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4:1-17 읽기

1-5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믿지 않고, 자신의 말을 뜯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하고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손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모세는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했고, 모세는 순종했다. 지팡이는 뱀이 되었다. 모세는 뱀을 패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모세에게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하셨다. 모세는 순종해서 뱀의 꼬리를 잡았다. 뱀은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이적을 보여주면 이스라엘 백성이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난 것을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6-9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번에는 손을 품에 넣어보라고 하셨다.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 보니, 그 손에 악성 피부병이 들었다. 주님께서 손을 다시 품에 넣어보라고 하셨다. 모세가 손을 다시 품에 넣었다가 꺼내 보내, 손의 살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주님께서는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첫 번째 이적을 보고도 모세의 말을 믿지 않거든 두 번째 이적의 표징은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이적도 믿지 않거든 나일 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으면 나일 강에서 퍼온 물이 피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10-17 모세는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말재주가 없습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 하고 핑계를 댔다. 주님은 모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으며, 누가 말 못하는 사람을, 누가 듣지 못하는 이를,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되게 하느냐?” 하시며 반문을 하셨다. 바로 주님 자신이 아니더냐고 하시며, 모세에게 “가거라” 명하셨다. 주님께서 모세가 말하는 것을 돕겠다고, 모세가 할 말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셨다. 모세가 또 머뭇거리며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크게 노하셨다. 그리고 “레위 사람인 너희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 하는 줄 안다. 그가 지금 너를 만나러 올 것이다. 그가 너를 보면 참으로 기뻐할 것이다. 너는 그에게 말하여라. 네가 할 말을 그에게 일러주어라. 네가 말을 할 때나, 아론이 말을 할 때에, 내가 너희 둘 모두를 돕겠다. 너희가 하여야 할 말을 가르쳐 주겠다. 아론이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을 할 것이다. 그는 너의 말을 대신 전달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아라. 그리고 이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여라.”

// “이 지팡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변했다. 주님은 이적을 보여주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말을 믿을 것이라며, 두가지 이적을 실제로 연습 시켜 주셨고, 세번째 이적도 가르쳐 주셨다. 그럼에도 모세는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발을 뺐다. 지팡이를 던지라면 던졌고, 뱀 꼬리를 잡으라면 잡았고, 손을 품에 넣었다 빼라면 넣었다 뺐던 (당장 순종할 수 있는 일에 순종했던) 모세는 여전히 자신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세는 요셉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노예였던 요셉이 총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더라면 모세가 이렇게까지 손사래를 쳤을까?) 결국 주님은 모세에게 역정을 내셨다. 모세에게 그냥 주님의 지팡이가 되라고 하신다. 생명력이 없는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듯이, 모세 자신은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주님의 지팡이가 되면 주님이 사용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아라. 그리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여라.”

// 성도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는 삶이다. 결국 임마누엘이다.

출애굽기 3:13-22 읽기

13-15 모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물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 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6-22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하고 ‘내가 너희의 처지를 생각한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는 일을 똑똑히 보았으니, 이집트에서 고난 받는 너희를 내가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하여라.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또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집트의 임금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여라. 그러나 내가 이집트의 왕을 강한 손으로 치지 않는 동안에는, 그가 너희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는 손수 온갖 이적으로 이집트을 치겠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나는 이집트 사람이 나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여, 너희가 떠날 때에 빈 손으로 떠나지 않게 하겠다. 여인들은 각각, 이웃에 살거나 자기 집에 함께 사는 이집트 여인들에게서 은붙이와 금붙이와 의복을 달라고 하여, 그것으로 너희 아들 딸들을 치장하여라. 너희는 이렇게 이집트 사람의 물건을 빼앗아 가지고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 “나는 곧 나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이름은 필요 없다는 뜻이다. 서로 잘 안다는 뜻이다. ‘나야 나’ 하면 된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 것이라고 하신다. 요즘에는 ‘나 용승이야’ 하고 이름을 바로 댈지 몰라도, 이전에는 ‘나야 나, 잠중 6기’ 하고 관계를 먼저 말해 상대방으로 내가 누군지 기억하도록 했다. ‘잠중 6기 투더리’라고 해도 기억 못하면, 내 이름을 말해줘도 소용없다. 사람들은 이름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름 대신 직함을 부르는 우리 문화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굳이 이름을 말할 필요가 없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문에서 반복해서 자신을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신다.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 성도에게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이름이 필요 없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물론 관계가 없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름부터 알려주고 소개해야 하겠지만.

출애굽기 3:1-12 읽기

1-6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 곧 르우엘의 양 떼를 몰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주하나님의 사자가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다.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불살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떨기나무 가까이 갔다. 주 하나님께서 모세가 다가오는 것을 보시고,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 세웠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

7-12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을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 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고,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는 것이 보인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나오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는 바로에게 갈 수 없으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할 수도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겠다. 너로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 와서 나를 예배 것이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너는 내가 너를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소명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부르신다. 주신 사명의 주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 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하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소명을 받은 자는 도구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런데 도구인 모세가 사용자인 하나님께 나는 능력 없는, 적합하지 않은 도구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소명을 받은 자가 해야 할 일이다.   

// “너희가 이 산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소명의 징표는 일이 이루어 졌을 때 확실해 진다. 소명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다.   소명의 시작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요, 소명의 중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함이며, 소명의 마침은 순종의 결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도구로 잘 사용되고 있다는 증거도,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지는 순종의 삶과 예배적 삶에 달려있다.

// 소명을 받았는가? 구체적 사명이 있는가? ‘임마누엘’을 누리고 있는가?

출애굽기 2:11-25 읽기

11-15a 세월이 지나 모세가 어른이 되었다. 모세는 왕궁 바깥으로 나와 동족에게 갔다. 동족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침 동족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감독관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았다. 모세는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집트 감독관을 쳐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버렸다. 이튿날 모세는 다시 나가 보았다. 이번에는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모세는 왜 동족을 때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모세에게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습니까?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입니까?” 하고 따졌다. 모세는 자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난 것을 알고 두려워하였다. 이 일은 바로에게까지 전해졌다.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고,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다.

15b-22 어느 날 미디안 땅에 머무는 모세는 한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이 우물에 와서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했다. 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서 제사장의 딸들을 쫓아버렸다. 모세는 이 꼴을 참지 못하고 제사장들의 딸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제사장 르우엘은 딸들에게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딸들은 어떤 이집트 사람이 목자들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해 주었고, 양 떼에게 물을 먹이는 일까지 도와주었다고 대답했다. 제사장이 딸들에게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불러서 음식을 대접하라고 말했다. 르우엘은 모세가 기꺼이 초청에 응하고, 함께 살겠다고 하자, 딸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했다. 십보라가 아들을 낳자, 모세는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이라고 지었다.

23-25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여전히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이스라엘은 고된 일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신다. 이스라엘 자손이 종살이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 모세의 이집트 왕궁생활은, 모세가 어떻게 왕궁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로 시작해서 ‘세월이 지나’로 그냥 끝이 난다. 모세가 왕궁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마흔이라고 하는데… 이어지는 두 사건으로 볼 때, 왕궁에서 자란 모세는 정의감에는 불탔지만 주변을 살펴야 할 정도로 바로의 권위와 보이지 않는 (어머니에게 들은 하나님의) 권위/권세 사이에서 고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국의 최상위 지배층에서 두 주인을 섬겼다고나 할까?

// 모세의 미디안 생활 역시,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딸 십보라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은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세월이 많이 흘러서’ 로 정리된다. 이 기간도 사십 년이라고 한다. 모세가 십보라를 만나는 사건에서, 모세는 여전히 정의감에 불탔다. 그러나 더 이상 자신의 처지(지위)나, 주변을 살펴보지 않아도 되었다. 바로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있게 되었으나, 보이지 않는 (말로 듣기만 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서는 더 미궁에 빠졌을 것이다.

// 그동안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이집트 왕은 죽었지만,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고역으로 힘들어 하고 있었다. 세상 역사는 그냥 흘러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신다. 고역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하나님께 부르짖게 한다.

//마찬가지로 세월이 지나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주님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변함없다. 문제는 성도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잊고 산다는 것이다. 성도가 힘들게 살아간다면 어쩌면 이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라는 주님의 사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땅에서 제국의 최상위 계층에서 호사를 누리든, 아니면 가난해서 비천한 생활을 하든, 정의감은 나의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곧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이 방법대로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언약/약속 앞으로 불러주신다.

출애굽기 2:1-10 읽기

1-4 레위 가문의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가 하도 잘 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 길렀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갈대 상자를 구해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기를 그 안에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두었다. 그 아이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동생이 담긴 갈대 상자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았다.

5-10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려고 강으로 나왔다. 시녀와 강가를 거닐다가 갈대 숲 속에 있는 갈대 상자를 보고, 시녀 한 명을 보내서 가져오게 했다. 갈대 상자를 열어보니 남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이를 불쌍히 여겼다. 공주는 이 아이가 히브리 사람의 아인 줄 알았다. 그때 아이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유모를 데려올까요?” 하고 물었다. 공주는 그렇게 해 달라고 대답을 했다. 누이는 어머니를 불러왔고, 공주는 아이의 친모를 유모로 삼고 삯까지 주었다. 아이가 자라 젖을 뗀 다음, 아이의 어머니는 그 아이들 바로의 딸에게 데려다 주었다. 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공주는 아이의 이름을 모세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 라고 지었다.

// 레위 가문에서 모세가 태어났다. 이스라엘(야곱)은 죽기 전에 레위를 시므온과 함께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라고 예언했다. 폭력적인 성격으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이런 저주받은 레위 가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 아기가 태어나게 하신다. 그러나 레위 자손의 운명은 바뀐다. 제사장 가문이 된다.

// 잘 생긴 아이! 사울 왕도 다윗도 ‘잘 생겼다’, 준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아이 모세도 같은 평가를 받는다. 다시 말해 ‘잘 생겼다’는 것은 멋지게 생겼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뜻이다. 모든 피조물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랴!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곧 잘 생겼다는 증거다. 생김새와는 상관이 없다. 레위 사람 부부는 아기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리 없었겠지만, 산파들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경외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석 달 동안 애지중지했고, 결국 갈대상자에 담았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라는 우산 아래 보호하시고 번성하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 왕궁이라는 우산 아래 보호를 받으며 자라게 하셨다. 누이와 모친은 아이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기를 갈대방주에 담아 갈대 숲에 두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긴 것이다. 노아의 방주와 마찬가지로 갈대상자는 나일 강을 따라 흘러가지 않았다. 갈대 숲에 놓인 그곳에 머물렀다. 아이의 울음은 이집트 공주를 불러냈고, 아이의 누이는 담대할 수 있었고, 모친은 젖을 물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가족이라는 우산을 씌워 주시기도 하시지만, 때론 원수를 우산으로 삼게 하신다.

// 성도는 그리스도라는 방주에 거하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