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1-12

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들어가 가르친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1장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기억한다고 썼다. 바울일행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능욕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힘입어 데살로니가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지금 수신자인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열매라고 한다.

바울은 편지를 하는 이유를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동기 혹은 속임수가  아니라고 먼저 밝힌다. 대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신 일이라고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미 바울일행이 아첨이나 탐심의 탈을 쓰고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이 아첨이나 탐심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신다고 편지한다. 바울은 자신들은 일관되게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다고 말한다.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사도이나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는 대신 온유한 어머니가 자녀을 양육하듯 일했다고 강조한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해서 단순히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한다고 말한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신들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신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하듯이 자신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한 수고와 애씀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편지한다.

바울은 자신들의 사역을 첫번재로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었다’라고 평가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증거, 그 증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도 증인이 되신다고, 하나님도 알고계신다고 편지한다. 바울은 두번째로 자신들의 사역을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는 권면과 위로와 경계’ 였다고 평가한다.  바울은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과 위로와 경계로 가르쳤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친히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게) 행하게 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요약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일행의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훈계로 세워졌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일행이 떠난 후에도) 그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훈계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합당하게 (하나님의 잣대에 맞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게 행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 (1-10)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편지한다. 수신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다. 바울서신 특유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로 문안한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한다고 편지를 시작한다. 세부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기억한다고 적는다. 기억하는 이유를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들의 모임이요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교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택함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이 전해 받은 복음을 이론적으로만 배운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실천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스스로가 아는 바와 같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주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엇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된 것을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도 본받았다고 편지한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주의 말씀이 전해졌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증거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씀을 가르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가르침에 따라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원의 주로 하늘로부터 다시 강림하실 것을 어떻게 기다리는 지에 대한 믿음의 소식을 들었다고 편지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임마누엘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말씀에 따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죽으시고 부활신 구세주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을 기대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시편 126 (1-6)

시인은 예루살렘에서(시온에서)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들의 귀환에 ‘꿈인지 생신지’ 라고 노래한다. 그날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은 함박웃음을 지었으며 흥겨운 노래를 불렀다. 아마 감사의 찬양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포로귀환을 지켜보던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 계셔서 행하신 큰일에 놀라워 했다. 시인은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기쁨을 노래한다. 그리고 잡혀간 포로들이 사막에 물이 흐르듯 돌아오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의 노래를 한다. 그런데 시인은 왜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고 노래할까? 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고 노래할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 예레미야 선지자를 떠올리게 한다. 씨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시인은 예레미야 선지자들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거두어 들이신다 (성취하신다).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씨가 뿌려지지만 말씀 하시는 이는 주님이시요, 주님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그래서 시인은 독자들에게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라고 권면의 노래도 하는 것이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세상의 조롱과 핍박 속에서. 때로는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 들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씨를 뿌린 사람이 직접 단을 거두어 들이지 못할지라도 완전한 성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지체라면 (이 땅에서의 죽음도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일에 나도 속한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추수의 노랫소리를 흥겹게 부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순종의 삶이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러면 기쁨으로 약속을 받는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렵다. 눈물나는 일이다. 기쁨으로 거둘 소망이 없이는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노래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거두신 (성취하신) 말씀의 열매들을 보라고…

 

시편 125 (1-5)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당연히 흔들리지 않는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에워 감싸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원히 감싸(품어) 주신다. 하나님의 품안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든든하다. 시온 산, 하나님의 품은 곧 하나님나라다.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에게는 악인들의 통치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이 악한 일을 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에 시민권을 둔 시인을 하나님을 지켜주신다.

시인은 노래한다. 선한 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해 달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악인들은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이다. 악인들은 의인들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악인들끼리 몰려다닐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에게는 평강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2:20 공동번역)

시편 124 (1-8)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편에 계신(셨)다고 노래한다. 그것도 대적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 우리편에 계셨(신)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만에 하나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다면도 노래한다. 대적들의 노여움이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몸뿐만 아니라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고 한다. 홍수정도가 아니라 대형 쓰나미가 덮치듯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고 반복한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셨기 때문에 굶주린 사자의 입에서 우리가 살아났고 사냥꾼의 올무에서 놓임을 받았다고 노래한다. 내가 발버둥처서 올무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올무를 끊어주신 분이 있다고 한다. 시인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고 노래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편지했다.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편에도 계신다. 우리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실뿐 아니라 우리 영혼의 갈급함도 채워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편에 계신 이유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편지했던 것이다. 당시 로마성도들은 기록된 말씀처럼 (시 44:22)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도들이 넉넉히 이겼다는 것을. 시편기자도 노래했고 바울도 로마성도들에게 편지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편에 계셨(신)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우리 편에 계신다고.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