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3 (1-13)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을 자신들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편지하는 바울은 참다 못하여 편지 발신인인 바울과 실루아노 둘만 아덴에 머물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어 데살로니가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원한다고 썼다. 디모데를 보내기까지 데살로니가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위로하는 목적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여러 환난 중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들이 교회가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세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을 때에 이미 장차 받을 환난에 대해 가르쳤다. 그리고 이제 그 환난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알듯이 닥친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어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르침을 따라 믿음에 굳게 서있는지 알고자 한다고 편지한다. 환난에 자신들의 가르침이 헛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디모데들 보내는 것이다.

지금 함께 있는 디모데가 바울일행에게 합류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도 바울 일행은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도 바울에게 전해 주었다. 이때 궁핍과 환난가운데 있었던 바울일행은 디모데가 가지고 온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식에 큰 위로를 받았다고 편지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안에 굳게 서있기 때문에 바울일행도 살것이라고 담대히 말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든든히 서간다는 디모데가 전해준 소식에 바울일행은 기뻐하고 기뻐하고 기뻐했다. 이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드렸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감사하고 감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만나 교제할 수 있기를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를 주님께 간구하고 있다고 편지한다. 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 데살로니가 교회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편지한다. 자신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함과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도 피차간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넘치도록 기도한다. 무엇보다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음을 굳건하게 해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기를 기도한다.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라고 편지한다. 완전한 성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의 한 부분이 굳게 서지 못하면 다른 지체도 굳게 서지 못한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교회의 파행은 우리를 죽이고 있다. 물론 나의 경건하지 못함도 또다른 우리를 죽이고 있을지 모른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를 바라는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 모든 궁핍과 환난가운데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으로 위로 받은 바울일행. 가르치는 자들은 가르침을 받는 자의 믿음으로 위로를 받는다.  가르치는 자들에게도 궁핍과 환난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각양각색의) 궁핍과 환난 가운데 처한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니 대적할 자가 없는 것이다. 이 임마누엘을 누리게 하소서. 믿음의 성도들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을 누리게 하소서.

//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요약한다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를 굳건히 하고 사랑의 수고를 넘치게 하고 소망의 인내를 끝까지 경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해서 교제하기를 기도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13-20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일행이 방문하여 어머니같은 사랑과 아버지 같은 훈계로 세운 교회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도 거룩하고 옳고 흠없는 권면과 위로와 경계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보여주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래서 (이러므로) 바울은 편지 초반부 내내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일행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증거가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장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로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는 현장이다. // 만약 지금 나의 성장이 멈추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고 있지는 않은지 자성해야 한다.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라고 하여서 평안한 것은 아니었다.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는 곳에는 고난이 있다.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동족 유대인으로 부터 고난을 받음과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도 동일한 고난, 즉 동족에게 고난을 받고 있었다. 바울은 유대인의 잘못을 지적한다.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복음의 일꾼들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였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방인들에게도) 대적이 되어 바울 일행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이방인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죄와 진노를 샀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나야 했다. 그렇지만 몸은 (얼굴은) 떠나가야했지만 마음은 아니었다고 편지한다. 지금도 얼굴 보기를 힘쓰고 있다고 편지한다. 사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려는 계획을 (한두번) 세웠지만 번번히 사탄에 의해 막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일행의 자랑거리요 면류관이요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밝힌다. 바울일행이 울며 뿌린 말씀의 씨가 데살로니가 교회로 열매맺은 것이다.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자신들이 추수꾼이 되어 거두는 것은 아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지체로 자신들과 함께 지어져 가고 있음을 자신들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한다. // 형제의 신앙성장은 곧 나의 성장이기도 하다.

 

데살로니가전서 2:1-12

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들어가 가르친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1장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기억한다고 썼다. 바울일행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능욕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힘입어 데살로니가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지금 수신자인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열매라고 한다.

바울은 편지를 하는 이유를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동기 혹은 속임수가  아니라고 먼저 밝힌다. 대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신 일이라고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미 바울일행이 아첨이나 탐심의 탈을 쓰고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이 아첨이나 탐심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신다고 편지한다. 바울은 자신들은 일관되게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다고 말한다.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사도이나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는 대신 온유한 어머니가 자녀을 양육하듯 일했다고 강조한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해서 단순히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한다고 말한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신들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신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하듯이 자신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한 수고와 애씀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편지한다.

바울은 자신들의 사역을 첫번재로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었다’라고 평가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증거, 그 증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도 증인이 되신다고, 하나님도 알고계신다고 편지한다. 바울은 두번째로 자신들의 사역을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는 권면과 위로와 경계’ 였다고 평가한다.  바울은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과 위로와 경계로 가르쳤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친히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게) 행하게 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요약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일행의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훈계로 세워졌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일행이 떠난 후에도) 그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훈계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합당하게 (하나님의 잣대에 맞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게 행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 (1-10)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편지한다. 수신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다. 바울서신 특유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로 문안한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한다고 편지를 시작한다. 세부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기억한다고 적는다. 기억하는 이유를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들의 모임이요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교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택함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이 전해 받은 복음을 이론적으로만 배운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실천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스스로가 아는 바와 같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주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엇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된 것을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도 본받았다고 편지한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주의 말씀이 전해졌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증거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씀을 가르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가르침에 따라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원의 주로 하늘로부터 다시 강림하실 것을 어떻게 기다리는 지에 대한 믿음의 소식을 들었다고 편지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임마누엘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말씀에 따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죽으시고 부활신 구세주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을 기대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시편 126 (1-6)

시인은 예루살렘에서(시온에서)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들의 귀환에 ‘꿈인지 생신지’ 라고 노래한다. 그날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은 함박웃음을 지었으며 흥겨운 노래를 불렀다. 아마 감사의 찬양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포로귀환을 지켜보던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 계셔서 행하신 큰일에 놀라워 했다. 시인은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기쁨을 노래한다. 그리고 잡혀간 포로들이 사막에 물이 흐르듯 돌아오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의 노래를 한다. 그런데 시인은 왜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고 노래할까? 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고 노래할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 예레미야 선지자를 떠올리게 한다. 씨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시인은 예레미야 선지자들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거두어 들이신다 (성취하신다).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씨가 뿌려지지만 말씀 하시는 이는 주님이시요, 주님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그래서 시인은 독자들에게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라고 권면의 노래도 하는 것이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세상의 조롱과 핍박 속에서. 때로는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 들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씨를 뿌린 사람이 직접 단을 거두어 들이지 못할지라도 완전한 성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지체라면 (이 땅에서의 죽음도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일에 나도 속한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추수의 노랫소리를 흥겹게 부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순종의 삶이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러면 기쁨으로 약속을 받는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렵다. 눈물나는 일이다. 기쁨으로 거둘 소망이 없이는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노래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거두신 (성취하신) 말씀의 열매들을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