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8:1-18

욥기 38:1-18

갑자기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신다. 세 친구와 엘리후까지 싸잡아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 말씀하신다. 더 이상 사람의 지혜로 깨달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나를 아느냐?” 하고 물으신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차원이 다르다.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신다고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욥에게는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없다. 욥이 그토록 고대하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네가 나를 아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께 욥은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욥의 대답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아는 줄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코끼리의 한 부분도 안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나의 전부를 아신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작이다. 이 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 

욥기 36:26-37:24

욥기 36:26-37:24

엘리후는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분을 알 수 없다고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욥과 세 친구들에게 권한다. 사실 우리들은 주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기만 할 뿐이다. 창조주의 섭리를 보기는 해도 이해할 수 없다. 엘리후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욥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신기한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충고한다. 알 수 없는 일을 생각하라니. 엘리후 스스로도 우리는 무지몽매하여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대해 주셔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을 무시한다고 말하는 엘리후 자신이 지금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말하는 사람의 자리에 앉아버렸다. //순종이 먼저고 이해가 나중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된다. 적용은 자시에게 하면 족하다. 하나님은 장님이 만져 본 코끼리보다 크신 분이다. 나의 경험만 가지고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 안 된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도 겸손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욥기 36:1-25

욥기 36:1-25

엘리후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곧 죽어도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겠다고 한다. 자기의 모든 지혜를 짜내서라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밝히겠다고 말한다.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나’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으리요. 그냥 건전한 세상 지식에 불과하다.) 6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은 악한 사람을 살려 두지 않으시고, 고난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신다고 말한다. 엘리후의 관점에서 욥은 악한 사람인가? 아니면 고난받는 사람인가? 엘리후는  17절에서 욥의 고난/고통이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21절에서는 이 고통이 욥으로 악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후의 한계다. 25절에서 엘리후가 “사람은 멀리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봅니다.”라고 말하는데서 그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엘리후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기 때문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건전한 세상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 더 큰 교만은 없다. 

욥기 34:31-35:16

욥기 34:31-35:16

엘리후는 욥의 말을 곱씹어 보면 악한 자의 말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욥은 지은 죄에다가 하나님을 모독까지 했다고 지적한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옳다고 하실 것이라는 욥의 주장도 옳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침묵이 그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니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떠들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하는 사람은 엘리후다. 욥이 고통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욥의 유무죄와는 별개의 일이기 때문이다. 욥은 이것을 알았고 세 친구와 엘리후는 몰랐기 때문에 여전히 누가 죄를 지었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에 촛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에 대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자 누구의 죄인지 따진다. 그러나 고통의 자라에 필요한 것은 자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위로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는 나라다.

욥기 34:1-30

욥기 34:1-30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에게 말했다. 엘리후는 자칭 지혜롭다고 하는 세 어른들에게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말한다. 엘리후는 세 어른들이 들은 지혜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함께 무엇이 옳은지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자고 말한다. 

엘리후는 욥이 무죄를 주장하는 것을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왜냐하면 하나님은 악한 하실 수 없기 때문이란다. 만약 욥이 무죄인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통을 주셨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옳지 않을 일을 하셨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악한 일을 하실 없으니 욥이 무죄가 아니라는 반증이라고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한 일이나 정의를 그르치는 일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의로우신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의 생면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만이 심판자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따르던 길에서 벗어나면, 곧 악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처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감히 하나님을 비난할 수는 없다. 아무도 하나님께 항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엘리후는 욥이 고난받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친히 욥을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의인이라고 평가 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보편적 진리(지혜)로 다시 돌아가서 욥을 정죄하고야 만다. 엘리후가 세 친구의 말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결국 그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욥에 대한 위로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밝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전지전능, 무소부재 등등 말로 하나님을 수식해 보지만, 이 모든 것 또한 유한한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을 다 담아 낼 수는 없다. 엘리후도 애통하는 욥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