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26-35

마태복음 26:26-35 (공동번역)

과월절 만찬 때,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셨다.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제자들에게 잔을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마실 그 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올리브 산으로 갔다. 예수께서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시며 오늘 밤 제자들이 다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주를 버려도 자기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오늘 밤 닭이 울리전에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자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장담한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주님 말씀대로 이루진다고 고백 못하고 만다. 내 고집으로 맹세 할 것이 아니라, 그러면 어찌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었어야 하는데, 주님이 맞는지 자신이 맞는지 싸우는 꼴이니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뒤에 베드로의 부인 사건이 기록되어서가 아니라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오늘 우리도 똑깥은 잘못을 하려든다. 주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르면 기도로 주님을 움직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불성설이다. 기도는 결국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어야 한다. //주를 따르는 것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의 실패담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의지적으로 주를 버리지 않아야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심을 신뢰하고, 그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야만 가능하다. 내가 스스로 주인되려고 하는 것은 곧 주님을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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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17-25

마태복음 26:17-25 (공동번역)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과월절 음식을 어디에 차리 좋을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성안에 들어가면 이런이런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 사람에게 그 집에서 과월절을 지내겠다고 말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과월절을 준비했다. 날이 저물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식탁에 앉으셨다. 식사를 나누며 예수께서는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몹시 걱정되어 저마다 자신은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지금 자신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의 아들(자신)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을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라고 하셨다.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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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말하자, 다들 ”나는 아니지요?” 하고 물었다. 물론 가룟 유다도 “나는 아니지요?” 하고 물었다. 나는 아니지만, 나의 영이 어떤 영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실족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열하나는 ‘주님, 나는 아니지요?’ 라는 물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여 구원에 이르렀다면, 가룟 유다는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라고 물었지만, 스스로를 속이고 (주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세상 근심으로 사망의 길을 갔다. //순종하는지 불순종하는지 우리 양심은 안다. 예수님께 물어볼 필요도 없다. 예수께서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유다에게 대답하신 이유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나의 양심에 하시는 소리에 귀기울이자.

마태복음 26:1-16

마태복음 26:1-16 (공동번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제 이틀만 있으면 과월절이 되는데 그 때에 사람의 아들이 잡혀가 십자가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무렵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가야파라는 대사제 관저에 모여 예수를 잡아 줄일 모의를 하였다. 그들은 백성이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니 축제 기간을 피하자고 했다.
예수께서는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다.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지 향유가 든 옥합을 가져와 식탁에 앉으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귀한 것을 낭비했다고 분개했다. 기름 값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자가 갸륵한 일을 했으니 괴롭히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지만 예수님 자신은 언제까지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자가 향유를 부은 것은 자신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에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에게사서 예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았다. 그 때부터 예수를넘겨줄 기회만 엿보았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모사재인이나 성사재천이다. 사람이 계획을 세워도 이루시는 분은 하늘(하나님)이시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예수를 죽이려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이미 하늘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셨다. 나병 환자들이 마을 안에 머물 수 없었으니, 시몬은 이미 깨끗함을 입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식탁을 마주한다는 것은 예수님은 몰라도 제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기 위해서도 임마누엘을 구해야 한다. //한 여자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옥합을 깨뜨렸다. 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 다시 읽으니 깨뜨렸다는 표현이 없다. ㅠㅠ) 과부의 두 랩돈이든 여자의 향유든 남김 없이 드린다. 천국은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야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아는 여인들이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갸륵하다고 하셨다. 갸륵하다는 ‘착하다. 선하다. 아름답다. 좋다’. 로도 번역되는 단어다. 하나님께 속한 단어다.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른 행동이라고 칭찬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여자의 갸륵한 행동에 딴지를 건다. 제자들이 나름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진심이었을까? 내가 선한 일을 해야 할 때 주저하게 만드는 것도 이런 제자들의 마음이 아닐까 반성한다. 기껏 소 한마리 얻자고 (은 삼십 닢이 당시 소 한마리 가격정도라고 하는 주석이 있다.) 예수를 판 유다와 연봉을 모두 쏟아부어 예수를 산 여인이 대비 된다. 누구를 본받을 것인가? 자명하지 않은가? 어제 말씀대로 우리도 가나한자들을 돌보는 것으로 예수를 살 수 있다. 그럴 수 있도록 임마누엘을 구하자.

https://quietwaters.blog/2023/03/31/

마태복음 24:31-46

마태복음 24:31-46 (공동번역)

사람의 아들이 영광가운데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왕좌에 앉으면, 모든 민족을 불러놓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임금은 자기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아버지께 볻을 받은 사람들이니 태초부터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 입혀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봐주었고 감옥에 있을 때 찾아주었다 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의인들은 주님께 언제 자신들이 그렇게 했는지 물을 것이다. 그러면 임금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은 왼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부르며 자기에게서 떠나 악마를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고 명하실 것이다. 임금은 그들이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언제 자신들이 주님을 돌보지 않았느냐고 따질 것이다. 임금은 여기 있는 형제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자신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30/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것이 꼭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말할 순 없어도, 주님을 위하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본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느끼기란 어렵다. 그러나 작은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임마누엘을 증거하는 것은 바로 작은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은 작은 자들과 함께 하신다. 따라서 작은 자들과 함께 하면 그곳에 계신 삼위 하나님과 당연히 함께 할 수 있다. 물질적이든 마음이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는 이유다. 천국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그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보이는 자기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일 4:20b 새번역) ‘임마누엘 임마누엘’ 말만하는 거짓말쟁이가 되지 말라고 하신다. 임마누엘의 증거는 확실하다. 바로 작은 자에게 선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은가?

마태복음 25:14-30

마태복음 25:14-30 (공동번역)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어떤 사람이 먼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고 결산하는 일에 비유하셨다. 그는 종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 얼마 뒤 주인이 와서 셈을 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고 말했다. 주인은 그 종에게 ‘잘했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도 주인은 똑같이 말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두려운 나머지 주인의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고 말하고 한 달란트 그대로 가져왔다. 주인은 그에게 호통을 쳤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착취하는 사람인줄 알고 있었다면 돈을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올 때에 이자라도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며 그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예수게서는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셨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을 쓸모없는 종이니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으라고 명하셨다. 그는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오늘도 주인은 떠난다. 종의 입장에서는 주인이 하나에서 열까지 매 순간 이래라 저래라 명령해주면 일하기 쉽다.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편하다. 그러나 주인이 자리를 뜨면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은 불편할게다. 그러나 주인을 안다면 주인의 부재중에도 주인이 있을 때와 같이 일할 수 있다. 우리는 물리적 임마누엘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마라나타를 기도한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영적 임마누엘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영원에 잇대어 사는 것이다. //충성스럽다는 것은 알겠는데 ‘착하다’라는 표현은 쉽지 않다. ‘착한’ 이라는 단어는 ‘선한’으로도 번역되는 단어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구하는 부자청년에게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착한 종은 선한 종이 되고 선한 종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내 뜻대로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으로 지발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충성하는 종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악하고 게으르다고 평가한다. 선하지 않으니, 곧 선하신주인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니 악하다. 그는 주인을 착취자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착취자의 의도대로 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게으를 수 밖에 없다. 정당한 평가다. //어제 나는 왜 상식적 판결을 앞두고서도 뭔가 불안하고 찜찜해 했을까? 이 세대가 악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도 비상식적인 기득권을 아직 다 못 내려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있는 사람은 더 받는다고 하시는데 무엇이 있는 사람일까?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의 유무다. 많이 받고 적게 받고의 차이가 아니다.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많은 사람이다. 결국 임마누엘의 정도다. 임마누엘을 누리는 시간을 늘려갈 수도 있지만, 줄어들 수도 있다든 것을 기억하자. 임마누엘을 누리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도 말씀 앞에 선다. 임마누엘을 누리기 위해.

https://quietwaters.blog/2023/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