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2:20-33] 하나님의 자녀

[요 12:20-33] 하나님의 자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

섬긴다는 것은 종이 주인을 시중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26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종(시중드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다닌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예수님의 종도 함께 있다. 예수님의 종이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가 된다.

예수님을 섬기는 자는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다. 내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을 섬기면 성부하나님께서 그를 귀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하신다.

선한목자의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10:16]이라고 말할 수 있는 헬라인이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님을 ‘뵈옵고자’ 했다. 헬라어로는 ‘에이도’ 즉 예수님을 ‘알고’ 싶어했다. 다른 양들이 선한목자의 음성을 듣고자 했다는 소식에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선언하신다.

그런데 영광과 어울리지 않는 죽음을 언급하신다. 영광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다시 생명으로 반전을 거듭한다. 하나의 죽음이 많은 생명으로 열매 맺는다. 살려고 하면 생명을 잃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영생을 얻는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 역시 죽음을 면하고 싶으셨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소명이셨기에 순종하시고자 하셨다. 성부하나님께서는 순종하시는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고 또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본을 보이신 것이다. 순종밖에 없다.

예수님의 순종은 참된 권세가 성부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한다. 세상의 임금도 어쩔 수 없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 성자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 순종을 성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귀히여기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있으랴!

[요 12:12-19] 호산나

[요 12:12-19] 호산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나갔다. 예수님이 보이기도 전에 저들은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 (오 구원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통치로부터 구해 주실 것을 기대했다. 저들은 웅성웅성 대었을 것이다. “죽은자도 살리시는 분이래. 그분이 우리를 로마의 통치에서 구해 주실거야.” “맞아요, 나는 그분이 무덤에서 죽은자를 살리시는 것을 직접 보았어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 백성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그것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무리들의 기대감을 높였다고 할 수 있다. 무리들의 뜨거운 반응에 바리새인들은 온세상이 그를 따른다고 자조한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현상수배했던 포스터가 대선 주자 선거포스터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저 멀리 나타나시는 예수님!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 위풍당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호산나의 외침은 잦아들 것이다. 시온의 딸들 처럼 무리들도 두려움에 빠져들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일까 의구심이 회자될 것이다.

호산나. 오 구하소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우리 주님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시는 분이시다. 물에 뛰어들어 우리를 구해 주시려고 왕의 옷을 벗어 던지셨다. 그런데 우리는 물에서 건져주심보다 그 후에 보따리도 주실 수 있는지 없는지에 더 관심이 많지는 않은지?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ㅠㅠ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가오” (외모)가 아니라 호산나 구원자로 오신다.

[요 12:1-11] 베다니 삼남매

베다니 삼남매가 다시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은 잔치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빛나게 하는 조연들이다.

마르다는 여전히 분주하다. 그녀는 오늘 본문에서는 “일을 하고(to serve)”라고 짧게 언급된다. 누가복음에서 이런 마르다를 예수님께서는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하셨다. 무대 뒤편에서 이렇게 시중드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시중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된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오늘 본문에서 다섯번이나 언급된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이 아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이다. 그의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다.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도 그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으면 되는 단역이다. 그에게는 대사가 필요없다.

마리아.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누구나 마리아의 배역을 하고 싶지 않을까? 대사는 없더라도 오늘 무대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등장하는 배우다.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씼었다. 시중(섬김)의 대상도 예수님이요 삶의 주인도 예수님이다. 마르다와 나사로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믿음을 다 찾을 수 있다.

마리아. 두 렙돈이 자기의 생활비 전부였던 (의미상으로는 ‘자신의 모든 소유 전부’)  과부이야기 처럼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은 마리아가 가지고 있던 소유의 전부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금액으로 따지면 노동자의1년 연봉에 해당하지만) 즉 마리아는 자기 소유 전부를 모두 팔아 진주를, 보화가 묻힌 밭을 산 것이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 구경꾼도 있다. (결혼식장에 왔는데 신랑신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제자중 가룟 유다는 구경꾼으로 등장한다. 사실 큰 무리가 구경꾼들로 등장한다. 이들중 많은 이들이 나사로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 구경꾼으로 왔다가 주인공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불행하게도 유다는 구경꾼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구경꾼은 잔치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얼마짜리 예식이었는지 주판을 튕긴다. 허례허식인지 검소한 알뜰 예식이었는지 따질 것이다. 신부드레스는 얼마인지가 더 궁금할 것이다. 예식의 주인공은 더 이상 저들에게 회자되지 않는다. 주인공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저 잔치 음식이나 입에 넣고 스마트폰을 꺼내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져들 것이다.

[요 11:47-57] 예파라치

“또 그 민족만을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2]

많은 표적을 행하는 근본을 알 수 없는 예수님의 등장에 기득권자들이 모여 대책을 세운다. 대세가 예수님께 기울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이유는 로마통치하에서 굳건하게 유지되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어서였다.

이때 그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예수가 죽으면 기득권을 유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된다고 과대 포장을 하지만 자신들의 유익을 좇은 결론이었다. 소위 대제사장인 가야바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의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을 “그 민족 (이스라엘)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라고 기록한다.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에는 이방인들을 포함한다고 봐야한다.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좁게 이해할 이유가 없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요10:1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려 놓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성부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이유다. [요 10:17]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모의를 성부하나님께서는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 아직 선한목자의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신다.

유월절때가 되자 유대인들은 예수를 찾았다. (파파라치들이 이시대부터 있었구나.) 많은 사람들의 믿음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은 어느새 현상범이 되어버렸다. 물질적 복과 평안을 구하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오늘 날 우리들의 모습도 저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