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3

여자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는다. 사랑하는데 찾고 찾아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지금 옆에 없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성안 거리나 큰 길에서 찾았다는 것은 여자의 행동이 헛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남자는 목자이기 때문이다. 어떤면에서 여자는 남자가 목자보다 성안에서 인정 받는 자였으면 하는 헛된 꿈을 꿨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은 당연히 목자인 남자를 (잘) 알 수 없다. 그제서야 여자는 세상은 알아 주지 않으나 자신의 연인 남자를 만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세상은 사랑을 훼손하는 가치들로 가득하다.

프로포즈를 받은 여자는 잠시나마 꿈에 사랑의 이유를 세상적인 것에서 찾았던 것 같다. 이왕이면 키도 크고 잘생기고 대머리도 아니고 좋은 직장에 연봉도 많고… 막상 결혼을 앞두자 남자에 대한 사랑보다 자랑거리를 찾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사랑하는 남자를 보게되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남자를 왕으로 인정하게 하게 한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여자를 여왕으로 인정하게 할 것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이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한 신랑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이다. 모습만이 아니다. 멸시받고 버림받고 간고를 많이 겪어 우리의 질고를 아시는 분이시라고 한다.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신데 이땅에 흑수저로 나셨다. 사람들이 결코 귀히여기지 않았다. 이런분이 우리 신랑되신다. 신랑되신 예수님께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을 찾고 찾고 또 찾는가? 은혜와 평강밖에 무엇을 또 바란단 말인가? 잠시라도 한눈팔지 말자.

아가 2:8-17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안다. 마치 목자가 양을 알고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과 같다. 여자들은 특별히 남자의 목소리에 매료된다고 한다. 그리고 관심받기를 좋아한다.

연인이 프로포즈를 한다. “나의 사랑, 나의 님이여 일어나 함께 갑시다.” 힘든 시절은 지나고 새날이 왔다고 노래한다. 남자는 비둘리 소리, 비둘기로 우화되는 여인을 주목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남자는 여자와의 사랑이 꽃이 피고 열매 맺어가는 것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한다. 사랑이 허물어지는 것은 정말 작은데서 시작한다.

16절은 임마누엘의 그림자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여자는 노래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양떼를 돌아보듯 목자의 일을 일찍 마치고 돌아와 자신을 돌아봐 달라고.

‘너는 내꺼다’라고 말해도 ‘나는 네꺼다’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한몸을 이루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는 남자의 일방적인 이끔이 아니다. 남자를 위하여도 여자를 위하여도 아니다.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주님도 우리에게 소망을 두시고 일하신다.

아가 1:1-2:7

솔로몬의 아가. 노래중의 노래. 시. 펴자마자 어렵다.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 메시지에는 화자가 누구인지 구분하는 표시가 되어있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더 쉬운것은 아니다. 하여간 솔로몬이 저자라면 이 노래는 그가 지은 천다섯 편중의 (왕상 4:32) 제일가는 노래가 된다. 노래는 편지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려가야 하는데.

확실히 남자는 눈으로 사랑을 하나보다. (9,10,15) 이에 반하여 여자는 시각뿐만 아니라 오감으로 사랑을 한다. 남자는 여자만 보는데 여자는 자신도 본다. 남자는 사랑을 해도 양치는 일을 제대로 한다고 착각하나 여자는 사랑을 생각하느라 포도원지기 역할도 제대로 못했음을 고백한다.

주님이 나를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실까? 나는 주님의 어여쁘고 어여쁜 신부일까? 성도 (천사) 들은 나에게 믿음의 경주를 잘하고 있다고 금장 은장 훈장을 달아줄 준비를 하고 있을까? 그러면 나는 주님을 나의 깃발로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가? 주님이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을 안고 계심을 충만히 느끼고 있는가? 임마누엘에서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은 무엇인가?

// 일주일만에 돌아왔다.

마태복음 26:36-56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주님. 여덟명의 제자들은 여기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은 좀 더 데리고 가서 기도 하신다. 여덟은 기도를 할 줄 몰랐을까? 셋을 데리고 가신 이유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에 대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설까? 예수님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셋에게 함께 깨어 있어달라고 하시고 혼자 좀 더 나아가서 기도하셨다. 고민하여 죽게되었다는 죽음에 대한 고민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다. 예수님은 죽음 잔이 예수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렇지만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덧붙이셨다. 기도는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왔을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고 말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다. 기도조차 맘대로 하지 못하는 육신의 약함을 아셨을까. 예수님은 다시 성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셨다. 이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는 내뜻을 구하다가 주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할 힘을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오셨을 때도 그들은 자고 있었다. 예수님은 세번째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다. 순종할 힘을 받았다.
예수님은 돌아오셔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자가 팔리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 때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를 데리고 왔다.
아침에 삐끗한 허리가 온 몸을 불편하게 한다.
예수님은 순순히 잡히셨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고민하며 기도하셨을 때, 제자들도 예수님의 잡히시고 죽으심에 대한 기도를 드렸어야 했다. 성부하나님의 뜻을 구했어야 했다. 기도하지 못하고 육신의 피곤함에 따라 잤던 결과다. 나도 얼마나 자주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빠지는가?

마태복음 26:17-35

제자들은 예수님께 유월절 만찬을 어디서 할지 물었다. 예수님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유월절을 준비하였다. 마태는 성안 아무개가 누구였는지는 굳이 밝히지 않는다.

저물때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와 함께 만찬자리에 앉으셨다. 예수님은 식사중에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한사람 한사람 ‘나는 아니지요?’ 라고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함께 식사하는 그가 나를 팔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에 말씀대로 돌아가시겠지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면 좋을 뻔 했다고 하셨다. 예수를 팔기로 한 유다도 ‘나는 아니지요?’라고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하셨다. (이때까지도 다른 제자들은 눈치 못챈 것같다.)

예수님은 만찬자리에서 성찬을 베푸셨다. 유다도 성찬에 참여했을까? 성찬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가셨다. 이때 유다는 갈라졌을 것이다.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죽임을 당하고 양 떼는 흩어진다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하셨다. (복음의 중심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계신곳이 복음의 중심이다. )

베드로가 또 나선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셨는데 감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선언하신다. 베드로는 한번 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맹세했다.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도 나의 의지만으로는 안된다. 베드로의 실패를 보면서 깨닫는다.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