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3:1-13] 다른 불

[민 3:1-13] 다른 불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10]

아론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그리고 이다말이다. 그런데 장자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 하루 아침에 넘버2와 넘버 3가 죽었다.[4] //아론이 넘버1

아론 집안이 어떤 집안인가?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받은 사람들이다.[3]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에서 일을 하는 레위인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셨다.[8] 내 (하나님) 것이라고 구별하신 레위인을 맡은 집안이다.[12]

이런 아론의 집안이라도 외인이 되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명령에 예외가 될 수 없다. [10] 넘버 2 나답과 넘버 3 아비후가 죽었다.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었다. 이때 사용된 ‘다른’ 이라는 단어와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에 사용된 ‘외인’은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라고 한다.

‘다른’ 불을 드렸다는 것은 결국 ‘외인’이 가까이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간음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다른’ 불과 ‘외인’은 다 부정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각각 성령을 속이다가 죽은 사건을 알고 있다. [행 5]

하나님 앞에 뭔가 감춘 것이 있다면 (불가능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외인’이라고 하신다. ‘외인’은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수 없다. 아니 하고자 하여도 죽게 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세상 사람들로부터 ‘뭔가 달라’라고 평가 받는 것은 괜찮으나 하나님께서 ‘외인’이라고 판단하시면 나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민 2] 동남서북

[민 2] 동남서북

이곳 캄보디아 사람들은 동서남북을 잘 모른다. 지도를 읽는 뚝뚝 운전사도 거의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여도 지도 볼 줄 모른다. 이곳에서 어디를 가려고 하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시장이름을 알아야 한다. 어느 시장 근처로 가자고 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부터 오른쪽 왼쪽 알려 주어야 한다. 좌우구분은 어디서나 통하는 방향이다.

오합지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방으로 진을 친다. 육십만 대군?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노예출신들이다. 이들에게 어떻게 동서남북을 가르칠 것인가? 하나님의 방법은 회막중심이었다. 동쪽은 해가 뜨는 쪽이다. 그리고 남쪽은 해가 뜨는 쪽을 바라보고 오른쪽이다. 서쪽은 바다가 있는 쪽이다. 북쪽은 (동남서쪽이 아닌) 나머지 쪽이다. 히브리어를 모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없으나 히브리어 단어가 갖는 의미상으로는 위와 같다.

// 동쪽은 해가 뜨는 쪽이다. 크마애어에서도 동쪽을 ‘캉(쪽)까읃(동)’이라고 한다. ‘까읃’ 태어나다 , 떠오르다, 나타나다의 의미를 가지니 해가 뜨는 쪽이라는 뜻이다. 남쪽은 머리를 뜻하는 ‘뜨봉’을 서쪽은 해가지는 쪽을 의미하는 ‘르읒’을 북쪽은 사람 발을 의미하는 ‘쯔응’ 을 사용한다. 이스라엘은 회막을 중심으로 해가 뜨는 쪽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 나머지 방향은 결정되었다. (써놓고 보니 당연하다.)

오늘도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대로 다 준행한다. 동서남북을 모르는 오합지졸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회막을 중심으로 해뜨는 곳에서 시작하여 각 지파를 배치하셨다. 오합지졸이 진영을 갖춘 군대가 되었다. 가고 쉬는 것은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랐고 자신의 위치는 자신이 바라봐야 할 깃발에 따랐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른다고 오합지졸을 면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느 깃발에 속한 것일까를 알아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민 1] 인구조사

[민 1] 인구조사

이백만명은 족히 되어보이는 무리에서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세는 것은 쉬운 일일까? 하여간 셌더니 603550명이었다.

육십만대군. 대한민국 군인수가 육십오만정도 된다고 하니 비슷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예배군까지 포함하면 대한민국은 근 400만 대군의 나라다.) 이정도면 세계 10위권의 군사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전쟁은 머릿수가 곧 전투력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육십만 이라니. 쫓겨나온 이스라엘은 이 숫자에 놀랐을 것이다. 자신들을 오합지졸이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인구조사한번으로 육십만 대군을 갖춘 민족이 된 것이다.

더군다나 인구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육십만대군이다. 오합지졸이 일사분란한 대군이 된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54]에 답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여정을 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을 경우 육십만대군도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쟁은 숫자싸움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역대하 20:15]

우리가 진정 의지해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 3월부터는 민수기를 묵상한다. 본문이 길다. 세세히 살피기 보다 돋보기가 움직이는 곳만이라고 제대로 묵상했으면 좋겠다.

[요 14:25-31] 평안

[요 14:25-31] 평안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27a]

평안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평강, 평화, 화평으로도 번역된다. 바울 서신서에는 은혜와와 짝을 이룬다. grace and peace 는 서신의 첫머리 혹은 마지막 인사로 주로 쓰인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은 알 수 없는/ 세상은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그런데 이 평안이라는 단어을 곱씹어 볼수록 이 단어는 개인적인 평안보다 공동체적 화평을 드러내는 단어인 것 같다. ‘하나됨’이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 ( ‘너희’는 복수형이다. ) 평안은 예수님이 우리안에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기 때문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작은 자들아’ (자녀들아) 하고 부르셨다.

은혜는 개인적으로 받을 지 몰라도 평안은 공동체적으로 누리는 것이다.

[요 14:15-24] 또 다른 보혜사

[요 14:15-24] 또 다른 보혜사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21]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은 동의어다. 사랑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을 수도 없고 계명을 지키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다.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도 말씀을 듣기는 듣는다. 결국 차이는 행함이다. 이 행함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보혜사다. 사랑할 힘이 없으니깐, 계명을 지킬 힘이 우리에게 없으니깐 예수님께서는 보혜사를 우리에게 주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문제는 세상은 보혜사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면 보혜사를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보혜사를 어떻게 영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너희가 보혜사를 안다고 말씀하신다.

도마와 같이, 빌립처럼 ‘우리가 보혜사를 안다구요?’라는 우문을 하지 말자.그런데 오늘은 유다가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시는지?’ 우문을 던진다. 예수님의 현답은 ‘사랑’ 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와 함께 하실 이유가 없으시다.

또 다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예수님도 보혜사셨다.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을 위해 간구하시는 보혜사시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명령을 행하는 것이 삼위 하나님과 거처를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천국백성의 삶이다. 이땅에서도 맛볼 수 있는 천국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