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0

[시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는 어렵다.

하나님 돌이키소서
얼굴을 비춰주소서
구원하소서

구원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려면 만나야 한다. 만나려면 하나님께 가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만나주시고 구원해 달라고 시편기자는 노래한다.

[시80: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전능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얼굴 빛에는 ‘광채’를 더한다. (돌이키시고와 회복하여 주시고는 히브리 단어로 동일한 듯)

[시80: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만군의 하나님께 있다. 내가 돌이켜서 구원을 받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셔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하소연할 수 밖에 없다. 나 스스로는 돌이킬 수 없는 길. 주님의 빛 없이는 살 수 없는길. 구원은 결국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인데…

세상의 비방거리가 되어버린 이유가, 멸망이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 제 욕심으로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 뜻보다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뜻을 놓지 못한다. 그러니

하나님 회복시켜 주소서
그래야 빛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소서.

[요 21:1-14] 세번째

[요 21:1-14] 세번째

디베랴 호수에 일곱제자가 모였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명하셨기 때문이리라. 네명은 어디에?
그러나 먼저 가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늦으신 것일까 제자들은 어부로 돌아갔다. 일곱명중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빌립에게 따졌던 나다나엘도 언급된다.
베드로가 고기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모두 함께 갔지만 밤새 한마리도 못잡았다. 날이 새어갈 때, 아직 어둑어둑 할때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으나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물고기를 못잡았다고 하자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하셨다.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잡혔다.
요한이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마치 물위를 걸을 마냥 겉옷을 두른채 바다로 뛰어 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잡은 물고기를 그물채 끌고 배를 타고 육지로 왔다. (잡힌 고기가 너무 많아 배에 올리기에는 배가 작았다.)
예수님께서는 아침으로 떡과 생선을 굽고 계셨다. 방금 잡은 생선도 가져오라고 하자 베드로가 얼른 가져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먹이셨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아직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부활에 대해 물어보지도 못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의 세번째 만남이었다.
삼세번! 부활의 주님은 여전하셨다. 분명 새로운 육체로 부활하셨건만 제자들과의 만남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과 비교하여 달라지지 않았다. 주님이 달라지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변해야 한다.) 제자들에게 이별연습을 시키시나보다. 승천하시기 전에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시기에 시간이 부족할 듯 싶은데… 간간히 나타내신다.
?! 이 많다.

[요 20:24-31] 도마

[요 20:24-31] 도마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곳에 없었다. 여드레가 지날동안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다른 제자들을 믿지 않았다. 왜 예수님께서는 일주일동안 잠잠하셨을까?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도마도 있는 곳에 나타내셨다. 닫힌 문으로 오신 예수님은 평강을 먼저 선포하셨다.

평강 평안 평화 무엇으로 번역하든 관계적 가치다. 대립되는 가치가 전쟁 다툼이다. 내적 자아와의 다툼도 있겠으나 평강은 분명 공동체적 가치다.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 ‘서로 사랑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수님께서는도마의 방법으로 부활의 주님을 증명해 주셨다. 부활에 대한 불신과 다른 제자들에 대한 불신을 버리고 믿는자가 되게 하셨다.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는 자의 고백을 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셨다. 다분히 후대 우리들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다.

우리 역시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불신한) 도마와 같이 부활의 주님을 목도한 초대교회 믿음의 증인들의 말을 믿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복음서를,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불신이 당연하다. 그래서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을 간구해야 한다.

요한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라고 복음서 기록 이유를 밝혔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의 복을 누리는 일종의 방법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을수록 믿음이 생기고 믿을수록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알게 된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 실천이 따른다) 이것이 영생이다. 이것이 믿는 자들이 추구해야 할 복이다.

//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까지 더 자주 제자들을 만나 하나님나라에 대해 가르치셔야 했는데… 드문 드문 나타나셨다. 가르침은 이미 끝났고 성령의 깨닫게 하심만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 21:11-23] 부활 – 내 형제

[요 21:11-23] 부활 – 내 형제

막달라 마리아! 빈무덤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리러 갔던 마리아가 무덤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경주하듯 달려온 베드로와 요한보다 한참 늦게 다시 온 듯 하다.) 그가 왔을 때 두 제자는 각자 집으로 돌아간 후였던 것 같다. 그녀는 다시 울면서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다. 먼저는 보지 못했던 광경. 두 천사가 무덤 안에 있었다. (그럼 두 제자는 왜 천사들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고 마리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몰라 운다고 답했다. 보통 천사를 보면 무서워 떤다. (심지어 마태는 무덤을 지키던 자들 천사들이 돌을 굴려 무덤을 열 자 무서워하며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이 순간 마리아는 천사에 대한 두려움보다 예수님에 대한 열망이 더 컸던모양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 뒤편에 서 계솄다. 마리아가 뒤로 돌이켜 예수님을 보았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서인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천사들 대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이 순간 만큼은 동산지기라도 ‘주님’이 되는 순간이었다. 예수님 시체를 찾을 수 있다면 세상의 낮아보이는 사람에게도 ‘주여’라고 부를 수 있다.

“마리아야” “선생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부활의 몸을 드러내셨다. 육을 입으셨으나 썩지 아니할 새로운 몸을 입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셨다. 새로운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더 이상 이 땅에 얽매이지 않는 다는 뜻일 것이다. 그 어떤 장애물도 방해할 수 없고 심지어 중력도 거스리는 몸! 곧 승천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셨다.

제자들. 처음에는 종에 비유되었다. 그리고 친구라고 부르시더니 이제는 ‘내 형제’라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아멘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대로 말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부활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며 모여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보여 주셨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주변 상황은 달라진게 하나도 없는데도 내적인 변화가 가져온 결과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평강이 있기를 축복하고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셨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구절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평강은 성령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이며 용서를 함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성령을 받을 수도 평강을 누릴 수 없다.

“아바 아버지” 부활의 주님이 나도 형제라 부르신다.

[요 20:1-10] 빈 무덤

[요 20:1-10] 빈 무덤

안식후 첫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요한은 무덤을 찾은 이유를 기록하지 않지만 마가는 (다른 마리아와 살로메와 함께)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라고 적었다. 그래서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누군가 옮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달려 갔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고 있어야 할 돌이 옮겨져 있었다. 마태는 큰 지진이 일어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었다고 기록한다.(역사의 현장을 재 구성하기 위해서는 4복음서를 다 들여봐야 한다.)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와 주님께서 무덤 안에 없다고 전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향해 마치 경주하듯 달려갔다. 요한이 빨랐지만 무덤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 보았을 뿐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뒤 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았다. 세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기 보다는 살아나신 것이 틀림없었다. 요한도 따라 들어와 빈무덤을 확인했다. 요한이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은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덤에 없다는 단순한 사실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당시 베드로와 자신이 성경에 그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베드로와 요한도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빈 무덤을 뒤로 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부활절 아침이다. 빈무덤만 있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빈무덤의 첫 목격자 마리아나  각자 집으로 돌아간 두 제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된다. 그래도 나에게는

부활의 아침이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