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5 (1-5)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당연히 흔들리지 않는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에워 감싸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원히 감싸(품어) 주신다. 하나님의 품안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든든하다. 시온 산, 하나님의 품은 곧 하나님나라다.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에게는 악인들의 통치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이 악한 일을 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에 시민권을 둔 시인을 하나님을 지켜주신다.

시인은 노래한다. 선한 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해 달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악인들은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이다. 악인들은 의인들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악인들끼리 몰려다닐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에게는 평강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2:20 공동번역)

시편 124 (1-8)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편에 계신(셨)다고 노래한다. 그것도 대적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 우리편에 계셨(신)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만에 하나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다면도 노래한다. 대적들의 노여움이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몸뿐만 아니라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고 한다. 홍수정도가 아니라 대형 쓰나미가 덮치듯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고 반복한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셨기 때문에 굶주린 사자의 입에서 우리가 살아났고 사냥꾼의 올무에서 놓임을 받았다고 노래한다. 내가 발버둥처서 올무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올무를 끊어주신 분이 있다고 한다. 시인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고 노래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편지했다.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편에도 계신다. 우리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실뿐 아니라 우리 영혼의 갈급함도 채워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편에 계신 이유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편지했던 것이다. 당시 로마성도들은 기록된 말씀처럼 (시 44:22)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도들이 넉넉히 이겼다는 것을. 시편기자도 노래했고 바울도 로마성도들에게 편지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편에 계셨(신)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우리 편에 계신다고.

임마누엘!

시편 123 (1-4)

시인은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시는 주를 향한다. 시인이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시는 주를 바라보는 이유는 단순히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인이 손으로 어디를/무엇을 가리키시는 지 주의 깊게 본다. 시인은 주인이 자신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손짓을 해 주시길 노래한다.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지금 심한 멸시가운데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고 교만한 자들의 멸시에 시인의 영혼은 주님의 은혜를 갈급한다.

/ /예수님은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생과 내세의 삶을 이야기로 말씀하셨다. (눅16) 시인은 마치 거지 나사로처럼 주님을 바라본다. 주님은 거지 나사로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신다. 이생에서 거지 나사로를 멸시한 부자는 지옥에서 물한방울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나 소용없었다. 주님이 손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키실 지, 혹은 왼쪽을 가리키실 지 두려움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 땅에서 한 부자로 (이름도 없다) 좋은 옷을 입고 호화롭게 파티를 즐기면서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멸시하면서 지낸다면 주님의 손은 염소들 편을 가리키실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들 편에서 멸시를 함께 받으면 우리 주님의 손은 양들 편을 가리키실 것이다.

시인은 멸시 가득한 이땅에 살면서도 하늘나라 백성으로 주님의 손을 바라본다. 온전한 성전을 바라보며 나아간다.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이 땅에서 심한 멸시를 받아도 눈을 하늘에 계시는 주님을 향하고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노래는.

시인은 하늘에 있는 온전한 성전을 바라보면서 이땅에서의 멸시를 인내로 노래해 낸다.

히브리서 13:18-25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히브리서 저자는 기도요청을 한다. 기도제목은 히브리서 저자와 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성부 하나님만 선하다고 하셨다. 결국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기도요청을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선한 양심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요청을 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돌아가 서로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성도의 교제도 중요한 기도제목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선한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분명히 한다. 이 평강의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로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한 (하나님의) 일에 온전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실 수 있게 하신다. 성도들이 더불어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신다. 그것도 영원토록. 이 모든 것을 (기도를)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아멘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을 위해서도 권면한다. 히브리서 본문에서 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당부한다.  투옥되었던 형제 디모데가 풀려난 소식을 전하면서 디모데를 만나 함께 방문하고 싶다고 전한다. 그리고 독자들의 지도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도 문안 인사를 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누군지는 모르지만 히브리서 저자와 함께 있는 ) 자들도 문안을 전해달라고 한다.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 지어다.

은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이 새언약에 따라 아무런 댓가 없이 주어졌다는 의미다. 저자는 이 약속에 대한 소망이 독자들에게 있기를 축복한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다.

//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믿음으로’를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함으로’라고 자주 바꿔 읽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고집스럽게 읽어 본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너무 자연스러웠다.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그대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예배다. 사랑과 선행이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는 것이고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된다. 첫언약의 종교적 육체의 예법에서 새언약의 마음의 예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첫언약의 율법을, 육체의 예법을 따르려는 경향이 강하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말씀을 죽은 문자로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복음도 바리새인처럼 외식함으로 지켜낼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해 주셨지만 그들이 고치지 못했던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을 따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새언약, 마음의 예법을 따르는 것은 정말 어렵다.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하는 ‘믿음으로’는 분명히 마음의 예법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삶이다.

매일매일 말씀앞에 나오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1세기 독자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은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오늘 우리(나)에게 새롭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래된 참고서가 아니다. 지금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읽기를 마치며)

 

 

히브리서 13:1-17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의 삶을 계속해서 설명한다.

  1. 형제를 사랑하라. 한번 두번이 아니라 계속 사랑하라고 명한다.
  2. 손님대접하기를 잊지 말아라. 손님중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대접하라고 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오는 손님뿐 아니라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약자인 자들을 찾아가 손님처럼 대접하라는 뜻이다.
  3. 갇힌 자,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것은 그들 편에 서라는 뜻이 강하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도 갇힌자요 몸을 가진자라고 설명한다.
  4. 모든 혼외성애는 음행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자족하라.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지키시는 주인은 돈이 아니라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6.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특별히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믿음으로 사는 구체적인 삶을 교훈하다가 히브리서 저자는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고백한다.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우리를 인도하던 자들의 최고봉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선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교훈에, 다른 복음에 끌리지 말라.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오직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첫 언약에 따른 음식 규정(육체의 예법)에 얽매이지 말라고 한다. 대신 마음의 예법, 새언약을 따르라고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있는 제단에서는 첫언약에 따라 제사드리는 사람들은 먹을 권한이 없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앞부분을 기억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이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이땅에서 첫언약에 따른 제사는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고 짐승의 몸은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린다. 새언약의 제사는 ‘큰’ 대제사장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의 보혈을 가지고 하늘에 있는 온전한 성전/성소로 들어가시고 자신의 몸은 단번에 온전한 제물로 성문 밖에서 드리셨다.

13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라고 편지했는데,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는 권면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즉 복음전파의 일꾼이 되자는 뜻이 아닐까?

하나님나라는 장차 올 나라다. 성도들이 성전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나라다. (그러나) 이땅에서도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영적 예배를 성부하나님께 드리는 나라다. 주님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이땅에서도 맛보는 (입술의 열매인) 나라가 하나님나라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신다. 다시말해 오직 선을 행함과 사로 나누어 주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한다.

(몇번째 적용인지 번호 붙이는 것을 도중에 잊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이중적으로 명령한다. 순종하고 복종하라. 여기서 지도자들은 영적 지도자들이다. 영혼을 돌보는 지도자들이다. 영혼을 돌보는 지도자들도 자신들이 어떻게 영혼을 돌보았는지 하나님께 보고할 때가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영적 지도자들이 괴로움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순종하라고 한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지도자들이 근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을 탄식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가르침의 핵심은 말씀이다.

길다. 하루종일 곱씹어야 할 내용이 너무 많다.

#혼외성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