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0 (1-9)

열두지파에 대한 기업분배가 끝났다. 주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모세에게 명령한 도피성을 정하라고 말씀하신다.

도피성은 (3절)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그곳으로 피하게 하여,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을 피하는 곳이다. 도피성에 도피하는 자는 도피성 문 어귀에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사건을 보고해야 하고 그 성읍은 그를 받아들여 거주하게 해야 한다. 복수를 하려는 사람이 찾아와도 살인자를 복수하려는 사람에게 내주어서는 안된다.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살인을 했기 때문이다.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아 실수가 확인되면 도피성에 머물러 살수 있었다. 오직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어야 자기가 속한 성읍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피성으로 요단 서쪽에 세곳과 (납달리 산지 갈릴리 게데스, 에브라임 산지 세겜, 유다 산지 헤브론)과 요단 동쪽에 세곳을 (르우벤 평지 베셀, 갓 지파 길르앗 라못, 므낫세 지파 바산골란) 구별하여 정했다. 도피성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되었다고 사관은 분명히 기록한다.

// 도피성은 이스라엘 자손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만큼 모든 생명은 귀한 것이다. 도피성에 피난 온 살인자는 두번 재판을 받는다. 첫번째로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 도피성 성읍의 장로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아마 장로들의 판단은 긴박한 가운데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피성으로 피난 온 살인자는 두번째로 회중의 재판도 받아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합당하지 않은 살인자에게는 살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이처럼 도피성은 재판을 (심판을) 면제받는 곳이 아니다. 일정기간 생명을 보존하는 곳이다. 음~~. 도피성보다 나은 곳이 있다.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치는 바울이 성도들에게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분명히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자녀)로 사는 것이다.

성도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자들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 성도가 된다. 믿음으로는 법없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이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도피성에도 ‘믿음의 법’이 있다.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한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여호수아 19:24-51

다섯째로 아셀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뽑아 땅을 분배 받았다. (24-31) 여섯째로 납달리 자손이 그 가족대로 제비뽑아 땅을 분배 받았다. (32-39) 마지막 일곱째로 단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뽑아 기업을 받았다.(40-48) 사관은 단 자손이 레셈과 싸워 점령해서 기업, 곧 땅의 경계를 확장했다고 토를 단다. // 단 자손의 경계가 확장 되었다는 구절을 (47절) 통해 기업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두지파 사이에서 매매하거나 빼앗는 것은 안되지만 차지하지 못한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쳤다. 그런데 사관은 이스라엘 자손이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따로 기업을 주었다고 추가한다. 여호수아 역시 주하나님의 명령(약속)대로 에브라함 산지 딤낫 세라를 요구했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 땅을 여호수아에게 주었다. 여호수아는 딤낫 세라에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했다.

14장 길갈에서부터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땅을 분배하기 시작하여 19장에서 드디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주하나님 앞에서 땅을 나누는 일을 마쳤다.

// 눈의 아들 여호수아도 갈렙처럼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요구해서 차지한다. 헤브론 산지처럼 험했는지 그곳 사람들이 아낙자손처럼 컸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여호수아 역시 (살기힘든?) 산지를 배정받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땅을 분배한 여호수아가 스스로 자기 몫의 땅을 분배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에게 기업으로 주었다는 기록이 인상적이다. 지도자는 자신의 욕심을 챙겨서는 안된다. 딤낫 세라. 구체적인 지명이 있고 여호수아가 성읍을 건설하고 살았다고 기록하지만 분명 큰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땅 배정이 갈렙에서 시작하여 여호수아에게서 끝났다는 것도 흥미롭다. 사관은 제비뽑기가 아닌 약속으로 기업을 얻은 이야기로 기업분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하나님나라가 그렇다. 모든 것이 예정되어있지만 (예정? 뭔지 모르고 적은 단어)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내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나라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상’이라는 것이 바로 임마누엘이다. 영생이다. 성도의 기업이다.

여호수아 19:1-23

남은 일곱지파 중 두번째로 시므온 자손이 가족대로 제비를 뽑아 기업을 받았다. 시므온은 유다자손의 기업 중에서 (아마도 유다자손이 아직까지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 아닐까?) 분배받았다. 사관은 시므온 자손이 유다 자손의 기업중에서 분배받은 이유를 유다 자손의 분깃이 유다 자손들에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세번째로 스블론 자손이 가족대로 제비를 뽑아 기업을 분배 받았다. 네번째로는 잇사갈 자손이 분배받았다. (많은 지역가운데 유독 ‘수넴’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주하나님의 순서을 기다려야 하지만 약속에 따라 한지파 한지파 기업을 받는다.

// 기업은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공유되고 나누는 것은 허락되었나보다.  아니 공유하고 나눠야 한다. 사관은 시므온이 유다 자손들에게 분배된 땅을 받은 이유가 유다 자손들의 분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갈렙처럼 제비뽑은 기업 외에 약속에 따라 적극적으로 점령해서 분배받은 땅이 추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아진 시므온 자손들은 유다 자손의 도움아래 땅을 분배받았으나, 역시 최종적으로 점령하는 것은 저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역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곧  구원의 은혜는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공유되고 나누는 것은 허락되었다. 아니 (넘치게 받은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나눠야 한다. 전도와 선교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구원의 은혜는 공유되고 나누어지지만, 받은 사람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열매 맺는다. 하늘의 시민권을 누리는 것은 시민권 유무가 아니라 시민권을 행사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지 않는다면 ‘성도’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타이틀이 무슨 의미랴!

여호수아 18:11-28

일곱 지파에 대한 기업이 분배된다. 먼저 베냐민 지파가 가족대로 제비뽑은 땅을 열거하는데 땅의 경계가 유다와 요셉자손 사이다. // (가장 강력한) 유다와 요셉자손 사이의 땅을 (가장 약한) 베냐민 자손에게 배정한 것은 외침으로부터 베냐민을 보호하시려는 주하나님의 배려가 아닐까? 또 주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요셉 (에브라임) 사이의 주도권 다툼에서 베냐민을 일종의 비무장지대로 사용하시고자 하신듯. 이스라엘의 첫왕 사울이 베냐민 자손인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베냐민이 가족대로 받은 성읍들의 이름 중 가장 인상적인 성읍은 역시 예루살렘이다. // 여부스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은 유다 자손인 다윗때에야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된다. 여부스의 예루살렘이 다윗성이 됨으로써 베냐민은 결국 예루살렘을 기업으로 받았을 것이나 무게 중심이 요셉과 유다의 중간에서 유다편으로 기울게 되었을 것이다.

// 주하나님은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을 배려하셔서 유다와 요셉 자손 사이의 땅을 분배받게 해 주셨다. 그러나 땅을 점령해야 하는 것은 베냐민 몫이다. 배려받았다고 그땅을 그냥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땅 사람을 쫓아내시겠다는 주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땅을 점령해야 했다. 주하나님은 베냐민 자손 중에서 이스라엘 첫 왕이 나오도록 배려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분배받은 땅을 온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왕임에도 불구하고 주하나님이 배정하신 땅을 점령해야 한다는 역사의식이 없었던 것일까?) 하여간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자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내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고 온전히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온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모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고후 10:5,6 새번역)

내가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여호수아 18:1-10

회막이 길갈에서 실로로 옮겨졌다. 분명 길갈에서 제비뽑아 땅을 분배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14:6) 땅분배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여간 가나안 대부분의 땅이 정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일곱지파였다. 열두지파중 르우벤, 갓, 동편 므낫세 반지파, 유다, 에브라임, 서편 므낫세 반지파에게만 땅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졌다.

여호수아는 일곱지파에게 주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언제까지 지체하겠느냐고 책망한다. 그리고 각 지파에 세사람씩 선정해서 가나안 땅을 두루다니며 땅을 그려오라고 명했다. 요단 서편에서 유다와 요셉 자손이 차지한 땅을 제외한 부분을 일곱부분으로 나눠 일곱지파에게 제비뽑아 분배하겠다고 한다. 다시한번 레위지파는 기업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땅이 아니라 제사장 직분이 레위사람들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한다.

각지파별로 세명씩 요단 서편 땅을 두루다니며 분배받을 땅을 그려, 일곱부분으로 나눈다음 실로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돌아왔다. 여호수아는 실로의 주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아 이스라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했다.

// 일곱지파에 대한 땅분배에 대한 서론이다.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이 길갈에서 실로로 옮겼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자신이 속한 에브라임지파가 분배받은 땅의 중앙인 실로로 회막을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절반이 넘는 일곱지파가 땅을 분배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말이 분배지 가나안 땅은 (약속에 따라) 점령해야 할 땅이었고 일곱지파에게는 변방지역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또 지파들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아마도 두려움이 컸던 모양이다. 저들에게는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에서 벌인 무수한 승전의 경험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은 과거의 경험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가나안 정탐때는 각 지파별로 한명씩 열두명이 나갔다. (보통 2인 1조가 아닌가?) 이번에는 각 지파별로 세명씩 내보낸다. 그만큼 가나안 점령에 대한 강한 의지와 긴박성이 엿보인다. 사실 가나안 점령은 주하나님을 따라가는 전쟁이었다. 주님이 앞서 가셔서 가난안 족속을 쫓아내시면 (물론 이스라엘의 심판의 칼로 사용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따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앞서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을 차지하라고 주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주하나님께서 저들을 쫓아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늘도 앞장서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 살라고 하신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우리의 발걸음을 잡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을 푯대로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면 푯대를 놓치게 된다. 신앙의 미아가 된다.

레위지파에게는 다시한번 땅이 아니라, 이번에는 제사장 직분이 기업이라고 하신다. 땅이 아니라 제사장 직분이 기업이다. 직분이 기업이라는 것은 직분을 살아내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