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19

1-7a 예루살렘이 가까운 벳바게와 베다니까지 왔다. 예수께서는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사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끌고오라고 명하셨다. 만일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라고 답하면 즉시 보내 줄 것이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왔다.

7-11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와서 자기 겉옷을 그 위에 얹자 예수께서 타셨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서서 뒷서서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를 외쳤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성전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 때가 이미 저물어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가셨다.

12-14 예루살렘 입성 둘째날, 베다니에 숙소를 마련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오시는 길에 시장함을 느끼셨다. 예수께서는 멀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셨으나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 잎만 무성했지 열매는 없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는 나무에게 영원토록 사람이 그 나무에서 열매을 따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15-17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들어가셨다. 성전 안에서 매내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과 제물을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성전 안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가르치셨다.

18-19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성전에서 행하신 일을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꾀했다. 무리가 예수의 교훈을 놀랍게 여겼기 때문에 함부로 처리할 수 없었다. 날이 저물자 예수께서는 다시 성밖으로 나오셨다.

//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구약의 예언대로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시고 뒤뚱뒤뚱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는 예수. 이런 예수를 정말 무리들은 왕으로 환영했을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 바로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 보셨다. 그러나 저물어 사람의 흔적이 없는 성전을 나오셔서 예루살렘 성 밖에 베다니로 가셔서 여장을 푸셨다.

// 베다니에서 일박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예수께서 시장함을 느끼셨다. 정말 배고프셨을까? 무화과 떄가 아님을 모르셨을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을 보지 못하심을 비유로 한탄하시는 것은 아닐까? 종교적 겉치례만 남아 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으로부터는 결코 (영원히)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간접적으로 들려주시는 것이다.

>> 예수님은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신다.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이사야의 말씀을 적용하신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분별력 없이 모두들 저 좋을 대로만 하고 저마다 제 배만 채운다고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말씀을 성전을 담당하는 지도자들에게 그대로 적용하신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잎사귀만 무성한 대제사상들과 서기관들로부터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얻을 수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그러니 어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지 않을까?

>>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기도는 간구의 의미보다는 예배의 의미가 더 강한 단어같다. 곧 성전은 만민이 모여 예배하는 집이다. 예배의 근간은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이다. 개인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다. 주님은 성도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시지만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 부르신다.

>> 둘째날도 저물매 예수께서는 성밖으로 나가셨다. 예루살렘 성은 이미 저물었다. 당연히 성전도 저물었다.  첫째 날도 둘째 날도 예수께서는 하루의 시작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셔서 시작하신다. 참 성전은 예루살렘 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계신 곳임을 암시하기 위해 마가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기록한 것 같다.

마가복음 10:32-52

32-34예수께서는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신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은 놀라면서도 예수를 따르길 두려워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한번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사람의 아들로 온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당시 사법권을 가지고 있던 이방인에게 넘겨,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가 능욕을 받으며 채찍질 당하고 죽을 것이나 삼일만에 살아 나신다고 말씀하신다.

35-40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좌의정 우의정 자리를 달라고 구한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좌의정 우의정 자리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느냐라고 하시면서 예수께서 마시는 잔들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예수께서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신다.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의 잔과 세례에 동참하겠지만 좌우편의 자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준비된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대답하신다.

41-45 열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좌우편의 자리를 구했다는 말을 듣고 화를 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모두 불러다가 하나님나라의 권세는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다름을 가르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로 온 나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다.

46-52벌써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여리고까지 왔다. 디매오의 아들 맹인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예수를 크게 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바디매오는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셨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고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가라’고 선언하셨으나 바디매오는 보게 되어 그 즉시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다.

>>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르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운 여리고에서 맹인이었던 바디매오가 예수를 따르는 이야기로 마친다. 많은 무리는 예수의 가르침이 권세 있음에  놀라면서도 따르기를 두려워했는데,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가라’고 했는데도 그 즉시로 예수를 따랐다.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셨을 때 겉옷을 (아마도 자신의 소유 전부를) 버려두고 예수께 나아갔었다. 제자들이 배와 그물과 아비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던 장면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바디매오는 눈을 뜨기전에 이미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보게 된 것은 덤이었다.

>>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맹인과 다름 없었다. 하나님나라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재물에 대해 가르치실 때도, 여자와 (이혼과) 어린아이를 언급하시면서도, 아니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면서부터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된다고 강조하셨는데, 그래서 큰 자, 작은 자를 따지지 말고 화목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예루살렘이 가까왔는데도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싸웠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 다르다고 다시한번 강조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  (성령에 이끌리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했던 바울을,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며 막아섰던 많은 성도들과 장로들과 예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은 몰랐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바로 보았는데,)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삼 세번이나 직접 들은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여전히 몰랐다. 알았다면 누가 크냐는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지체인 성도들도 하나님나라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의 지체라는 것을.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지체가 있는 것이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지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나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해 주시고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신다.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영광을 받고 함께 즐거워하게 하신다. 누구에게 좌의정 우의정 자리가 주어질런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 모두에게 가장 요긴한 자리를 주실 것이다. 오늘도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성실하라고 하신다.

마가복음 10:17-31

17-22 예수께서 길에 나가셨을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정중히 예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알고 있는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 사람은 예수께 자신은 어려서부터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보시면서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셨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그에게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하고 와서 예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다.

23-30예수님은 ‘재물’을 주제로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신다. 이에 제자들도 놀란다.예수께서는 한술 더 뜨신다. 낙타가 바늘 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신다. 제다들이 매우 놀란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예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신다. 베드로는 예수께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말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복음을 위하여 자기 소유의 전부를 버린 자는 이땅에서도 백배의 복을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신다.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신다. // 하나님나라는 부자가 작은 자가 되고,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는 나라다. 다시말해 재물의 많고 적음으로 차별당하지 않는 나라다.

>> 영생은 하나님나라다. 하나님나라는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보화가 뭍힌 밭을 사는 것이요 값비싼 진주를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고 하신다. 빌 게이트나 노숙자나 심지어 빚쟁이에게 공평하다. 자기 소유 전부를 팔아 사야한다.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 것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내 나라와 하나님나라를 겸하여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했던 부자 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몰랐던 그 부자는 영생을 얻기는 커녕, 세상 근심으로 사망을 이루는 길로 떠났다.

>> 제자들도 영생을, 하나님나라를, 곧 구원을 재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는 말에 놀랐다. 낙타가 좁은 문으로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시니 더 놀랐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입장료가 ‘자기 소유의 전부’라고 하신다. 선하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공정가격이라고 하신다.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다. 있는 자나 없는 자에게 동등하다.

>>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하나님나라를 사는 사람은 이땅에서도 백배의 복을 받는 다고 하신다. 백배의 복이란 소유의 많음이 아니라 자족하는 마음이다. 숫자적으로 백배라기 보다 완전한 자족을 의미할 것이다. 많은 소유에도 불안한 (세상 근심을 하는) 사람들과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임마누엘을 의미하고 곧 영생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과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 성도들이 피하고 싶은 박해는 선택과목이 아니다. 필수과목이다. 복과 박해. 복음과 박해다. 복음과 고난이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박해를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생에서는 박해와 겸하여 복을 받는다고 하시고 내세에서는 영생의 복을 받는다고 하신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마가복음 10:1-16

1 (제자들만 데리고 특별 제자도 수련회를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유대지경으로 들어가셨다.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 지역에서 예수님은 다시 무리들에게 전례대로 (하나님나라 전파와 축귀와 치유를) 가르치셨다. // 예수의 사역은 가르침이다. 축귀와 치유도 결국은 하나님나라를 가르치는 도구이자 열매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님을 알 수 있다.

2-12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시험한다.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모세의 가르침은 어떠냐고 물으셨다. 바리새인들은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이혼하기를 허락했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는 명령을 기록했지만,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때,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한몸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과 제자들만 있을 때) 집에서 제자들이 이혼문제에 대해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라고 하셨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 것도 간음을 행함이라고 하셨다.  // 바리새인들에 대한 대답에서 예수님은 모세 율법이전인 창조때 주어진 하나님의 법을 답으로 주셨다. 다른 말씀을 덧붙이지 않으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남자나 여자나 이혼의 목적은 간음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냐고 콕 찝어 지적하신다. 하나님은 혼외성애를 허락하지 않으신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라고 허락한 것은 불법적으로 이혼당하는 사회적 약자인 여자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지 이혼을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신다.

13-16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려왔다. 제자들은  No Kids 라고 푯말을 내걸었다. 그래도 예수께 나아오려고 하자 역정까지 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히려 제자들에게 노하셨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만져주시고 축복하셨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영접하는 어린 아이들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어린 아이도 사회적 약자다. 결국 어린 아이는 작은 자다. 낮은 자다. 심하게 말하면 불가촉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은 만져 주셨다. 안수하셨다. 아예 허그하셨다. (안아주셨다.) 버리시지 않으셨다. 율법은 부정한 것을 만진 예수를 부정해졌다고 판단할 것이나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은 거룩하신 예수께서 만진 부정한 어린 아이들이 거룩해졌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나라가 아니라 부정한 것을 깨끗케 하는 나라다.

>> 예수님은 율법적 적용에 저항하신다. 율법을 문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적용하신다.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율법을 주시기 전부터 있던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가르치신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어린 아이같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 낮은 자, 작은 자 들을 주님처럼 영접하는 자,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창조질서를 아는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고 가르치신다.

>> 성도라면 적어도 한번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세례 서약을 한다. 성도가 결혼한다면 또 한번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한다. 이 서약은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순서에 있으니 그냥 하는 것이 아니요 형식적으로 따라 하는 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을 때나 혼인서약을 할 때나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일터에서나 지역 사회 공동체에서 불신자라고 차별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는 것은 다르다. 부부생활부터 자녀양육까지 한 몸, 한 마음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몸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 다른 은사로 (역할과 능력으로) 직장이나 사회 공동체에 지체로 참여하는 일과 결혼은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에도 무작정 적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했다면 배우자를 볼 때마다 서약한 내용을 되씹어야 한다.

>> 믿음이 강한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을 섬겨야 한다. 먼저된 자, 첫째가, 큰 자가 나중된 자를, 마지막을, 작은 자를 섬겨야 한다. 그럴 때 강한 자들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강해진다. 더러워질까봐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더러움을 씻어주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바울은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라면, 아니 모든 성도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마가복음 9:30- 50

30-32 예수께서 갈릴리 가운데를 지나신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다니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는데 집중하신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내용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었다. 그러나 이런 집중적인 가르침에도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모르는 것을 묻기도 두려워했다.

33-37 가버나움 집에  (아마도 베드로 장모의 집) 계실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는지 물으셨다. 제자들은 꿀먹은 벙어리였다. 왜냐하면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 열두 제자를 불러모으시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 곧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마침 곁에 있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아 주시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라고 가르치셨다. // 어린 아이, 곧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영접한다는 것은 모신다는 의미다. 결국 작은 자를 영접한다는 것은 작은 자를 받들어 모신다는 것이다.

38-40 요한이 예수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않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것이 바른 행동인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고 즉시로 예수를 비방할 자가 없다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하신다.

41-48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 물 한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스스로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신다.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멀쩡한 몸으로 지옥, 곧 영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다.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고 눈이 범죄하게 하면 눈을 빼버리라고 하신다.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한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에서 영원히 고통받은 곳이라고 하신다. //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작은 선행을 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만, 예수 믿는 작은 자들을 실족케 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49-50 불에 볶은 구운 소금이 되라고 하신다. 좋은 소금이 되라고 하신다.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더이상 소금이 아니라고 하신다. 제자들 사이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신다. // 결국 짠 맛이 있는 소금이 가치있는 소금이다. 제자들이 사이에 소금을 두라는 것은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뜻 같다. 제자들이 지켜야 할 정체성을 화목이라고 하신다.

>> 아무리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똑똑한 학생들은 선생님께 질문하면서 배우는데 제자들은 무식이 탄로날까봐 묻지도 못한다. 예수님은 짧고 짧은 비유로, 시청각 효과로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신다. 오늘 가르치심의 특징은 먼저되지 말고 (큰자가 되지 말고) 나중되라는 (작은 자가 되라는) 것이요, 더 나아가 큰 자, 작은 자로 서열을 따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화목한 공동체가 되라고 하신다. 큰 자 ,  작은 자로 다투는 것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그러니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도 영접하라고, 받들어 모시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길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 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 첫째가 되기 위하여 황새처럼 걷지 말라고 하신다. 뱁새가 되어 저는 자들의 속도에 맞춰 걸으라고 하신다. 두 눈을 부릅뜨고 남의 잘 못이나 지적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한 눈이라도 푯대이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신다. 아무리 좋은 천일염이라도 구운소금이 되어 섬기는 일에 쓰임새가 더 많은 소금이 되라고 하신다. 이렇게 제자들이 서로 큰 자라고 다투지 않고 서로 화목하면, 곧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제자들을 예수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신다.

>> 짠 맛이 나는 소금이라고 만족하지 말라고 하신다. 불순물을 태워버린 구운 소금이 되라고 하신다. 공동체의 화목을 위해 녹아지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