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yongs.kwon
마태복음 24:1-14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을 떠난다. 제자들이 성전을 돌아보았을 때은 ‘보라 너희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어찌 이 화려한? 성전이 황폐해 진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겼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대답)하신다.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공동번역)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마도 침묵가운데 감란산까지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란산에 도착하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는지 조용히 물었다. 제자들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는지도 물었다. (제자들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가 주가 임하시는 날이요 세상 끝이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았던 모양이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 제자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새번역처럼 주의 임하심을 다시 오실 주님으로 이해 했을까? 초대교회 독자들을 생각한다면 주의 재림이 확실해 보이지만 제자들의 당시 상황에서는 세상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주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세상 끝날에 대한 징조를 말씀하신다.
-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와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 전쟁 소식과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문
- 기근
- 지진
여기까지를 진통의 시작이라고 하신다. 제자들이나 세상사람들이 함께 겪는 고통이다.
- 환란
- 순교
- 박해
- 미움
-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
- 불법 (사랑이 식어짐)
다섯번째부터는 특별히 제자들에게 닥칠 징조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닥칠 징조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견디는 자가 받는 구원이 복음이다. 예수님은 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세상에 전파될 것이요 그때가 세상 끝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성전이 황폐하여 버려질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성전 건물에 압도되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성전 건물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은 화려함이 아니라 순종으로 지어가야 한다. 오늘날에도 화려하게 지어지는 그런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라 무너뜨려질 우상일 뿐이다. 세상 끝날에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나라는 환란 순교 박해 미움 거짓 목회자들의 가르침 불법을 견디고서야 온전히 임한다. 환란과 순교와 박해와 미움과 거짓 가르침과 불법은 믿음의 선배들에게만 해당되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성도들이 성령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할 이유다. 환란과 순교와 박해와 미움과 거짓 가르침과 불법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견디는 방법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수 밖에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성도들이 영화롭게 되는 길은 평안이 아니다.
마태복음 23:29-39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곱번째 (결론적으로) 화가 있다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은 저들이 선지자들을 죽였으면서도 선지자들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는 이중성에 대해 책망하신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은 선지자들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며 모든 책임을 조상들에게 덮어 씌운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발뺌이 곧 저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후손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저들에게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고 하신다. 연좌제는 아닐 것이고 아마도 조상의 길을 따라갈 것이라는 예언적 선언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조상들의 죄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하지만 결국) 너희 조상의 길을 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조상의 길을 가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 하신다. 34절은 좀 애매하다. 예수님이 보낸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이 누구인가? 미래형이 아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보낸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 중에 더러는 순교당하고 더러는 박해를 받는다고 한다. 미래에 닥칠 일처럼 여겨지는데 35절은 이 모든 핏값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돌아간다고 하신 것을 보면 현재형이다. 36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세대에 돌아가리라’ 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보아 구약 선지자들의 죽음과 (과거와) 앞으로 성도들의 순교까지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함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다. (헬라어 원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보호)를 원치 않는 모든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통치(보호)가 없는 집(나라)은 황폐하여 버리질 수 밖에 없다.
구체적인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 가 언제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그때까지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때까지 참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위선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신다. 예루살렘에 거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를 원하지 않는다면 위선자들과 다를게 전혀 없다.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를 원치 않는 것이 화다.
마태복음 23:13-28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대놓고 책망하신다.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예수님은 거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개종자 한 명을 찾다가 찾으면 오히려 자신들보다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한다고 책망하신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지옥자식이라고 하시는 것이요, 저들이 개종시키는 것도 지옥자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신다. 율법주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눈 먼 인도자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성전의 금에,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는 저들에게 성전(하나님의 이름)과 제사와 하나님이 성전의 금과 젯밥과 하늘보다 더 중요하다고 설파하신다. (오늘날로 따지면 화려한 예배당을 짓는데 더 관심이 있고 영적예배보다 기복에 더 관심있는 교회의 가르침을 책망하신 것이리라.)
거듭 거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부르시며 그들을 책망하신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보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하신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이신다. (그렇다고 버리지 말아야 할 것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강조하시는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가 아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이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무의미 하다.)
맹인 된 인도자여. 다시 한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눈 먼 인도자라고 하신다. 보지 못하는데 오히려 작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큼 낙타는 삼킨다고 하신다. 다시말해 자기욕심에 (탐욕에) 눈이 멀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익이 없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돈이 되는 낙타는 못본다는 핑계로 취했던 것이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라고 하는 셈이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눈이 멀었다는 것도 삼세번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을,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명하신다. 겉만 번지르하면 뭐하냐고 하신다.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방탕을 버리하고 하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예수님은 저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다. 겉은 번지르하나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다고 하신다.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행동을 하지만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지적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도다!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행위를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실리 없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마음을 청결히 하는 수 밖에 없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면 예수를 주로 모셔야만 한다.
마태복음 23:1-12
예수님은 더 이상의 논쟁 대신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모세의 가르침을 행하고 지키라고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 하시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는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신다고 일침을 가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세의 율법을 강제로 적용시키면서 자신들은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신다.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고 하신다. 이마와 팔에 성경구절을 큼지막하게 적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하고 (오늘날로 말하면 커다란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거나 성경암송카드를 들고다니는 것에 해당하겠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 한다고 꼬집으신다. 산상수훈의 자기상을 이미 받은 자에 대한 적용이다. 당연히 성부 하나님께 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선생님이라 불리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우리들의 선생님은 한분 주님이시고 우리들은 다 형제라고 하신다. 또 우리들의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지도자라고 불리지도 말라고 하신다. 우리를 지도하시는 분은 한 분 곧 그리스도라고 하신다. 따라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복습하면 큰 자는 천국에 들어간 자다. 천국에 들어간 자는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서로 섬기는 것이 예수 믿는 자의 도리다. 이 땅에서 자기를 낮추라고 하신다.
여전히 리더쉽세미나가 판치는 세상이다. 지도/이끔 (leading) 이라는 단어대신 영향력 (influence) 이라는 단어로 옮겨가고 있지만 이 역시 세상가치로 따진다. ‘종의 리더쉽’이나 ‘섬김의 리더쉽’이라는 표현도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