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0:14-29

왕상 10:14-29

솔로몬의 세입금의 규모가 666달란트라고 사관은 기록한다. 이 숫자를 그대로 믿을 이유는 없다. 666은 완전한데서 (777에 비하여) 뭔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부족한 부분은  상인, 무역상, 주변 나라의 왕들과 고관들로부터도 금을 조공이든 선물로든 받아 채웠다. 금이 얼마나 많았으면 큰 방패, 작은 방패를 만들고, 상아로 만든 보좌도 금으로 입혔고 모든 그릇을 금으로 만들어 사용했을까? 사관은 금이 많은 이유로 삼년에 한번 무역을 통해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 왔다고 부연설명한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는 왕보다 큰지라”[23]

드디어 재산이 지혜를 넘어섰다. 스바의 여왕 사건의 기록 때만 하여도  ‘지혜와 왕궁’’, ‘지혜와 복’으로 사관은 솔로몬의 지혜를 부귀보다 먼저 기록하였다. 그런데 드디어 역전되어 솔로몬의 부귀가 지혜보다 먼저 언급된다.

세상사람들은 이제 지혜와 부귀를 동일시 여기게 된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물을 가지고 솔로몬을 방문했다. 지혜가 있는 곳에 물질이 있었는데 물질이 있는 곳에 지혜가 있다고 바뀐 것이다.

솔로몬은 병거와 마병도 모았다. 애굽과의 거래를 통해 말을 수입했으며, 주변 나라들에게 되팔아 이익을 남겼다.

솔로몬 왕은 신명기 17:16,17 이스라엘 왕이 하지 말아야 할 것 첫번째인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는 말씀을 어긴 것이다. 두번째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다음에 나오겠고 세번째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는 말씀도 어겼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고 주신 지혜를 부귀영화를 쌓는데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면서 부귀영화는 거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냥 따라 오는 것이 부귀영화인데…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로 부귀영화를 쌓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주변을 봐도 그렇다. 똑똑한 머리는 국민을 섬기라고 주셨는데, 자신의 부귀영화를 쌓는데 사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참 듣지 않았나.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저축은행이나, 영재학원이나 뭐 그런데 사용되는 이유가 달리 있을리 없다. 솔로몬의 원래 이름은 ‘샬롬’ 평화 평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여디디야’라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아명도 있다. 이 멋진 이름이 ‘꾀와 부귀영화’로 바뀐 것이다. ㅠㅠ

왕상 10:1-13

왕상 10:1-13

스바의 여왕. 스바가 어딜까? 에디오피아 아니면 예멘? 써놓고 보니 커피로 유명한 곳이다. 한국에선 예멘 모카 마타리 커리를 쳐주는데, 스바도 에디오피아보단 예멘지역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있다.

이 남방여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솔로몬을 방문한다. (삐딱하게 생각하면) 남방여왕은 성전의 화려함으로 말미암은 (성전이 곧 ‘하나님의 이름’이란 이름으로 소문나지 않았을까?) 솔로몬의 명성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남방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를 보고 놀랐다. 직접 보고 들은 후 하나님의 찬양하였다.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스바의 여왕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기뻐하시고 왕으로 세우신 이유를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나님께 찬양했다.

답을 꼭 집어내었다.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는 정의와 공의를 해하게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의 꿈의 대화의 결과다.

스바의 여왕과 솔로몬의 이야기는 많은 전설를 낳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남방여인을 언급하셨다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눅11:31]

세상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도 수 천리를 마다하고 먼 곳에서 솔로몬을 찾아 오는 사람이 있는데 지척에 있는 진리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신 내용이다. 시들고 쇠할 솔로몬의 영광을 듣고 보고서도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부귀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음이라고 찬양했는데 우리들은 지혜와 부귀에게만 관심있지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래 뜻에는 관심을 기울이기는 하는 것일까?

왕상 9:10-28

왕상 9:10-28

솔로몬과 두로왕 히람과의 관계가 참 재미있다.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 건축에 필요한 백향목, 잣나무, 금 등을 공급해준 히람에게 갈릴리 땅에 있는 마을 스무 곳을 히람에게 주었다 히람은 그 땅이 맘에 들지 않아 그 곳들의 이름을 ‘가불’땅이라고 불렀다. 메마른 땅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히람은 금 일백이십 달란트를 솔로몬에게 보냈다. 무슨 거래가 이런지. 그냥 정리하면 히람왕은 다윗왕국의 속국이었을 것이고 솔로몬이 원하면 백향목이고 금이고 다 빼앗을 수 있었을 것인데 이런 거래를 한 것은 건축자재 이상으로 두로왕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건축 뿐 아니라 밀로, 예루살렘 성, 하솔, 므깃도, 게셀, 벧호른, 바알랏, 다드몰, 국고성, 병거성, 마병의 성들… 자신이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했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사관은 바로의 딸, 솔로몬의 아내에 관련된 게셀 이야기를 삽입한다. 그만큼 솔로몬 시대는 바로의 딸의 영향을 받았다는 반증이다.

솔로몬은 이런 대대적인 건축을 위하여 역군, 일꾼들을 모집해야 했는데,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진멸하지 않고 남겨둔 아모리, 헷, 브리스, 히위, 여부스 사람들 중 남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역군으로 사용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노예로 부리지 않았고 군인과 지휘관으로 삼았다. 솔로몬의 일을 감독하는 우두머리 인원만 오백오십명에 달했다.

사관은 바로의 딸의 이야기를 한번 더 언급한다. 다윗성에 머물 던 바로의 딸을 솔로몬궁으로 데려오고 이어서 밀로를 건축하였다고 한다.

사관은 느닷없이 솔로몬이 일년에 세번씩 전제와 감사제를 드렸으며 이에 성전 짓는 일을 마쳤다고 기록한다. 성전을 언급하면 모든 일이 다 괜찮다는 뜻일까?

솔로몬은 바다를 통한 무역에 까지 그 세력을 넓혔다. 그래서 여전히 히람과의 거래가 필요했던 것 같다. 히람은 무역 한번에 금 사백이십 달란트를 벌어 솔로몬에게 주었다. 사백이십달란트면 15톤 정도된다. 한 달란트가 20억이 조금 넘는 가치를 지녔으니 1조쯤 될려나.

하여간 솔로몬과 두로왕 히람의 관계에서 당시 애굽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정말 증거 없는 상상이다. 그래도 나중에 살펴볼 가치가 있을 듯.

왕상 9:1-9

왕상 9:1-9

하나님께서 기브온에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심 같이 성전에서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사관은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1]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기록한다. 그동안 적어도 강산이 두번은 바뀌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서론: 내가 너의 기도와 간구를 들었다. 그래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성전에 두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본론: 1) 솔로몬이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면 이스라엘 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솔로몬 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견고할 것이다. 2) 솔로몬 당대와 후대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순종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성전이라도 던져버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겠다.

결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면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그 백성에게 내리신다.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언약을 반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변함없은 하나님이신데 솔로몬이 변한 것일까? 사관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신 때를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라고 기록했다.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 아마도 한창 교만해 질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장소가 성전이다. 왜? 솔로몬이 성전에서 자고 (혹은 졸고) 있었을까? 단순히 절기를 따라 제사를 드리러 갔다면 성전에서 잘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성전의 화려함에 취했거나, 손님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함께 방문했다가 졸았나?

하여간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기존의 언약만 일깨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을 경우의 심판에 대해서도 언급하신다.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불순종의 댓가다. 이스라엘은 끝까지 ‘성전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도, 다른 선지자들의 예언에도 평화를 평안을 의심하지 않았다. 설마 하나님께서 진짜 성전을 던져 버리실까?”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불순종은 심판이고 멸망이다. 설마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내가 진짜 구원에서 떨어질까? ‘성도의 견인’은 순종의 열매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7:21] 행하는 사람.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들이다.[마7:24-26] 구원의 약속 성경구절을 암송한다고 구원 받은게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마7:20] 그래 삼십여년전에 구원받았다 하자. 오늘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와 네 자손이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등을 돌리거나. 내가 네게 일러준 내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곁길로 나아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숭배하면, 나는, 내가 피로 값을 주고 산 교회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자들을 끊어 버릴 것이고, 내 이름을 기리도록 거룩하게 구별한 교회라도 외면하겠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겠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과거형에 머물러서 안된다. 현재형이고 미래형으로 이어져야 한다.

왕상 8:54-66

왕상 8:54-66

솔로몬의 기도는 하나님에 앞에 무릎을 꿇는 간구였다. 무릎을 꿇는다는 이 단어는 왕상에서는 54절과  하나님께서 이세벨에게 낙담한 엘리야 선지자에게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기 아니한 자니라.” [19:18] 두곳에 나온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룄다. 이제 그는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복한다.

서론

여호와를 찬송하라 – 하나님의 /좋/은/ 약속은 하나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이루어졌다.

본론

  1.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떠나지 마시고 버리지 마옵소서
  2. 하나님 우리의 마음이 주께로 향하고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게 하옵소서.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옵소서
  3. 우리의 기도가 주야로 하나님께 가까있어서 매일의 삶에 필요한 것을 살펴주십시오.

결론

                세상 만민이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줄 알게 하옵소서

부칙

                오늘과 같이 하나님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라

솔로몬의 기도와 축복이 끝나고 화목제가 이어졌다. 희생제물은 소가 이만이천마리, 양이 십이만 마리였다.  봉헌식에 바쳐진 제물의 수가 십사만이천 마리, 두주간 봉헌의 잔치는 이어졌다. 그러니 하루에 만마리의 제물이 드려졌다는 뜻. 성전으로는 부족하여 성전 앞뜰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를 드렸다고 해도 하루 천명의 제사장/레위인이 각각 열마리씩 제사를 드려야 했다. 어마어마한 규모다. 숫자의 진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풍성함이 넘치는 잔치를 상징한다.

마지막 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위하여 축복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 하였다고 한다.

++++++ 페이스북 엔딩

/그/러/나/ 제일 감동은 봉헌식을 떠나는 백성들이 왕을 /축/복/ 했다는 것이다. 왕을 축복한 백성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왕을 축복한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사관은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 하였더라.”[66] 라고 맺는다.

// 왕이 백성을 축복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축사도 높은 사람들이 한다. 축하는 서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니 백성이 왕을 축복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왕께 ‘감사’하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사관은 적었다. 개인은 몰라도 ‘백성들’은 왕보다 위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엥 좌클릭 깜빡 깜빡 모드) 하여간 새정부도 국민들의 축복을 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