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1-23

1-8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몇이 예수님을 보려고 모였다. 그들은 제자들이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았다. 마가는 친절하게도 유대인들은 전통, 곧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고 음식을 담는 그릇도 씻는 장로들의 전통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느냐고 따졌다.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이용하시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자신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외식히며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불렀다는 얘기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오히려 너희가 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냐고 반문하셨다.

9-13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전통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예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렸다는 핑계로 부모봉양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지적하신다. 고르반뿐 아니라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일을 많이 행하고 있다고 책망하신다.

14-23 예수님은 무리를 다시불러 (아마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집으로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물었다.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하시면서 설명해 주신다.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갔다가 배설하는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신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사람 마음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 이들은 깨끗함과 부정함을  장로의 전통에서 찾는다. 앞 3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던 서기관도 마가는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말했었다. 예루살렘은 전통과 관습을 중요시 하는 옛 포도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갈리리는 변방이지만 하나님나라의 도를 담은 새 부대라고 할 수 있겠다.

//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의 계명이냐 사람의 전통이냐다. 답은 정해져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뻔한 답이 있음에도 논쟁이 이어지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으로 눈에 보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도자가 깨달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 = 이웃사랑” 으로 평범하고  단순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꾀를 낸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에 자신들이 앉는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이요 악한 것이라고 하신 이유다. 무너뜨려야 할 이론이 너무 많다. 무너뜨려야 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정말 많다.

>>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좋은 땅인 이유는 예수님이 친절하게도 가르침을 설명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을 죽은 전통과 관습을 뒷받침하는데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대로 정직하게 살게 하소서.

마가복음 6:45-56

(오병이어로 남자 오천명과 무리를 먹이시고)

45-46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타고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하셨다. 예수님은 무리를 배웅하고 작별하신 후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 피곤한 제자들에게 뒷처리를 맡기지 않으셨다. 정리를 끝낸 예수님은 자신도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산으로 가셨다.

47-52 날이 저물었을 때에도 제자들은 건너편 벳새대를 향해 노를 저었다. 맞바람으로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저었다. 홀로 뭍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는 제자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시고 밤 삼경쯤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제자들은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줄 알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오르셨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배를 거스려 불던 맞바람이 그쳤다.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시고 맞바람을 그치게 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마음에 심히 놀랐다. 마가는 제자들이 떡을 떼시던 일을, 곧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신 일을 깨닫지 못하고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떡을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여졌다. 떡을 떼시던 일은 분명 오병이어로 남자 오천명과 그 무리를 먹이신 사건일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을 해설할 시간도 없이 제자들을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지 않으셨던가? 따라서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 진것은, 제자들의 마음이 돌같이 딱딱해 진것은 제자들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의 부재때문이라고 보는게 어떨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축귀와 치유의 경험도 결국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깨닫지 못한다. 마음이 돌같이 딱딱해 진다. 결론적으로 예수와 같은 배에 타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마음에 예수를 모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

53-56 배는 건너편 게네사렛 땅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봤다. 예수님이 게네사렛에 도착하셨다는 소문은 곧 온 지방에 퍼졌고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왔다. 예수님이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실만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길 간구했다.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다. //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더니 이제 예수의 얼굴도 알려졌다. 예수님이 회당에도 가시고 이마을 저마을 다니셨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 우리 인생의 항로도 쉽지 않다. 노를 던져버리고 돛를 만들어 달고 엔진을 만들어 달아도 힘들다. 인생에 필요한 동력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힘겹게 노저으며 항해할 때 주님은 제자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성부하나님과의 한적한 곳에서의 교제도 희생하시며 제자들을 찾아주신다. 문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물리적 부재가 영적인 부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광풍을 잠잠케 하셨던 주님, 아니 방금 전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던 주님은 보이지 않고 맞바람만 느낀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은 마음에 온전히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다. 그래서 마가는 제자들의 마음이 돌밭같이 딱딱해졌다 (둔해졌다)고 설명한다. 임마누엘은 교제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님 앞에 나아간다고 해도, 주님만 만져도 상함이 성함으로 바뀌는 치유를 경험한다고 해도 주님을 나의 주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과거의 경험적인 하나님은 (예수님은) 간증에서나 존재하시는 죽은 하나님이 되실 뿐이다.  마음이 둔해지지 않아야 한다.

>> 좋은 땅이라도 돌밭같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오늘 찾아 주시는 주님을 보고 놀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에 모시라고 하신다. 보혜사 성령하나님께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잘 기억하고, 주신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늘 간구하라고 하신다.

마가복음 6:30-44

30-33 // 사도들이, 곧 둘씩 파송받은 자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고에 관심 없으셨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가사 잠깐이라도 쉬라고 하셨다. 제자들의 사역도 예수님처럼 쉴새없고 밥먹을 겨를도 없을 만큼 바빠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갔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는 모든 고을에서 온 무리들도 예수님 일행을 놓치지 않고 해안을 따라서라도 예수님 일행이 가는 곳으로 달려갔다. 심지어 예수님 일행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말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위에서라도 쉼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4-44 // 제자들과 한적한 곳을 찾으셨던 예수님은 큰 무리에게 나오셨다. 큰 무리는 목자 없는 양 같았다.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여러가지로 가르치셨다.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왔다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나오셨다고 시작한다.) 때가 저물어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곳은 빈들이고 날도 저물어 가니 가르치시기를 그치시고 무리들을 보내어 근처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다 먹이려면 이백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나 가서 보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알아본 결과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가 있다고 보고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을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히라고 하셨다. 무리가 백명씩 오십 떼 혹은 오십명씩 백 떼로 나눠 앉았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들에게 나눠주게 하셨다. 물고기 두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셨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명이었다.

>> 요한의 죽음과 장사를 언급한 후 첫번째 표적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오늘 사건이다. 회개에서 하나님나라의 선포로 패러다임이 넘어왔다고 선언했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는 42절 “다 배불리 먹고” 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하나님나라가 선포되었지만 모두가 복음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더러운 귀신 들리자들은 축귀를 병에 결린 자들은 치유를 맛보았지만 더러는 길가요, 더러는 돌밭이요 더러는 가시떨기요 적은 무리만 좋은 땅이었다. 그런데 오늘 하루만은 모두 다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 다 배불리 먹었다. 이전까지 오병이어 기적을 읽으면 꼭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를 상상해보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다 배불리 먹었구나, 모두 만족했구나에 관심이 쏠린다. 바울은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 일부가 아니라 다 배불리 먹었다는 것은 더이상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의와 평강과 희락을 뜻한다고 생각된다.

>> 과정은 모르지만, 어떻게 가능했지라는 질문을 뒤로하고 ‘다 배불리 먹었다’ 라는 이 짧은 한구절에서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발견한다. 다 앉아서 먹었다. 배불리 먹기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았다. 수고한 댓가에 따라  많이 먹거나 적게 먹지 않았다. 밥을 먹을 겨를 도 없었던 제자들이 남자만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식탁을 오가면서 수종을 들었다. 예수님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제자들이 먼저 먹는 나라가 아니라, 여전히 밥먹을 겨를이 없어도 배고픈 자들을 먼저 섬겨야 하는 나라다. 이 들까지 오는 배에서 예수님은 쉬지도 못하고 먹을 겨를도 없었던 제자들을 쉬게 하시며 먹이셨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 제자들은 더 큰 무리를 대상으로 섬김의 제자도를 실습한다.

>>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리를 보내어 저들로 각자 끼니를 해결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때 속 마음에는 배를 타고 오면서 경험한 예수님과의 한적한 곳에서의 식사 시간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무리들을 피해 배 위에서 예수님과의 은밀한 시간을 통해 쉬고 먹고하지 않았을까? 물론 배부르게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 같은 무리를 위해 제자들에게 이 한적한 시간까지도 희생하게 하셨다. 성도들 중에 코로나 19 최전방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이런 희생을 경험하실 것이다. 주일 예배의 기쁨을  희생하며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 영적예베를 드리는 모든 분들께 경의를 표하게 되는 아침이다.

마가복음 6:14-29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고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자)

14-16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다. 이 소문은 헤롯왕에게도 들렸다. 헤롯 왕은 예수의 소식에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요한의 능력이 예수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예수를 엘리야, 또 어떤 이는 선지자라고 말했으나, 헤롯은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17-28 (헤롯이 요한을 죽이다.)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자 요한은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헤롯은 요한을 원수로 여기고 죽이고자 하는 아내 헤로디아의 바가지에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옥에 가두었지만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었고 요한의 말에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한을 죽이고자 하는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의 생일잔칫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었는데 춤에 취한 나머지 헤롯이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맹세했다. 딸은 헤로디아에게 물었고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사주했다. 헤로디아 딸은 헤롯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했고 헤롯은 어쩔 수 없이 자기 맹세를 인하여 거절하지 못했다. 헤롯은 결국 시위병을 보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했고 그 시위병은 요한을 목베어 가져왔다.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했다.

// 의롭고 거룩한 요한은 허무하게 죽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시체를 가져다가 정성스럽게 장사했을 것이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자주 사용하는 요한복음 3장 30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새번역) 죽은 요한의 입장은 어땠을까? 요한은 목이 잘리면서도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이미 세례 요한이 죽었지만 헤롯왕의 태도를 보면 세상은 예수님에게서 요한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체가 예수님이시고 요한이 그림자였는데 갈릴리 변방의 예수님은 여전히 요한에게 가려져 있었다. 마가는 요한의 죽음과 장사를 기록함으로써 유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요한의 레가시를 지워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요한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에서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로  패러다임이 이동했음을 독자들에게 고지한다.

>> 요한의 회개의 복음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전통과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쉽지 않다. 더러운 것을 벗어 버리는 것은 쉽지만 깨끗한 것을 입는 것은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의롭고 거룩한 삶을 위해서 더러운 것을 벗어 버리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의롭고 거룩한 삶을 위해서 새로운 것을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라고 적용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고 표현한다. 회개는 시작이다. 나머지 반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얗게 빛나는 하나님나라의 유니폼을 입고 사는 것이다.

>>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다. 내가 죽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살라고 하신다. 세상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을 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마가복음 6:1-13

1-6a예수님은 고향으로 가셨다. 열두 제자가 따랐다. 아마도 더 많은 제자들이 따랐을 것이다. 고향에 오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회중들의 첫 반응은 놀람이었다. 예수가 어디서 이런 것을 (회당에서 가르칠 자격을) 얻었느냐? 예수의 가르침과 권능들이 어찌됨인지 놀랐다. 그러나 곧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않느냐? 라며 예수를 배척했다. 예수님은 회중들에게 선지자가 고향 친척 자기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고향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몇몇 소수의 병자에게만 안수하시고 고치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이상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다른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다.

// 분명 금의환향이다. 장원급제를 해서 가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오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열두명의 제자와 함께 암행어사처럼 방문하신 것이다. 행색이 초라해도 암행어사가 아닌가? 예수님은 고향에서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지만 그만큼 어느 신학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는지? 축귀와 치유의 은사는 어찌됨인지? 등등 의구심은 증폭되었고 결국 고향사람들은 인간 예수를 배척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옛 소문, 열두살 때 성전에 올라갔다가 가출소동을 벌였던 말썽꾸러기에 대한 기억,  요셉을 도와 목수일을 하던, 만약 요셉이 일찍 죽었다면 장자로 소년?가장이었을 예수가 그들이 아는 전부였다. 그런데 랍비교육을 받지도 않은 예수가 랍비라고 제자들을 이끌고 나타났으니… 가르침과 능력을 보면 놀랍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 믿음있는 지극히 소수의 사람만 치유함을 받을 뿐이었다. 예수님은 어제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면서 치유가, 곧 구원은 믿음의 문제라고 하셨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아니라서 마패를 꺼내 암행어사 출두를 선어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6b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자) 예수님은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다. //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7-13 예수님은 곳곳의 필요을 보셨다. 이에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게 하셨다.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러 가기위해 지팡이 외에는 따로 양식이나 배낭이나 심지어 돈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신만 신고 여분의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다. 영접하는 집에서 머물고 영접하지 않는 곳에서는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리고 나가라고 하셨다. 이에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하고 축귀하고 많은 병자들을 기름을 발라 고쳐주었다.

//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던 예수님 방식 그대로 제자들을 보내셨다. 단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 물론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하나님과 짝을 지어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을 것이다. 축귀의 권능으로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다. 예수님도 목자들 처럼 지팡이 하나 들고 다니셨던 모양이다. 따로 양식이나 배낭이나 돈을 가지고 다니셨다는 기록도 없다. 당연히 여분의 옷도 입고 다니시지 않으셨다. 영접하는 시몬의 장모의 집과 세리 레위의 집에서 머무셨다. 그러나 거라사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곳에서는머무시지 않고 복음의 씨만 뿌리고 먼지를 떨어버리고 배를 다시 타시고 돌아오셨다. 이렇게 제자들도 둘씩 짝을 지어나가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었다. 기름을 발라 병자를 고쳤다는 표현에서 야고보서 5장 14절이 떠오른다. 곧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병자를 위하여 기도해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쳤다는 번역보다 돌봤다는 번역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올리브 기름을 부어 병자를 돌보았다.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 고향사람들은 자기 지혜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마을들로 가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제자들을 파송하신 이유요 오늘 날에도 성도들에게 선교적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다.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어느정도 말씀을 배워야 하고, 축귀도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병자들을 위해 기름을 붓고 돌보는 것은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기름을 붓는 다는 것은 나의 소유를 사용하는 것이요 돌보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의 사역은 참 간단했다. 복음을 하나님나라를 비유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라’라는 복음의 시작점에 집중했고, 받은 축귀의 권능으로 많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냈으며 기름을 발라 많은 병자들을 돌보았다. 씨를 뿌렸다. … 하루종일 곱씹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