 총리가 되고 칠 년의 흉년과 이 년의 흉년을 보냈으니 2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은 강산이 두번 변하고서야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고백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후대에 사는 우리들은 안다. 20년씩 20번이 지나야 출애굽으로 하나님의 큰 구원이 한 걸음 더 내딛고, 다시 20년씩 60번은 더 지나야 예수님이 오신다. 요셉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몰랐다. 그저 임마누엘의 하나님께 성실(충성)했을 뿐이다.  >> 우리도 종말의 때를 모른다. 그저 임마누엘의 하나님께 성실하라고 하신다.

>> 함께 울라. 안고 울라. 세상은 요셉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형들과 같다. 세상은 지적질이 아니라 교회가 입맞춰 주고 안고 울어주길 바랄것이다. 이미 한국교회에 등을 돌린 세상을 향해, 교회는 형제들에게 팔리고 누명쓰고 옥에 갇히고 총리가 되어서도 인종차별을 겪었을 요셉처럼 하나님께 (주어진 삶에) 성실(충성)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세상을 품을 수 있다.

창세기 44:18-34 읽기

유다가 요셉에게 가까이 가서 말했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사정하겠다는 뜻이리라.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라헬에게서 두 아들을 낳아 특별히 사랑했는데 하나는 나가서 찢겨 죽었다고 알고 있으니, 둘째 베냐민도 돌아가지 못하면 슬퍼 죽게 될 것이라고 읍소했다. 그리고 유다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베냐민을 데리고 왔으니 자기를 베냐민 대신 잡아두고 베냐민은 다른 형제들과 함께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 유다는 요셉에게 가까이 나아가, 요셉을 주인이라고 부르고 요셉은 바로와 같으니 노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 달라고 말한다. 유다는 읍소하는 핵심은 자신의 생명보다 아버지 야곱의 죽음에 대한 걱정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버지  야곱에게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이제는 바로와 같은 요셉의 손에 달렸으니 요셉에게 부디 노하지말고 베냐민은 보내주고 자신을 잡으라고 한다.

 >> 부모공경과 형제사랑을 회복했다고나 할까? 부모공경과 형제사랑으로 바로와 같은 요셉의 권위에 일종의 도전장을 던진셈이다. 유다는 부모공경과 형제사랑으로 바로와 같은 요셉에게 읍소한다. 물론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부모공경과 형제사랑이 이겼다는 것을. 부모공경과 형제사랑은 하나님의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세상을 이길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