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4:1-17

야곱은 레아에게서 낳은 딸 디나는 그 땅의 딸들을 보러나갔다가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곧 그 땅의 추장 세겜에게 눈에 띄여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세겜은 성폭행은 하였지만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사랑의 마음을 말로 전하고, 아버지 하몰에게 디나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야곱은 디나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마도 같이 나간 디나의 여종들이 돌아와서 보고했을 듯 싶다.) 아들들이 목축하러 들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잠잠할 수 밖에 없었다. 지팡이를 의지하는 절름발이 야곱의 한계라고 해야 하나.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에게 딸을 달라고 말하러 왔을 때, 야곱의 아들들도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야곱의 아들들은 근심하고 노하였다. 하몰이 야곱에게 디나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해 달라고 하며, 두 족속이 서로 통혼하자고 제안했다. 동행한 세겜도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에게 요구조건을 다 들어 줄테니 디나를 아내로 달라고 말했다.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요구한대로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야곱의 아들들은 문제 해결보다 누이 디나를 더럽힌 사건에 대한 보복심에 사로잡혀 세겜과 하몰에게 속여 대답했다. “안된다.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누리 누이를 줄 수 없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몰집안 모든 남자가 다 할례를 받으면 통혼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만약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디나를 데리고 떠나가겠다고 대답했다.

// 하란을 떠났을 때 야곱의 장자 르우벤의 나이를 열살 조금 넘었다고 가정한다면 야곱이 세겜 성 앞 들에서 거주한지 적어도 오년, 막내도 들에 나가 목축하는 나이가 되었고 디나도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갈 나이가 되었다면 10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을 것이다.

할례. 난지 팔일만에 하는 할례. 과연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받았을까? (창세기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팔일만에 할례를 행했다고 기록하지만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고는 할례를 행했다고 기록하지는 않는다. 또 하란에서 얻은 야곱의 종들은 무할례자였을 것이다.) 야곱은 과연 자신이 받은 할례를 기억하고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까? 그렇다면 야곱은 하란 생활 20년동안 첫 칠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한해에 한번씩은 태어난 아들들에게 할례를 베풀었을 것이다. 곧 하나님의 언약을 어쩔 수 없이 기억했다는 뜻이된다. 야곱의 가족에게 할례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 후손에게 주시며, 하나님이 아브라함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언약의 증표였기 때문이다. 할례는 자연스럽게 야곱이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하는(가르치는) 기회였을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의 의미보다 할례의 고통을 알았다면 적어도 야곱의 집안에서는 새로 얻은(산) 남자 종들에게 여전히 할례를 시행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야곱의 아들들은 그 고통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야곱은 이 사건에 대해 아직까진 침묵한다. 야곱의 아들들이 전면에 나선다.

이야기가 중간에 중단되어…. 내일로

창세기 33 (1-20)

야곱은 저 멀리 에서가 사백명이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았다. 야곱은 가족을  여종과 그들의 자식-레아와 그의 자식 – 라헬과 요셉 세 떼로 나누어 따라오게 하고 자신이 먼저 형 에서와 맞닥뜨린다. 그러나 야곱의 예상과 달리 에서는 야곱을 친근하게 반겨준다.

에서는 야곱을 따라온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야곱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야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차례로 도착해서 에서에게 인사를 했다. 에서는 또 앞에서 만난 낙타 떼는 무엇이냐고 물었고 야곱은 형 에서를 주라고 부르면서 주께 은혜를 입기 위한 선물이라고 대답했다. 에서는 쿨하게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도 족하니 선물을 거두라고 했지만  야곱이 자신의 소유도 족하니 받으라고 강권하자 에서가 받았다. 야곱은 에서를 만난 것을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까지 말했다.

에서는 야곱에게 함께 가자고 말을 했지만 야곱은 400여 장정과 달리 자신의 치고 있는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은 무리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또 다시 형 에서를 주라고 부르면서 먼저 가라고 말했다. 자신은 가족과 가축들과 함께 천천히 에서가 있는 세일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에서는 자신의 종 몇 사람을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야곱은 사양했다. 에서는 세일로 돌아갔다.

야곱은 숙곳에 거처를 잡았다. 밧단 아람에서 드디어 가나안 땅 세겜 성읍까지 왔다.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세겜의 조상 하몰의 후손들에게서 그 땅을 백 크시타에 샀다. 야곱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

// 라반과 헤어지면서 야곱은 마하나임을 만났다. 야곱은 그 때 만의 하나 라반이 꿈에 하나님이 라반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군대가 자기를 지켜 주었을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이끌고 자신을 마중하러 온다는 소식에서 야곱은 다시 마하나임을 잊어버렸지만 마하나임의 군대장관 되시는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하나임이 여전히 자신을 지켜주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야곱은 셈에 빠른 사람이었었다.  그런 야곱이 에서가 자신의 것으로 족하니 선물을 거두라고 하자 야곱은 형 에서를 본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까지 말하며 (지난밤새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이었다.) 강권해서 에서가 선물을 받게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베푸신 은혜를 에서에게 아끼지 않은 것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아끼지 말아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하겠지만 성도들이 먼저 이땅에 살면서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해와 비를 공평하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해야 한다.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야곱은 에서와 함께 가지 않았다. 가축의 새끼들이 장정 400명처럼 빨리 움직이면 지쳐 죽을 수 있다는 핑계를 댔지만, 아마도 야곱이 머물러야 할 땅은 에돔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방금 화해한 에서에게 언약을 강조하며 세일 땅으로 갈 수 없다고 말할 순 없었을 것이다. 언약을 얘기하면 장자권이 언급될 것이고… 핑계를 댈려고 했으면 이삭과 리브가에게 먼저 문안 드리러 가야한다고 대답했어야 했을 것인데… 아직 살아계신지 몰라서였을까? 그렇다면 화해즉시 부모님에 대한 문안이 먼저였어햐 했을 것 같은데… 하여간 야곱의 거짓말 하는 습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ㅠㅠ

야곱은 조부 아브라함처럼 세겜 성 앞 땅을 백 크시타에 샀다. 하나님이 주실 땅인데 돈 주고 샀다. 백 크시타가 얼마인지는 모른다. 양한마리의 가치가 있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성도들은 거져 얻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된다. 할 수 있다면 값을 치러야 한다. 그것도 후하게. (그래야 공짜로 얻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유 전부를 팔아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이 된다.)

창세기 32:13-32

야곱은 언약을 기억하고 형 에서에게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렇다고 야곱이 인간적인 준비를 하는데 게으르지는 않았다. 형 에서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두 떼가 아니라 여러 떼로 나눴다. 앞선 떼에게 야곱이 뒤에 있다고 말하라고 하면서 먼저 보냈다. 야곱은 여러 떼의 선물로 형 에서의 감정을 풀고자 했다. 예물을 실은 떼를 먼저 보내고 마지막으로 밤에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남은 소유를 인도해서 얍복나루를 건네 보내고 혼자 남았다.

혼자 남은 야곱은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 그 사람은 결국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을 다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 사람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

그 사람은 야곱에게 이름을 물었다. 야곱이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야곱이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야곱이 그 사람의 이름을 묻는다. 그 사람은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 야곱에게 축복한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 브니엘은 하나님 얼굴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니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고백한다. 해가 돋았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에 있는 힘줄을 다쳐 절어야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치셨다고 해서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않는다.

//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의 뜻은 무엇인가? 성경 본문은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에 주어진 이름이라고 읽혀진다. 이스라엘의 엘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스라는 이기다, 다스리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목적어로 취해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 라고 이해할 수는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져주시듯이 ‘그래 네가 이겼다 네 맘대로 해라’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야곱이 지금까지는 하나님과 및 사람들에게 지지 않고 살아왔지만 (하나님께는 불순종하며)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라는 의미로 주어진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라고 이해하면 가장 좋을 것 같다. 성도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다.

또 하나님은 야곱과의 씨름에서 싸움은 이기고 승부에서는 졌느냐 하는 의문도 든다. 씨름을 하는데 허벅지 관절을 쳤다면 반칙패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과 야곱의 씨름은 운동 씨름이 아니다. 하나님은 라반과 헤어져서 오는 야곱에게 이미 마하나임을 보여주셨는데, 야곱은 에서의 400명에 눈이 멀어 그만 마하나임에 대해 장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야곱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할 마하나임을 다시 간구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야곱과 함께 하신다고 답하셨을 것이다. 다만 근심 걱정에 야곱은 마하나임을 못보고 있을뿐이다. 두려움에 마하나임을 못보는 야곱에게 다시 마하나임이 야곱을 둘러 싸고 있음을 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축복이라고 생각된다. 마침내 야곱은 자신과 씨름한 그 사람이 마하나임의 대장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야곱의 씨름, 간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결국 내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순종의 고백이다.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한다. 인생길에서 차라리 다리를 저는 것이 하나님과 싸워 이기는 (불순종하는) 것보다 낫다.

사족: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기전에 에서에게 먼저 예물을 보내는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창세기 32:1-12

하란에서 칠일 길인 길르앗 산지는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 온 것이나 마찬가지 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아곱은 고향집을 향해 길을 간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 만난다.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했고 그 땅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다.

이제 고향 집이 멀지 않았다.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가 있는 고향집이 아닌 먼저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 사자를 보내 귀향 소식을 알린다. 야곱은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를 형 에서에게 주고 에서의 은혜를 받기 원한다고 전했다. 야곱은 에서를 형으로, 나아가 주라고 부른다.

에서에게 갔다 온 사자들이 에서가 사백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고 전했다. 야곱은 두려웠다. 야곱은 함께 한 사람들과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다. 그리고 조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기억하며 기도한다.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 옵소서. 야곱은 에서가 자신과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난다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아뢴다. 그리고 다시한번 주께서 말씀하신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라는 약속에 의지한다.

// 하나님의 군대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길에 야곱과 마주친 것일까? 하여간 하나님의 군대와 조우한 야곱은 용기를 내어 형 에서에게 사자를 보내 귀향을 알린다. 형 에서의 은혜를 입기 위해 형을 주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자들이 돌아와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마중나온다고 하자 바로 겁에 빠졌다. 겁에질린 야곱에게 더이상 마하나임이 안보였던 모양이다. 자구책으로 가솔을 두떼로 나눈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의 언약에 의지한다.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서원을 그래도 기억했던 것이다. 야곱이 믿을 것은 이제 언약밖에 없다. 그래서 기도한다.

야곱은 언약을 기억하는 것으로 기도의 첫머리와 마지막을 장식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에 먼저 감사한다. 그리고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에서 구원해 달라고  짧게 솔직하게 아뢴다. 자신이 은혜를 입어야 할 대상이 주인이라고 불렀던 형 에서가 아니라 주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성도의 기도도 언약을 기억하는 기도여야 한다.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가 우선되어야 한다. 기도제목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주님앞에 겸손히 우리 문제를 아뢰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창세기 31:36-55

라반이 드라빔을 찾지 못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제는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불러 나눴던 얘기를 라반에게도 한다. 지난 이십 년을 레아와 라헬을 위하여 14년, 양떼를 위하여 6년을 섬기는 동안 라반이 품삯을 열번이나 바꿨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야곱은  지난 육년동안의 섬김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야곱의 고난과 손의 수고를  돌아보신 결과라고 답한다. 그 하나님이 어젯밤 라반을 책망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한다.

라반은 끝까지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고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야곱과 언약을 맺는다. 돌기둥과 돌무더기를 쌓았다. 두사람이 언약을 맺은 곳을 갈르엣, 곧 증거의 돌무더기라고 불렀다. 또 이곳을 주하나님께서 살피시는 곳이라고 하여 미스바라고 불렀다. 라반은 야곱에게 자기 딸을 박대하거나 다른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돌무더기와 기둥을 사이에 두고 서로 침법해서 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라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나홀의 조상의 하나님께,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했다. 야곱은 그곳 길르앗 산에서 (갈르엣, 미스바)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고 밤을 지냈다. 라반은 다음날 아침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을 축복하고 다시 밧단 아람으로 돌아갔다.

// 라반이 아는 하나님은 조부 나홀과 백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을 통해 만난 이삭의 하나님이 전부다. 밤에 나타나 친히 말씀해 주셨음에도 그는 결국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야곱도 여전히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야곱도 하나님을 알아가려면 멀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 주실 때 그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각자의 드라빔을 버려야 한다. 라반 처럼 하나님이 드라빔을 잃어버리게 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드라빔에 집착하는 것은 두주인을 섬기는 것이요, 두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께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라반을 보라. 야곱에게 끝까지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돌아보신 결과가 아닌가? 나의 소유권을 내려놓고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사족: 증거의 돌무더기는 언젠가는 무너져야 할 것이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도 둘무더기가 쌓여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분명히 무너뜨리신 것 같은데 다시 더 높은 담을 쌓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평하기 위해서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한다. 당연히 교회가 손해를 감수하면서. 선교지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의 마음과 다르게 왜 파송하는 교회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교적으로 대하지 못할까? 교회가 먼저 담을 낮춰야 한다. 허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