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1:36-55

라반이 드라빔을 찾지 못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제는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불러 나눴던 얘기를 라반에게도 한다. 지난 이십 년을 레아와 라헬을 위하여 14년, 양떼를 위하여 6년을 섬기는 동안 라반이 품삯을 열번이나 바꿨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야곱은  지난 육년동안의 섬김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야곱의 고난과 손의 수고를  돌아보신 결과라고 답한다. 그 하나님이 어젯밤 라반을 책망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한다.

라반은 끝까지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고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야곱과 언약을 맺는다. 돌기둥과 돌무더기를 쌓았다. 두사람이 언약을 맺은 곳을 갈르엣, 곧 증거의 돌무더기라고 불렀다. 또 이곳을 주하나님께서 살피시는 곳이라고 하여 미스바라고 불렀다. 라반은 야곱에게 자기 딸을 박대하거나 다른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돌무더기와 기둥을 사이에 두고 서로 침법해서 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라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나홀의 조상의 하나님께,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했다. 야곱은 그곳 길르앗 산에서 (갈르엣, 미스바)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고 밤을 지냈다. 라반은 다음날 아침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을 축복하고 다시 밧단 아람으로 돌아갔다.

// 라반이 아는 하나님은 조부 나홀과 백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을 통해 만난 이삭의 하나님이 전부다. 밤에 나타나 친히 말씀해 주셨음에도 그는 결국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야곱도 여전히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야곱도 하나님을 알아가려면 멀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 주실 때 그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각자의 드라빔을 버려야 한다. 라반 처럼 하나님이 드라빔을 잃어버리게 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드라빔에 집착하는 것은 두주인을 섬기는 것이요, 두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께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라반을 보라. 야곱에게 끝까지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돌아보신 결과가 아닌가? 나의 소유권을 내려놓고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사족: 증거의 돌무더기는 언젠가는 무너져야 할 것이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도 둘무더기가 쌓여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분명히 무너뜨리신 것 같은데 다시 더 높은 담을 쌓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평하기 위해서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한다. 당연히 교회가 손해를 감수하면서. 선교지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의 마음과 다르게 왜 파송하는 교회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교적으로 대하지 못할까? 교회가 먼저 담을 낮춰야 한다. 허물어야 한다.

 

창세기 31:17-35

야곱은 바로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에 태우고 밧단 아람에서 모은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아버지 이삭에게로 몰래 출발한다. 이때 라헬이 라반의 우상 드라빔을 훔쳐 떠났다. 야곱이 떠난지 삼일만에 라반은 야곱이 도망한 것을 알았다. 라반은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야곱일행을 따라잡았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라반이 길르앗 산에서 야곱과 장막을 친후 야곱에게 왜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느냐고 묻는다. (야곱에게 팔아 먹어놓고는…) 환송식을 거창하게 해 줄 것인데 왜 자기에게 알리지 않고 도망갔느냐고 묻는다. (번번히 야곱을 잡았으면서도…) 그리고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춤을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게 했다며 야곱을 어리석다고 책망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라반은 형제들과 야곱을 해할 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지만 야곱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말을 전한다.

라반은 이제 자신의 우상 드라빔으로 화제를 바꾼다. 야곱이 돌아가는 것은 옳지만 왜 라반의 신을 도둑질 했느냐고 묻는다. 야곱은 먼저 라반에게   외삼촌이 딸들을 억지로 빼앗을까봐 두려워서 몰래 떠났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도둑질 한 것을 모르는 야곱은 당당하게 드라빔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라반은 라헬의 거짓말에 결국 드라빔을 찾아내지 못한다.

// 야곱의 양떼와 라반의 아들들의 양떼는 사흘길 떨어져 있어서 라반은 야곱이 떠났는지 곧바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라헬이 훔친 드라빔을 찾다가 그제서야 야곱이 도망친 것을 알았을 수 도 있겠다. 라반은 처음에는 심판자로 야곱을 쫓아갔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시는 분은,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라반에게 심판자의 권위를 주시지 않으셨다. 라반은 이제 우상 드라빔만 찾으려고 했다. 하나님을 만났으면 우상에 대한 미련을 버릴만도 했을 것인데 라반은 결국 강을 건너지 못했다. 라반도 라헬도 밧단 아람으로 야곱을 보내오게 한 것이 자신들의 드라빔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야곱과 함께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에게 ‘네  하나님’ 대신 ‘너희 아버지(이삭)의 하나님’ 이라는 표현을 썼다. 거짓과 술수의 드라빔에 사로잡혀  참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본다. 이것이 다 야곱이 자신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거짓과 술수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을 환영하지만 여전히 거짓과 속임수로 살아가는 이유도 교회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라반의 드라빔은 지금도 어디선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거짓을 속삭인다.

사족: 매일 성경을 읽는 것도, 찬양도, 기도도 성도에게 드라빔이 될 수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 곧 임마누엘이다. 가난해도, 애통해도, 분노가 치밀 때도 온유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해도, 긍휼히 여겨야 하고, 마음이 청결해야 하고, 화평해야 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아도 하나님과 함께 함이 복이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성도가 보기에도 세상이 성도를 보기에도 심히 아름답다.

창세기 31:1-16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를 닮아 촉이 좋은 모양이다.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치면서 치부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라반도 자기의 술수가 먹히지 않자 야곱을 보는 안색이 바뀌었다.

때가 된 모양이다. 주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신다. 주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야곱과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

야곱은 도청할 수 없는 들에 레아와 라헬을 불러 하나님께서 벧엘의 서원대로 이곳을 떠나 야곱의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라헬과 레아도 아버지 라반에게 상속받을 것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취하게 하신 재물이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기 때문에 야곱에게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말씀에 순종하라고 대답했다. 라헬과 레아도 야곱의 순종에 동참하겠다는 뜻이다.

// 오늘 되씹게 되는 말씀은 9절이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여기서 빼앗았다는 것은 훔쳤다는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니라 취해서 옮겼다라는 뜻이 강하다. 심지어 구원하다(건져내다)는 뜻으로 많이 쓰였다. 하여간 하나님의 성품에 훔쳤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어색하지만 포인트는 한사람의 치부는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의 복을 간구하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어도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아 달라는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라반의 가축을 빼앗아 야곱에게 주셨어도, 라반이 가난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야곱이 자기 집을 세울 정도로 부자가 되자 라반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오늘날 가진 자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다.

하나님께서 라반의 재물을 야곱과 공평하게 나누셨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성도들도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내가 좀 더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좀 더 나누라고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강제로라도 내것을 나누게 하실 때 라반의 입장만 되어 안색을 바꿀 이유가 없다. 야곱이 되어 나의 모든 재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에 감사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눠야 한다. 앞에서 사용한 공평은 ‘똑같이’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다.

// 공동체의 화목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나에게 주신 말씀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말씀을 야곱처럼 가족들에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잘 설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수 있도록 … 하나님 아는 것 대신 다른 것들로 갈라진 한국교회에 꼭 필요하다.

창세기 30:25-43

라헬이 요셉을 낳았다. 첫 칠년 후 야곱이 레아 사이에서 르우벤을 낳고 연년생으로 유다까지 낳았다면 4년, 라헬의 종 빌하가 연년생으로 둘을 낳았다면  적어도 2년,  레아의 종 실바가 둘을 낳는 동안  또2년 그리고 레아가 아들 둘과 디나를 낳기 위해서도 적어도 3년의 세월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라헬이 요셉을 낳았으니 또 적어도 1년정도의 세월이 지났다. 충첩되는 기간이 있어도 두번째 칠년이 지난지 꽤 되었을 것이다.

야곱은 자녀가 동서남북으로 많아질 것이라는 언약의 절반을 성취했다. 이제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남았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에게  처자를 데리고 나의 땅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라반에게 야곱은 복의 통로였다. 라반은 야곱을 잡았다. 그래서 다시 품삯을 놓고 거래를 했다. 빈털털이로 고향을 도망치듯 나와야 했던 야곱은 이 계약을 자신의 집을 세우는 기회로 삼았다. 그래서 양떼 중 아롱진 것과 점있는 것과 검은 것만 자신이 품삯으로 취하고 나머지는 라반 외삼촌 몫이라고 계약한다. 라반은 옳다구나 하면서 계약을 받아들인다. 라반이 먼저 술수를 쓴다. 아롱지고 점있고 검은 것들을 미리 가려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고 나머지 양들만 야곱에게 맡기고 두 양떼가 섞이지 않도록 사흘길이나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건강한 양들이 얼룩지고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게 하는 비책이 있었다. 야곱은 매우 번창하게되었다. 야곱은 이렇게 많은 노비와 낙타와 나귀를 거느리는 자기 집을 세웠다.

// 야곱이 축산 전문가였나?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치면서부터 라반의 적은 소유는 번성해졌다. 라반은 이런 야곱을 놓치기 싫어 새로운 계약서를 내밀었고, 축산 전문가 야곱은 라반이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내 걸었다. 그러나 야곱이 축산 전문가라서 이런 조건을 내 건 것이 아니라, 아들 열 하나와 딸 하나를 낳으면서 출산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고, 벧엘 언약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가지가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이 이들 나무가지들을 보면서 벧엘 언약을 기억하는 방편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벧엘의 원래 이름 루스와 살구나무 히브리어 단어 루즈는 같은 단어로 보인다.)

개인적인 야곱의 비책은 나무가지들은 야곱의 축산경험에서 나온 노하우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으로 인해 벧엘 언약을 잊어버리고 자꾸 밧단 아람에 눌어 앉게 되는 자신을 경계하고 벧엘 언약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평안히 가고자 하는 야곱의 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야곱은 이제까지 자신을 지탱해왔던 거짓과 술수를 내려놓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자기 집을 세우고자 했다.

시편 127편의 시인은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라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고 노래한다. 자식이 화살 통에 가득한 용사는 복이 있다고 노래한다. (에서를 만났을 때) 부끄러움을 당치 않도록  하시는 주님. 이렇게 읽으면 완전 야곱의 노래다.

사람들은 자꾸 야곱의 번창에만 관심이 있다. 늙어서도 언약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믿음으로 새로 시작한 야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창세기 30:1-24

라헬은 레아가 쑥쑥 아들을 낳는데 자신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언니 레아를 시기한다. 라헬은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고 바가지를 긁었다. 야곱은 라헬에게 라헬을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라헬은 여종 빌하를 씨받이로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을 얻어 아들을 낳아 키우겠다고 한다. 야곱은 빌하에게서 아들을 낳았고 라헬은 단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빌하는 둘째를 낳았고 라헬은 납달리라고 불렀다. 이제 곧 레아를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출산이 멈춘 레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기의 시녀 실바를 씨받이로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했다. 실바도 야곱에게서 갓과 아셀을 낳았다.

어느날 르우벤이 합환채를 얻어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다. 이것을 본 라헬이 레아에게 야곱과의 동침권을 팔아 합환채를 샀다. 그날 밤 야곱이 레아와 동침하였고 하나님은 레아의 태를 다시 여셨다. 잇사갈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레아가 잇사갈을 낳자 야곱은 또다시 레아를 찾았다. 야곱은 열심히 자손을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언약의 전반부를 기억한 것일까?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스블론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레아는 여섯아들로 만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덤으로 딸 디나까지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라헬을 생각하시고 라헬의 태를 여셨다. 라헬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하나님께서 내 부끄러움을 씼으셨다는 뜻에서 이름을 요셉이라고 불렀다. 라헬은 하나님께 아들을 더 달라고 간구했다.

// 야곱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라헬에게 출산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사람의 꾀를 버리지 못했다. 라헬의 종 빌하에게서 낳은 단과 납달리의 이름은 다툼과 경쟁이라는 뜻이다. 이에 질세라 레아도 자신의 종을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두 아들을 낳는다. 갓과 아셀의 이름은 복과 기쁨과 연관된 단어다. 부모들의 이런 시기 질투 미움 다툼은 자녀들에게도 미친다. 르우벤이 들에서 합한채를 가져다 어머니 레아에게 주었다. 합환채는 성욕을 자극하는 풀일수도 있고 임신이 잘되게 하는 풀일 수도 있다. 라헬이 동침권으로 합환채를 산 것인지 레아가 합환채를 미끼로 동침권을 산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각자의 종을 야곱에게 주는 것도 모자라 민간요법까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모든 일에 야곱은 침묵한다. 출산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욕을 따르는 모습을 본다. 레아는 합환채를 내준 보상으로 잇사갈을 얻었다고 이름을 지었고 여섯째 스블론을 낳고는 만족한다. 그리고 딸 디나를 낳자 출산경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뒀다고 자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다른 반전을 이끌어 내신다. 라헬이 요셉을 낳은 것이다. 합환채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라헬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합환채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태를 여셨다는 것을 안 라헬은 그제서야 하나님께 아이를 간구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라헬의 계획대로 움직이시지는 않으신다.

계획은 사람이 하는 것 같아도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어느새 야곱의 아들이 열 하나가 되었다. 야곱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화목이 깨어진 가족. 하나님은 함께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출산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성을 낸들, 하나님께서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다고 고백한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 정욕을 따르는 우리들을 그대로 반영한다. 임마누엘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