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8:12-27] 제자와 교훈

[요 18:12-27] 그의 제자와 그의 교훈

한사람은 (예수님은) 결박당하여 끌려갔다. 천부장이 직접 나설정도로 중요한 체포작전이었나 보다. 일단은 대제사장의 장인에게 끌고갔다.

다른 한사람은 (베드로는) 예수님이 끌려가신 곳, 대제사장의 (장인) 집에 따라 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히 다른 제자 한명이 안에 있다가 문지기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때 이 문지기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다. “너도 예수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문지기 여중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온 다른 제자는 자신은 예수의 제자라고 말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베드로는 ㅠㅠ “나는 아니라” 그리고 슬며시 추운 몸을 녹이려 불가로 가서 종들과 불을 쬐었다.

한편에서는 대제사장이 먼저 체포해서 끌고 온 예수님을 심문했다. 심문의 내용은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섬/광/이 스치고 지나간다. 제자들과 교훈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드러낸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 처럼. 제자들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요 듣고 행하는 반석위에 집을 세우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라고 하셨다. 제자가 아닌 자들도 들었다. 듣고 행하지 않으면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 관하여는 한마디도 답하지 않으셨다. 오직 자신의 가르침은 공개적이었으니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다. 굳이 그의 제자들에 대해 따로 답하실 이유가 없으셨다. 제자와 교훈은 동의어다.

그런데 그의 제자 베드로. 불을 함께 쬐던 사람들 (종이나 아랫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물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또 “나는 아니라” 답했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귀를 잘렸던 사람의 친척이 증인으로 등장한다. “네가 예수님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았다.” 베드로는 또한번 부인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삶이어야 한다.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과 (제자와) 배우는 내용 (교훈)은 일치해야 한다. 이것은 동일하게 나의 삶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물론 닭이 울기 전 베드로에게서 제자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항상 백점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낙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고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 이듯 교훈과 (듣는 것과) 제자 (순종하는 것)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면 그에 따른 언행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가르침만 있고 행함은 없는 교회의 가르치는 사람들을 어찌할꼬. 언행일치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요 15:18-27] 세상이 미워하면

[요 15:18-27] 세상이 미워하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8]

// 얼마나 내가 세상 눈치보면서 살면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는 느낌이 없을까? 나는 예수님 사랑 안이 아니라 세상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일까?

한국 교회가 개독교 소리를 듣는 것은 세상이 예수님을 먼저 미워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서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택해 주셨는데,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택함을 원한다. 출세나 성공이나 발전이나 모두 세상이 우리를 택하는 가치관을 따라간다. 선생님이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우리는 선의의 경쟁을 운운하며 출세, 성공, 발전을 얘기한다. (청출어람이라도 된 듯 선생님을 가르치려는가?)

솔직히 예수님은 이유없이 미움과 박해를 받으셨다. (만약 우리가 현재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면) 우리도 과연 그런가? 세상도 이미 알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 ‘서로 사랑하라’를 실천하지 못하니 미움을 받는 것이지 않은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성령님이 필요하다. 성령님께서 증언하실 것은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예수 믿는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증언해야 한다. 증언은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 증언이 된다. 말이 필요 없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와 동의어에 가깝다. 자꾸만 믿음을 사랑의 원인이나 이유로 내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자. 잘 믿으면 저절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면 잘 믿는 것이 맞다.

캄보디아 믿음의 형제 자매처럼 ( 선교지 또는 부모님 세대처럼) 우리는 이제 예수 믿는다는 것만으로 미움받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탄식만 나온다.

세상이 날 별로 미워하지 않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요15:1-17] 포도나무

[요15:1-17] 포도나무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신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신다. 농부의 아들 포도나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예수님은 스스로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돌봄을 받아야 할 존재라고 하신다.  하물며 우리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5]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가지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돌봄을 받아야 할 존재’라고 가르쳐 주신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거해 버리시고 – 포도농사를 하시는 분은 제거하다는 단어가 들어주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바닥으로 늘어진) 가지는 열매가 잘 맺도록 들어 올려주시고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 열매를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해 주신다. 포도나무에게 농부가 (아버지가) 있듯이 가지 (자녀/아들)도 있다.

제자들에게 ‘아직’인것을 예수님께선 ‘이미’라고 하신다. 아니 ‘아직’은 일/부/러 버리시고 ‘이미’만 취하신다. 예수안에 거하고 열매를 맺어야 깨끗한 가지인데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다고 하신다.[3] 명령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시면서 ‘이미’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선언하신다.[14/5]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은 농부와의 관계 가지와의 관계가 ‘하나같길’ 원하신다. 포도나무가 농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다. 가족공동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말’ (말씀) 이다.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고 계명이다. 가지에게 전달되어야 할 수액은 바로 이 말씀이요 계명이다. 그것이 열매를 맺는다. 의역에 의역을 거듭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는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말씀하시면 수액으로 포도나무를 거쳐 가지에 이르러 그 말씀대로 이루어 진다’는 뜻이리라. 그러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는 하나님의 뜻가운데 소망하는 것이지 가지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저 가지 개인의 욕심이라면 이루기 전에 밖에 버려진 가지가 되어 땔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을까? 성자가 성부안에 거하는 것을 본받으면 된다. 성자는 성부의 계명을 지켜  성부의 사랑안에 거한다고 하신다.[10]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또 우리의 기쁨이 된다.

서로 사랑하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13] 예수님께서는 말만 떠벌이시는 분이 아니셨다. 곧 십자가에서 이 말씀을 친히 실천해 보이셨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명하는 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14] 그러니 ‘아직’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이미’로 바꾸셨다.

‘아직’을 ‘이미’로 바꾸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우셨다. 그래서 역으로 우리가 포도 열매를 맺는 것이다(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열매가 있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농부에 의해 깨끗하게 돌봄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열매를 맺을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공급받을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 이미 7절에서 언급했지만 ‘무엇’은 가지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가 원하는 것, 즉 열매 맺는데 (서로 사랑하는데)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결론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다. 원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할 것도 정해져 있다. 농부( 성부 하나님/아버지)와 포도나무(예수/성자) 그리고 가지들(아들) 을 타고 흐르는 것, 바로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라!

[민 15:32-41] 필벌/신상

[민 15:32-41] 필벌/신상

고의로 범한죄에 대한 처벌은 “백성중에서 끊어지리라”였다. 그것도 온/전/히 끊어지리라. 이어서 안식일을 범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 왔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어쩌면 안식일에 나무를 한 행동은 그동안의 관례나 관행일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처리할지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답을 하셨다. 법대로 해라.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치라. 온 회중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해하였다. ‘일벌백계’의 교훈이 되었던 ‘신상필벌’의 예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계명을 기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이것도 명령으로 주셨다.)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도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39]

핵심은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40]이다. 내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은 방종하게 한다. 이 방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끊어지게 하는 원인이다. 백성이라면 하나님나라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순종해야 한다. 관행과 관례라고 덮어서는 안된다.

//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준행하기 위하여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아이들에게 성구암송 카드를 쥐어주고 외우게 하기는 쉽다.  그러나 준행하도록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어렵다. 내/가/ 본이 되는 수 밖에 없는데…

‘신상필벌’. 잘하면 상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주고의 하나님! 좀 극단적 사고인가? 사실 신상필벌은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벌’보다 ‘상’을 기억해야겠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41]

이 말씀보다 더 큰 상이 있으랴!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민 15:17-31] 무엇을 들어 올릴까?

[민 15:17-31] 무엇을 들어 올릴까?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18]  또 다시 하나님의 법이 적용될 땅에 대해서 언급하신다. 2절에서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이라고 하였는데 18절에서는 ‘주어 살게하다’ 보다 함께 동행해서 데리고 가신다는 ‘인도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은 가나안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겠지만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33:3]라고 말씀하셨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할까 염려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결국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땅은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해 주시는 땅이어야 한다.

또 제사 용어가 나온다. “거제” 쉽게 말하자면 제물을 높이 들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방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였을 경우에 대한 두가지 후속 절차에 대해 말씀하신다. 먼저  공동체든 개인이든 부지중에 (고의가 아니라) 범죄한 경우다. 이경우에는 규례대로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리고 제사장이 속죄하면 용서를 받았다. 그 순서가 의미있다. 먼저 화제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린다. 순서가 중요한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인 느낌은 ‘하나님의 자녀니 (화제로 관계회복) 용서해 주세요 (속죄제로 용서받음)’ 이다. 속죄제가 먼저고 화제가 나중이라면 ‘용서해 주시면 하나님의 자녀로 지위회복’ 뭐 이런 느낌이다. 전자가 좋지 않은가?

공동체와 개인의 차이는 속죄제 제물이 숫염소 한마리에서 일년된 암염소로 바뀌는 것 뿐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법은 이스라엘백성 뿐아니라 그들중에 함께 한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문제는 고의로 범죄한 경우다. 히브리어 단어는 참 재미있다. 고의라는 히브리 단어는 19, 20, 21 에서 세번 반복된 제사 방법,  ‘거제’와 연관되어 있다. “거제 같이 들어 드리라”[20] 에서 ‘들어 드리다’와 ‘고의’는 같은 단어라고 한다. ‘고의범죄’는 하늘을 향해 주먹을 드는 (팔뚝질 하는 욕) 비방이 되니 ‘거제’ 즉 ‘하늘을 향해 헌물을 드리는 제사’의 반대행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어 올리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로 하나님의 백성중에서 끊어진다. 온/전/히 끊어진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