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7:11-8:4

부부의 삶은 남편과 아내 누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7장 11-13절은 남자의 일터인 들이요 8장 1-3절은 친정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7장 11-13절은 남자의 일터인 들이라고 했지만 여자도 포도원에서 일하지 않았던가? 일터는 남자만의 영역이 아니라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곳이다. 아내는 들에서 오히려 남편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다. 그리고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가정에서는 오히려 남편의 보호를 받는다. 남편에게 안긴다. (바깥 일은 몰라라하고 집안에서 주장하지 않는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말해 남편과 아내는 일심동체 부부의 꿈을 꾸는 삶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꿈을 꾸는 동상이몽이 아니다. 남편은 일, 여자는 가사로 구분되어질 수 없다. ‘일은 일이고 사랑은 사랑이다’ 라고 구분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역할이 달라도 부부는 같은 꿈을 꿔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부부의 사랑이다.

세상은 부부의 사랑을 깨려고 한다.

 

아가 6:13-7:10

화자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 구절들이다. 남편의 아내 예찬에 무리들은 술람미 여자를 보고자 하나 남편은 단호하게 술람미 여자는 춤추는 무희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다시한번 여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이것은 오직 남편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남자는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 구나’ 라고 노래한다. 한 몸된 부부간의 사랑이다.

부부관계는 공개할 부분이 있고 입다물어야 할 부분이 있다. 성도의 간증도 마찬가지다. 임마누엘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함부로 보편화하고 남에게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무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술람미 여자의 외적 아름다움뿐이다. 그들에게 술람미 여자는 무희밖에 될 수 없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사랑아’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 구나”

 

아가 6:1-12

너의 임이 간 곳이 어디냐? 친구들이 함께 여자의 사랑을 찾겠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여자는 (아내는) 이미 알고있었다. 남자가 (남편이) 자기 일터(동산)에서 양 떼를 치며서 백합화를 꺾고 있다는 것을. 아내는 다시한번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라고 노래한다. 한몸임을 노래한다. 남편이 여전히 백합화 가운데서 맡겨진 양 떼를 먹이는 목자의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목자인 남편과 함께 함을 노래하는 것이다.

남편은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고 노래하는 아내에게 아내의 어여쁨과 고움과 당당함을 칭송하며 화답한다. 8절 왕비가 육십명이요 후궁이 팔십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난감. 그러나 마치 솔로몬 왕은 왕비와 후궁과 시녀가 많이 있지만 나는 한 명 아내로 만족한다고 솔로몬왕을 자신이 아닌 타자화 시키는 구절이라고 생각된다. (솔로몬이  자신을 오히려  술람미 여인화 하면서 노래하는 것이 아가서 전체의 분위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남자는 아내를 한껏 치겨세운다. 새벽처럼 밝고 보름달 처럼 환하고 해처럼 눈부시고 깃발을 앞세운 군대처럼 당당하다고.

11,12절의 화자는 번역에 따라 다르다. 남자가 되기도 (새번역) 하고 여자가 되기도(현대인의 성경)  한다. (원래 아가서에는 화자의 구분이 없다. 독자의 몫이다.) 남자라고 보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양떼를 돌보는 일과 들의 과목을 돌보는 목자의 일에 충실함을 노래한다. 그러면서도 그 마음에는 왕같은 자족함이 있음을 노래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어느덧 나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왕자들이 타는 병거에 올라앉아 있네”

삼위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리라. 주어진 일이 고귀한 일이 아니라 양떼와 과목을 돌보는 일일지라도 (고귀한 일이 따로 있을 순 없겠지만) 가정과 그 일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이 임금되신 하나님의 왕자(자녀)로 사는 길이다.

 

아가 5:2-16

새번역은 2절을 여자는 자고 있었지만 마음은 깨어 있었다고 한다. 꿈을 꾼다는 얘기다. 공동번역은 잠자리에 들었어도 정신은 말짱하다고 번역한다.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얘기다. 남편은 여전히 아내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라고 부르는고 있지만 아내는 (잠시) 공주병에 빠진다.

남편은 목자다. 아마도 밤 늦게까지 양떼를 돌보다 돌아왔을 것이다. 밤이슬을 맞으며 퇴근했다고난 할까? 때론 새벽이슬을 맞으면서. 세상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목자와 결혼을 한 아내지만 목자인 남편과의 삶은 고달플 수 있다. 삶의 고달픔이 여자로 하여금 잠시나마 헛된 꿈을 꾸게했을 것이다. 아내가 머뭇머뭇거리며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문을 열었으나 남편은 물러가서 그자리에 없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꿈이다. (남편의 성품상 기다리지 않을리 없기 때문이다.) 아내의 꿈은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에게 맞고 겉 옷을 빼앗끼는 수모로 결말을 맺는다. 목자와의 고달픈 삶 가운데 피어난 사랑이 아닌 성 안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은 사랑의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수치로 끝맺음을 여자는 꿈에서 깨닫는다. (세상 가치를 따라 살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다.) 여자는 남편을 사랑하므로 편안한 삶을 꿈꾸었지만 남편은 목자였다.

여자는 꿈에서 깨어 다시 남자를 본 모습을 본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자신과 한 몸이 된 남편의 사랑을 깨닫는다. 한 몸을 이루는 남자가 남편이라고 노래한다. 이 사람이 바로 내 사랑이요 나의 친구라고 노래를 맺는다.

// 주님은 헛된 꿈을 꾸는 성도와 함께 하실 수 없다. 주님은 말씀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세상 것들을 사랑하면서 함께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 주님을 끊임없이 알아가야 한다. 오늘날 섹스리스 부부에게 가정의 위기가 더 심하게  닥치듯 주님을 알아가는 것을 멈춘 성도도  신앙의 위기를 맞는 다는것을 명심해야 한다. 언제까지 오래전 간증을 우려 먹을 것인다. 오래전 함께 하셨던 주님은 오늘도 문두드리신다. 오늘의 간증을 써가기 위해. 그러나 헛된 꿈을 꾼다면 주님은 우리 곁에 없을 것이요 그 결국은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은 주님과의 섹스다.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아가 4:1-5:1

4장은 남자의 노래다. 신랑의 노래다. 목자라 신부도 양을 치면서 접하는 감정으로 노래한다. 신부를 흠없는 새끼 암양으로 노래한다. 신랑은 신부를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노래한다.

메시지 번역은 9절을 ‘사랑하는 이여, 그대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그대가 나를 보는 순간, 난 사랑에 빠졌어요. 그대의 눈길 한 번에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어요’라고 번역한다. 신랑이 신부를 보고 한눈에 반한 것이라는 것과 다르다. 신부의 눈길에 신랑이 반했다고 한다.

신랑은 신부될 여자를 항상 주목했을 것이다. 어쩌다 우연히 한번 마주쳤는데 그 때 한 눈에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쭉 주목하고 있는 여자가 자신에게 눈길 한번 준것에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다시말해 남자의 짝사랑이 여자의 눈길 한번으로 완전한 사랑으로 발전한 것이다. 남자는 여자도 자신을 사랑할 것을 눈길 한번으로 안 것이다.

5장 1절은 남자, 곧 신랑이 혼인잔치의 주인됨을 노래한다. ‘나’라는 표현이 매 단어에 붙는다. ‘내 누이’, ‘내 신부’, ‘내가’, ‘내 동산’, ‘나의 몰약’, ‘나의 꿀송이’, ‘내 포도주’, ‘내 우유’, ‘나의 친구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남자는 여자에게 한눈에 반한 것이 아니라 쭉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가 한번 눈길을 주자, 그 한눈에 여자를 사로잡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우리 주님이 그런 분이시다. 나를 주목하시고 계신다. 그리고 내가 주님께 눈길 한번 돌렸을 뿐인데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주셨다. 나로 하여금 주님의 신부가 되게 하셨고 주님의 신부로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시게 하신다. 나에게도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노래불러 주신다.

오늘도 흠없이 살아가야 할 이유다. 흠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햐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