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9:35-10:14

사관은 9장 말미의 사울왕의 족보를 언급해 놓고 10장에서 돌연 블레셋과의 전장에서 사울과 세아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가 전사한 사건을 기록한다. 9장 말미의 족보를 보면 사울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다. 막내?가 ‘에스바알’이다.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은 이스보셋이다. (사울은 막내?의 이름마져도 ‘바알의 사람’이라고 지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스보셋’ 즉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럽게 살았다는 왕명을 붙인 모양이다.)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이 쏘는 화살을 맞았다. 사울은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에게 죽는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해서 부하에게 자신을 찔러달라고 부탁하나, 부하가 두려워서 사울을 죽여주기를 원하지 않자, 자기 칼을 뽑아 자결했다. (부하도 사울을 따라 자결했다.) 사관은 이 사건을 ‘사울과 그의 세아들과 그 온 집안이 함께 죽으니라’ 라고 정리한다.

패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망가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성읍들을 차지했다. 다음날 블레셋 사람들은 길보아 산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사울의 옷을 벗기고 그의 머리와 갑옷을 취한 후 전령을 블레셋 땅 사방으로 보내 승전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사울의 갑옷은 블레셋 사람들의 신전에 그의 머리는 다곤의 신전에 달았다.

길르앗야베스 (모든) 사람들도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들었다. 그들은 블레셋에 용사를 파견하여 사울을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두어 야베스로 가져와 장사하고 일주일간 금식했다. 길르앗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을 애도한 것과 별개로 사관은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기록한다. 사울의 죄목을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 라고 밝힌다.

사관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다고 한다.

// 사울은 적어도 길르앗야베스 사람들에게는 존중을 받았다. 이것도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삶과 죽음은 하나님과의 교제하느냐 아니냐로 결정된다. 오늘 말씀으로 적용한다면 영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께 기도(묻는) 삶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헛된 것을 따르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 묻는 삶은 이미 영벌이다.

역대상 9:1-34

사관은 온 이스라엘 족보가 이스라엘의 왕조실록에 (유다왕조 포함) 기록되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유다가 범죄함으로 바벨론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언급한다.

다시 돌아온 정착한 사람들을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이라고 한다. 다른 번역에는 이스라엘 사람들 일부와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과 느디님 사람이라고 하는 것으로보아 전부가가 아닌 일부분만 귀환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 일부는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 자손들이었다. 남 유다왕국에 속한 두 지파와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과 그 형제 므낫세를 언급함으로써 일부이기는 하지만 귀환자들이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일부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 하다.

그리고 바로 제자장들 명단이 나온다. 제사장들은 1760명이었다. 제사장들에 이어 레위인들이 나오는데 문지기, 성전 기구와 모든 그릇과 고운가루와 포도주와 기름과 유향과 향품을 맡은자, 향품으로 향기름을 만드는 자, 전병을 굽는 자, 떡을 진설하는 자, 찬송하는 자 등으로 구분되었다.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맡았던 직무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사관은 이들 212명의 문지기들이 택함을 입었다고 한다. 문지기로 택함을 입었다. 이렇듯 성전 일에는 귀천이 없다. 저들에게는 성전 일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보다 가까이 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가? 교회 일에도 귀천을 따지지는 않는지 돌아본다.

// 아내가 한국으로 … 하람이와 다현이는 여전히 집에 있다. 학교에 가야할 시간이 다가 오는데… 홈캠으로 아이들이 늦장부리는 것을 본다. 그래도 착하다.

 

역대상 7,8

잇사갈 베냐민의 아들들은 이름과 함께 용사, 우두머리, 큰 용사, 용감한 장사 라는 토가 달린다. 대대로 무관의 집안이었나보다. 아니면 사관이 이들 지파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기록이 국방부 병적부(병역기록) 밖에 없어서였든가.

납달리의 아들들은 달랑 한줄밖에 없다.

므낫세의 아들들의 명단도 간단하다. 에브라임 아들들 족보에서는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한 엘르앗이 가드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한 내용이 포함된다. 다른 족속에 대한 탐욕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관은 에브라임이 이 일로 여러날 슬퍼했다고 기록한다. 에브라임은 아들 엘르앗 사건으로 슬퍼했으나 딸 세에라가 벧호른 우세세에라 두성을 건설한 사건을 기록함으로 슬픔에서 회복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을 추가한다. 그리고 모세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가 에브라임이 슬픔중에 낳은 브라아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을 밝힌다.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8장에 들어서 베냐민의 족보가 다시 나온다. 7장에서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여디아엘 세사람이며’ 라고 했는데, 8장에서는 ‘베냐민이 낳은 자는 맏아들 벨라와 둘째 아스벨과 셋째 아하라와 넷째 노하와 다섯째 라바이며’ 라고 첫째 벨라의 이름만 같고 다른 아들들은 이름도, 아들의 수도 다르게 나온다. 다른 책도 아니고 같은 책에서 이어지는 장에서 이렇게 다른 족보를 기록한 사관의 의도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앞에서는 아마도 큰 용사라는 것을 운운한 것으로 보아 군대 조직에 관련된 사람만 적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도 이름이 다른 것은 어찌 이해해야 할지. 베냐민의 첫째 벨라의 아들들의 이름과 수도 7장과 8장은 많이 다르다.

하여간 사관이 8장 (40절) 전체를 베냐민지파의 족보에 할해한 것은 아마도 이스라엘 첫번째 왕 사울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된다.

역대상 5,6

오늘도 족보 2장을 읽어야 한다. 분량도 어제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 첫두절부터 생각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렵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목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정리하면 태어난 순서로는 르우벤이 장자다. 출애굽 후 집안을 일으켜서 왕가를 이룬 것은 유다다. 그렇지만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된 자는 요셉이다.

태생의 순서도 중요하다. 신명기에 보면 사랑하는 자의 아들에게 함부로 장자권을 주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한다. 미움받는 자의 태생적 장자에게 두배로 상속하라고 명하신다.(신21:16,17)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태생의 순서에 따라 장자권이 있다고 하지도 않으신다. 이삭도 형 이스마엘이 있었고 이삭이 태생의 순서에 따라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했지만 막으셨고 요셉도 두 아들을 태생의 순서에 따라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게 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태어난 순서를 보면 알 수 있는 듯 하여도 순서가 다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장자의 명분이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되었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받을 때 요셉은 물론 형제들보다 뛰어났고 주권자였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장자권의 이유는 아니었다는 뜻이리라.  요셉이 두배로 (두 아들이 열두지파에 포함되는) 상속을 받았다는 것에서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있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대에 가면 결국 유다를 통해 예수님이 오신다. 그러니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

태어난 순서가 아니라면, 세상에서의 뛰어남과 주권자가 아니라면 장자의 명분은 결국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주어진다. 이렇게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신다. 전 인류의 장자의 명분을 예수님이 가지신다.

3절은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라고 시작한다. 태어난 순서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5장 마지막은 (18-26절) 단순 족보가 아니라 요단 동편을 차지했던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의 절반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두지파 반이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을 때 승전하고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았지만, 그 땅을 차지한 후에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 땅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에 의해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가로 쫓겨났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족보에 이런 내력을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교훈을 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6장 레위의 족보는 더 기네.

역대상 3,4

이어지는 족보. 더군다나 2장 분량.

오늘은 주석이 가장 길게 달린 4장 8,9절 야베스만 주목하기로.

“야베스는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게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새번역)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결과가 무엇인가? 야베스가 형제들보다 귀중한 자가 된 것이다. 새번역은 존경받는 자 공동번역은 세력있는 사람으로 번역한다. 야베스는 이름 그대로 고통가운데 태어났다. 야베스의 어미니가 겪은 산고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어머니가 겪는 산통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개인적인 적용은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슬프게 시작한다.

그런데 가장 존귀한자, 존경받는 자, 세력있는 자가 된 것은 또한 무슨 이유인가?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간구를 이루어주신 결과라고 한다. 야베스가 구한 것의 핵심은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가 아닐까? 우리 눈은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주시고’에 꽂혀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죄 가운데 태어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것은 구원말고 또 무엇이 있으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는것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야 말로 형제들 중에서 존귀한 자, 존경 받는 자, 세력있는 자가 되는 길이 아닐까?

야베스의 기도를 개인적으로 적용한다면 지경이 넓어지는 복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는 것일 것이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소서는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