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2:1-14

열왕기상 22:1-14

벤하닷이 아합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나보다. 3년이 지나가건만 시리아에게 빼앗겼던 땅을 돌려받지 못했다. 때마침 남유다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 아합을 방문했다. 둘은 사돈관계다. 아합이 하나님께 굴복하자 남북관계가 좋아졌나보다. 사관이 또 아합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 왕이라고 적은 것을 봐서도 그렇다.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함께 시리아를 치자고 했다.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자고 말했다. 아합은 400명 가량의 예언자들을 모았다. 그들은 모두 아합의 원대로 시리아를 치러 올라가라고 말했다. 주님이 길르앗 성을 넘겨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여호사밧은 꼭집어 /주/님/의/ 예언자가 또 있느냐고 물었다. 아합은 미가야라고 하는 예언자가 있지만 미가야는 자신에게 길한 것을 예언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예언자를 두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대꾸했다. 아합은 하는 수 없이 미가야를 불렀다. (둘의 예언자를 대하는 태도가 이처럼 달랐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이 사백여 예언자 중 시드기야가 철뿔을 가지고 나와서 아합에게 주님이 이 철뿔을 가지고 대적이 모두 파멸될 때까지 그들을 찌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다른 예언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시드기야의 예언에 동조했다. 미가야를 데리러 간 신하가 미가야에게 다른 모든 예언자들과 같이 이스라엘 왕의 승리를 예언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가야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하겠다고 대답했다. 

//아합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벤하닷과의 연장전을 불사한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지난 두 번의 싸움에서 배웠음에도 아합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하나님 대신 사돈 여호사밧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합은 사돈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언자들에게 물었다. 그것도 전쟁을 당연시 하고 물었다. 아합과 함께 한 사백 여 예언자들은 누구인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거짓 예언자들로 판명난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함부로 예언할 수 없다. 사람들이 거짓 예언을 감히 하는 이유는 그들이 살아계신 주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니, 결국 저들은 하나님을 생명이 없는 우상과 동일시 한다. 헛것에 불과한 우상이 무엇을 어쩌랴. 그러니 거짓 예언자들은 듣기 좋은 말을 쏟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예언자는 다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한다.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모든 전쟁은 시작한 쪽이 잘못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명하신 전쟁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주님은 개인관계뿐만 아니라 민족간에도 할 수 있다면 화평하기를 원하신다. 우크라이나 러시안 전쟁도 하마스 이스라엘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전쟁을 시작하는 것도, 맞서 싸우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지도자들이 ‘모사재인 성사재천’을 모르니 애꿎은 백성들만 고통을 당한다. 전쟁대신 사랑이 평화가 임하게 하소서.

열왕기상 21:11-29

열왕기상 21:11-29

나봇이 살고 있는 성 안의 원로와 귀족들은 (아합의 이름으로) 이세벨이 편지에 쓴 그대로 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율법)에 쓴 그대로 했었다면…ㅠㅠ 이렇게 나봇은 죽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이세벨은 아합에게 포도원을 차지하라고 알렸고 아합은 얼타꾸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내려갔다.

주님은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말씀하신다. 살인을 하고 도둑질한 아합에게 사형을 언도하신다. 아합은 엘리야를 원수라고 부르자, 엘리야는 아합에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만 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생명을 재촉하느냐고 대꾸했다. 그리고 아합(오므리)가문이 여로보암, 바아사의 가문처럼 이스라엘 가운데서 멸절 당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모든 일을 사주한 이세벨의 시체를 개들이 찢어먹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도 전했다.

사관은 아내의 충동으로 자기 목숨을 팔아먹은 사람이 일찍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이세벨의 충동질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혐오스럽게 여기시는 우상숭배였다.

아합은 때늦은 회개를 한다. 주님은 엘리야를 다시 불러 말씀하셨다. 아합이 겸손해 졌으니 아합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고 아합의 아들 대에 가서 아합의 가문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원로와 귀족들이 이세벨 (아합)의 악에 동조한다.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 대신,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다.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이미 악한 것이다.//나봇의 죽음에 무감각한 사람들.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신음한다. 살인과 도둑질은 십계명을 전부 어겼다는 것을 대표한다. 하나를 어겨도 사형이니 아합 집안에 내려진 사형언도는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아합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내린다. 집행유예다. //하나님께 굴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임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내리는 때다. 아합이 하나님이 주인줄 진작에 알았다면, 처음부터 주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했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주님께 항복했다면…ㅠㅠ 아합의 때에 재앙이 내리지 않았다고 저주가 복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복의 자리에 나아가는 데 늦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열왕기상 21:1-10 (상한 마음)

열왕기상 21:1-10

상한 마음

‘근심하고 답답하여’ 예언자가 벤하닷을 놓아준 것이 아합과 이스라엘에게 화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아합의 반응이었다. (20:43)

아합은 나봇이 포도원을 조상의 유업이기 때문에 양도하기를 거절하자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왔다.(21:4)

그런데 이세벨에게는 아합의 답답함은 안보이고 근심거리만 보였다.(21:5)

새번역은 모두 ‘마음이 상했다’고 번역하는데, 개역개정은 아합의 경우에는’근심’과 ‘답답’ 두 단어로, 이세벨의 눈에는 ‘근심’만 보였다고 기록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바일 앱 사전에서 조사하면 근심과 답답의 히브리어는 이곳에서만 사용되어 용례를 살펴볼 수 없었다. 다만 아합의 마음이 상한 것을 근심에 답답함이 더해졌다고 기록하는데는, 아합의 답답함은 나봇이 거절의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명령)을 언급했기 때문에 생긴 근심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반면 이세벨은 아합에게서 세상 근심, 곧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지 못해서 생긴 근심만 보았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대처하고야 만다. 만약 아합 자신이 근심보다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명령 앞에 섰다면 아합은 좀 더 심사숙고 했을 것이고,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려는 욕심에서 돌이켰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이세벨은 아합의 세상 근심만 해소시켜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사망으로 끝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 성도라고 현실에서 하나님께 울분을 토로할 때가 없을까? (소위) 신앙이 좋다는 성도들도 자녀의 갑작스러운 사망이나 자신 혹은 가족의 질병과 도산으로  하나님께 답답함을 (화가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호소한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답답함이 있다면, 자비하신 (위로의)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을 구분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없다.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이다.)

열왕기상 20:35-43

열왕기상 20:35-43

//주님의 명령에는 순종해야 한다. 해괴망측 하다고 다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아 사자 밥이 된 예언자를 기억하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주님의 말씀에는 순종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어찌 우리가 헤아릴 수 있으랴. 특별히 순풍에 돛단듯 잘 나갈 때가 가장 위험하다. 하나님 없이도, 주님의 말씀 없이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죽음이다. 지옥은 다른 곳이 아니라 불순종 하는 곳이요 불순종 하는 때다. 천국이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합과 북이스라엘은 이렇게 불순종의 길을 간다. //주님의 명령에 잘 순종하라고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열왕기상 20:22-34

열왕기상 20:22-34

그 예언자는 다시 이스라엘 왕에게 와서 내년에 시리아 임금이 다시 쳐들어 올 테니 힘을 키우고,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라고 말했다. 한편 시리아 군부는 자신들의 패전이 이스라엘의 신이 산의 신인데 산에서 싸웠기때문에 졌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평지에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벤하닷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연합군으로 불렀던 32명의 영주들 대신 군사령관들로 연합군을 꾸리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첫 전투에서 잃은 병마를 보충해서 다시 싸운다면 이길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렇게 준비한 시리아가 다시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다. 이번에도 시리아가 숫적으로 크게 우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와서 시리아 대군을 이스라엘 왕의 손에 내주겠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하나님이 ‘주’되심을 알라고 말했다.

두번째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이 이겼다. 시리아 십만 대군을 하루만에 무찌를 정도였다. 그러자 벤하닷은 도망쳤다. 벤하닷은 아백성으로 도망쳐, 어느 골방에 숨었다. 벤하닷의 신하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은 인정이 많으니 지금 항복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벤하닷의 신하들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나아가 벤하닷은 이스라엘 왕의 종이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사관은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왕이 아닌, 아합의 반응을 기록한다. “아직도 그가 살아 있느냐? 그는 나의 아우다.” 벤하닷의 신하들은 옳다구나하며 벤하닷은 아합의 아우라고 맞장구쳤다. 그들이 벤하닷을 아합 왕에게 데려오니 아합은 벤하닷을 자기 병거에 태웠다. 벤하닷은 시리아가 빼앗은 이스라엘의 성들을 다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에 이스라엘과의 무역광장을 만들라고 말했다. 아합은 벤하닷의 항복조건에 만족하여 조약을 맺고 벤하닷을 풀어주었다. (사관은 벤하닷을 돌려보내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아합임을 분명히 한다.)

https://quietwaters.blog/2017/06/23/

그선지자는 일차전을 크게 아긴 아합왕에게 이차전을 대비하라고 예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차전을 대패하고 돌아간 아람왕의 신하들은 새로운 전략전술을 벤하닷에게 제시하였다. 첫번째는 운동장 사정이 좋아야 하니 경기장을 바꾸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삼십이명이나 되는 부감독직을 폐지하고 실전 경험이 있는 코치만 두어 감독의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세번째는 일차전에 잃은 선수를 대신해서 새로운 선수를 보강하라고 하였다.

해가 바뀌어 벤하닷은 이차전을 시작했다. 일차전과 마찬가지로 수적으로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우세했고 경기장 상황도 울툴불퉁하지 않고 평평했다. 아합왕은 일차전 시작과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총감독은 선지자를 통해 아합왕에게 일차전 결과를 상기시켰다. 승패는 전력이나 전술, 운동장 상황이 아니라 총감독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이번 승리로 제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라고 말했다. 시합은 며칠 동안 소강상태였으나 한순간에 승기가 이스라엘쪽으로 기울었다. 벤하닷은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주전선수들도 후보도 차례로 쓰러졌다.

이제 한 골이면 이스라엘의 승리는 뻔했다. 그때 벤하닷 수하의 코치들이 작전타임(삼세번)을 요청하라고 조언했다. (이스라엘 총감독 하나님은 세번째 도전을 받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필드에 있던 아합왕은 아람왕이 애걸에 승리감에 도취되어 작전타임(삼세번)을 받아주었다. 이제 승부는 연장전(삼차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나친 승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잊게하고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든다. 모사재인이요 성사재천이다. 눈에 보이는 상황을 따르기보다, 인생의 총감독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