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2

남의 족보를 따라가는 것만큼 지루한 일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족보외에는 성경의 기록에 다시 언급되는 일도 드물다.

오늘은 이스라엘(야곱)의 열두아들의 족보가 이어진다. 열두아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다윗이 속한 유다의 아들들부터 적어나간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했다. 처음부터 순혈주의에서 벗어난 족보다. 물론 수아에게서 난 에르 오난 셀라의 가계는 자신의 대에서 끝난다. 당연히 족보에서 파내어야 했을 유다의 맏아들 에르( 창세기에서는 엘)에게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다’ 라는 주석을 덧붙인다. 한술 더 떠 아이성 패전의 빌미간 된 갈미의 아들 아갈(여호수아서에는 아간)의 이름도 빼지 않는다. 아갈에게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 라는 주석이 붙는다.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아버지 이새의 여덟명의 아들 중 막내였다고 기록하는데 역대상에서는 다윗을 일곱번째라고 적는다. (한명은 족보에 올리기 전에 일찍 죽었던 모양이다.)

세산의 경우 아들이 없었지만 애굽종 야르하라를 우리식으로 하면 데릴사위로 삼아 대를 이어간다. 한마디로 유다는, 다윗가문은 순혈주의는 아니다.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다윗의 증조부 보아스는 모압여인 룻을 아내로 맞았고 보아스의 아버지 살몬은 여리고 여인 라합과 결혼해서 보아스를 낳았다. (유다때부터 통혼이 전통인 집안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

이스라엘(야곱)의 열두 아들의 족보다. 처음으로 다윗이 속한 유다가 언급된다. 유다의 후손도 당대에서 가계가 끝난 에르와 오난과 셀라를 족보에서 파내지 않고 언급한다. 이들 셋은 유다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유다와 이방여인과의 결혼은 후대에도 이어진다.
 
오늘 족보에는 이름이 없지만 살몬이 여리고 성 라합을 아내로 맞았고 보아스는 모압여인 룻을 아내로 맞는다. 세산은 아들이 없자 종이었던 애굽사람 야르하라를 우리식으로 하면 데릴 사위로 맞아 대를 이어간다. 혈통적으로 순수하지 않다.
 
유다의 첫째아들 에르(엘)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다’ 라는 주석을 달렸다. 아이성 전투의 패전의 빌미가 된 갈미의 아들 아갈(아간)에게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라는 토가 달렸다. 영적으로도 순수하지 않은 집안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역대상 1

정확히 기억은 아니지만 선배 한분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지 미래가 아니라고 했다. 과거를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과거에 대한 바른 해석과 반성과 그에따른 적용에 따라) 다가올 미래가 달라진다는 요지였을 듯. (담에는 메모로 남겨야 겠다.)

역대상을 펴니 족보로 시작한다. 안동권씨 족보도 안보는 시절에 남의 족보를 봐서 뭘하겠는가? 그런데 한 나라의 족보가 아담에서 시작한다. 사람(아담)의 족보라는 선언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족보를 창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들의 왕조를 창조와 연결한다. 나름 과거를 다시보려고, 바꿔보려고 (과거청산을) 시도한 것이리라.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 라고 기록하고 (28) 이스마엘의 족보도 포함시킨다. 이삭의 아들, 이스라엘의 형 애서의 족보도 끌어안고 에돔 왕들도 (족장들도) 기록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기간 동안 민족의 신으로만 섬겼던 야훼 하나님(신)을 창조주 하나님(신)으로 새롭게 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성부 하나님을 기독교라는 종교의 신으로 가두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 성자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을뿐 아니라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무엇보다도 성자 예수님도 창조주 하나님(신)이 아니신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7) 바울의 기도처럼 제가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소서. 보혜사 성령이여 도우소서.

아가 8:5-14

인생에 고달픔이 없을 순 없다. 그러나 의지할 사랑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인생을 바꿀수 있다.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이선희 인연 가사 중에서) 고달픈 인생길에서 주님은 선물이다.

화자(남편과 아내)는 사랑이 결혼서약이요 결혼반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노래한다. 죽을 때까지 지켜야할 언약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돈으로는, 재산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세상의 비웃음만 사는 시대가 분명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음 화자는 여자의 오빠들로 바뀌어 혼전 순결을 노래한다. 여자는 자신은 혼전순결을 지켰다고 자신있게 노래한다. 그래서 나무랄데 없는 완전한 사랑을 얻었다고 노래한다. 혼전순결에 대한 생각도 분명히 변했다.

저자는 다시한번 솔로몬 왕을 타자화 시킨다. 솔로몬은 비옥하고 넓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고 일꾼들을 고용해서 포도원을 일구고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포도원을 사용하게 하지만 자신은 오롯이 자신만의 소유인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고 비교한다. 많은 왕비와 후궁과 시녀들과의 사랑이 아닌, 자신만의 사랑을 노래한다.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한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빨리 와달라고 노래한다.

// 주님과의 결혼서약에 성실하라고 하신다. 주님은 죄인된 우리들을 사랑해 주셨지만 주님을 다시 만날 때까지는 순결을 지키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 목소리 듣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를 노래해야 한다.

아가 7:11-8:4

부부의 삶은 남편과 아내 누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7장 11-13절은 남자의 일터인 들이요 8장 1-3절은 친정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7장 11-13절은 남자의 일터인 들이라고 했지만 여자도 포도원에서 일하지 않았던가? 일터는 남자만의 영역이 아니라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곳이다. 아내는 들에서 오히려 남편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다. 그리고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가정에서는 오히려 남편의 보호를 받는다. 남편에게 안긴다. (바깥 일은 몰라라하고 집안에서 주장하지 않는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말해 남편과 아내는 일심동체 부부의 꿈을 꾸는 삶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꿈을 꾸는 동상이몽이 아니다. 남편은 일, 여자는 가사로 구분되어질 수 없다. ‘일은 일이고 사랑은 사랑이다’ 라고 구분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역할이 달라도 부부는 같은 꿈을 꿔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부부의 사랑이다.

세상은 부부의 사랑을 깨려고 한다.

 

아가 6:13-7:10

화자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 구절들이다. 남편의 아내 예찬에 무리들은 술람미 여자를 보고자 하나 남편은 단호하게 술람미 여자는 춤추는 무희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다시한번 여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이것은 오직 남편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남자는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 구나’ 라고 노래한다. 한 몸된 부부간의 사랑이다.

부부관계는 공개할 부분이 있고 입다물어야 할 부분이 있다. 성도의 간증도 마찬가지다. 임마누엘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함부로 보편화하고 남에게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무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술람미 여자의 외적 아름다움뿐이다. 그들에게 술람미 여자는 무희밖에 될 수 없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사랑아’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 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