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0-17

10절 상반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는  로마서 12장 1절 상반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 권하노니’를 떠올리게 한다. 로마서 12장 1절 하반절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권면하는 10절 하반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는 성도들이 마땅히 드릴 합리적인 (영적) 예배의 구체적인 예로써 부족함이 없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바울은 고린도 교회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소식에, 분쟁이 없기를 바라면서 편지를 쓴다. 교회 내의 분쟁은 복음전파에 방해가 되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한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말과 마음과 뜻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내 말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과 내 마음이 아닌 성령께서 부어주신 마음과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 한다.

나를 버리지 않으면 적용할 수 없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과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뜻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 결과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다. 바울은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에 방해된다면 세례 베푸는 권세도 내려 놓았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에 촛점을 맞춘다. 형식 (예식) 보다 내용을 붙든다.

고린도전서 1:1-9

고린도전서 1:1-9
발신자는 바울과 ‘소스데네’다. 소스데네는 고린도의 회당장이었던 그 소스데네일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지도자로 섬길 수 있었을 것인데 바울을 따라 나섰다. 기득권을 통해 한자리 하겠다는 것을 내려놓았다. 자리가 아니라 일이 중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소스데네가 바울이 구술한 것을 받아 적었다면 소스데네는 고린도 방언을 섞어가며 구수하게 받아적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수신자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구분된’ 성도라고 부른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거룩하게 구별된다. 거룩하게 구별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어야 거룩하다 인정함을 받는다.


고린도전서는 내우외한에서 내우에 관한 편지로 알려져 있다. 교회의 문제가 외환, 곧 박해나 외부에서 몰래 들어 온 가르침이 아니라 내적 문제로 신음하고 있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께 감사로 편지를 시작한다.


감사제목은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말씀과 지식에 풍성하여 그리스도의 증거가 성도들 가운데 견고하고, 은사에 부족함이 없고 예수의 재림을 소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시 ‘예수 안에서’가 감사의 주된 이유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성도들이 예수의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기를 간구한다. 이것이 미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미쁘신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이야말로 성도들을 모든 내우외환으로부터 회복되는 첫걸음이자 끝날까지 견고하게 지켜야 할 성도의 본분이다.

하박국 3

화가 있도다. 화가 있도다. 화가 있도다. 2장 하반부에서 화가 있다는 주하나님의 뜻을 들은 하박국은 시기오놋에 (슬픈가락에)  맞춰 기도한다.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지기를 바란다.하박국은 주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이 속히 이뤄지기를 간구한다. 그리고 주하나님의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3-16절은 속히 이루어지길 바라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하고 17-18절은 진노중에라도 임할 긍휼을 노래한다. 하박국은 주하나님께 피해 편히 쉬고 새힘을 얻은 ‘아침의 사슴’ 곡조로 노래를 (묵시를) 마친다.

>>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나의 힘이 되신 주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소유됨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하루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하박국 2:12-20

화가 있을 것이다.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들아. 주하나님께서 민족들이 고생해서 세운 탑을 불태워 버릴것이요, 나라들이 한 일을 헛수고요 피곤만 부르는 일이 되게 하실 것이다. 대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주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하신다.

화가 있을 것이다. 이웃에게 술을 주고 이웃이 술에 취해 수치를 모르는 행동을 하게 하는 자들아. 주하나님은 이들 자신도 술에 취해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도 수치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하신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런 사람들을,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그런 짓을 행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짓을 행하는 남들을 옳다고 부추기는 자들이라고 한다.) 이런 자들에게 돌아올 것은 하나님의 진노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면 그들의 영광은 가려지고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주님의 ‘욕’만 돌아올 것이다. 그들의 레바논에 강포를 행해서 영광을 얻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주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짐승과 사람의 피를 흘리며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그대로 갚으시겠다고 하신다.

화가 있을 것이다. 목석의 우상을 섬기는 자들아. 그들이 섬기는 신은 그들이 손으로 새기고 금과 은을 부어 만든  우상으로 거짓되고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신다. 목석의 우상에게 깨어나라고 한들 우상은 말하지 못한다고 하신다. 생기가 없어 죽은 우상이 무슨 말을 하겠으며 무슨 교훈을 베풀겠느냐고 반문하신다. “오직 주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 지니라.”라고 선언하신다. 곧 경배의 대상은 오직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집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경성한 파숫꾼이 복이있다. 이웃에게 진실과 행함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경청하는 자가 복이있다.

하박국 2:2-11

(하박국의 항변에 주하나님께서 대답하신다.) 이 묵시를 기록하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시인성이 좋게 판에 새기라고 하신다. 주하나님이 말씀하신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 정한 때는 심판의 때요 거짓되지 않고 속히 이를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비록 더딜지 몰라도 기다리면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한다고 하신다.

주하나님께서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신다. 마음이 교만한 ‘그’는 누구인가? 아마도 당시 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왕이 없는 것처럼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을 지칭할 수도 있겠다. 혹은 지금 심판의 도구로사용되지만 강포가 지나쳐 범죄한 갈대아 사람들을 대표할 수도 있다. 의인은 이와 반대되는 사람이다. 주하나님께서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신다.

의인이 아닌 사람의 특징을 열거하신다. 술을 즐긴다. 거짓된다. 교만하여 무저갱의 지옥처럼 끝없이 자기 욕심을 부린다. 죽은 자와 다름 없다.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탐욕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끼리끼리 논다. 그러나 자기들끼리 다음과 같이 서로 평론하며 조롱하고 저주를 퍼붓는 사이가 된다. [자기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탐욕에 사로잡혀 우울증에 빠진 자여, 더 강한 자가 갑자기 일어나 너에 갑질하지 않겠느냐, 네가 여러나라를 노략한 것같이 노략당할 것이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피를 흘린 자여,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자여] 라며 자기들끼리 저주하고 조롱한다.

주하나님은 이들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 높은 데 깃들이려 하지만 (바벨탑을 쌓아보지만), 재앙을 피하기 위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만 다 저주를 부르는 행위라고 하신다. 자기만 살려고 남을 짓밟고 또 위로 올라가기 위해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영혼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혼에게 죄를 범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도자의 깨달음 처럼 (전 7:29)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사람의 꾀를 따른다는 뜻이리라.

** 담벼락의 돌들, 집의 들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길거리의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하셨다.

>>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알라고 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은 정한 때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을 말미암아 산다고 밑줄 쫙 그어야 한다. 의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의인은 자칭 신앙적인 사람을 지칭하지 않는다. 세상에서도 칭찬받는 성품과 행실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켜 신뢰를 얻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신뢰를 얻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견고하고 확실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나의 꾀’를 따라 나의 영혼에 범죄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잣대로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살라고 하신다. 터가 무너진 세상에서 오늘도 하나님은 ‘나의’ 믿음을 요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