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8:1-22

욥 8:1-22

욥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의 말을 이어받았다. 빌닷은 욥의 고통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엘리바스의 의견에 동조한다. 끝까지 자신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더디다고 말하는 욥에게 하나님이 심판은 잘못될 수 없으며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욥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면,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한다. 이제라도 이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면 주님께서 욥을 살리시고 욥의 가정을 경건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이전보다 더 크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강조한다. 빌닷은 자신의 말은 온고지신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잊는 모든 사람의 앞길은 사망이라고 말한다. 믿음을 저버린 사람의 소망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잊은 사람의 믿음은 끊어질 줄이요, 거미줄과 같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구구절절이 옳은 말만 골라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욥은 마치 뿌리가 뽑힌 나무라고 말한다. 나무가 뽑힌 자리에서는 다른 식물이 돋아나지, 뽑힌 나무가 설 자리는 없다고 말한다. 정말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시며 악한 사람 손을 잡아 주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빌닷은 주님이 욥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신다면 욥을 미워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악인의 장막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욥이 회복하는 일이 없을 것처럼 떠든다. 욥에 대한 정죄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빌닷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렸다.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쉽게 저지르는 잘못이다. 말로만,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공염불이다. 

욥 7:1-21

욥 7:1-21

인생은 저물기를 기다리는 종과 같다고, 또 수고한 삯을 기대하는 품꾼과 같다고 노래한다. 욥은 이 결산의 때를 기다린다. 그러나 온 몸이 종기로 터져나가고 있는 지금, 아무런 소망도 없이 종말을 맞는 것 같다고 노래한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셔도 자신은 이미 없어졌을 것이라고 노래할까. 주님 앞에서 결산할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곧 지옥이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욥은 마지막 힘을 내서 입을 연다. 여기서 잠자코 있으면 지난 날의 수고가 헛되니 분하고 괴롭다고 말을 한다. 욥은 주님께서 자신을 안식이 아니라 고통가운데서 놀라고 무서워 떨게 하시는 이유를 듣고 싶어한다. 죽어서라도 주님을 만나 이유를 듣고 싶어한다. 유한한 인생을 이렇게 (주님의 뜻을 모르고) 사는 것이 지겹다고 한다. 주님으로 기뻐해야 할 삶이 주님의 시험을 받아 놀라고 무서워 떠는 삶이 되었으니 허무하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욥은 이것도 주님께서 사람을 염두에 두셨다는 증거라고 말을 한다. 주님은 아침부터 사람을 살피신다. 욥은 사람이 잘못을 해도 주님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는데, 왜 지켜보시고 사람을 주님의 짐으로 생각하시는 묻는다.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욥이 드디어 자신에게도 허물이 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다. 

// 주인이 올 때 깨어 있는 종은 복이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깨어 있는 종에게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서 와서 시중을 들것이다.” 종이 주인을 깨어 기다리는 이유가 돌아오신 주인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니 놀랍지 않은가?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시, 내 잔이 넘칩니다.’ 욥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세다. 그런데 지금 욥은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주인이 돌아올 때가지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왔을 때 자신은 이미 죽고 없을 것 같아 애통해 한다. 지금까지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든 악에서 멀리 떠났건만, 주인이 오기 전에 죽으면 모든 것이 헛수고라고, 지옥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욥이 본문 마지막에 용서를 구한 자신의 허물과 죄악은 주인이 더디 오신다고 자신의 소망이 마치 끊어진 것처럼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욥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의 출입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삶에 마치 하나님이 없다는듯 노래했으니 이보다 더 큰 허물과 악은 없을 것이다. //욥의 토로대로 하나님이 사람(욥)을 짐으로 생각하셨을까? 욥(사람)이 고통가운데 잠시나마 오히려 주님을 짐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빅브라더’가 아니라, 임마누엘이시다.  

욥 6:1-30

욥 6:1-30

엘리바스의 정죄에 욥이 대답한다. 욥은 말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한 이유를 감당하기 어려운 육신의 고통 때문이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받는 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것을 밝히 알기를 원했다. 주님이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시고, 주님이 자신을 부수고 깨뜨리셔도 주님의 뜻을 밝혀 주시면 그것이 위로가 되고 오히려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욥이 지금 당한 사정은 딱하다.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기력이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절망속에서 허덕일 때 필요한 것이 친구다. 그런데 세상 친구들은 미덥지 못하다. 욥도 친구들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엘리바스의 정죄에 실망하고 만다. 그리고 친구의 위로를 기대했던 자신이 오히려 부끄럽다고 말한다. 욥은 친구들에게 재산을 구걸하지도, 목숨을 애걸하지도 않았다. 그저 위로받기 원했을 뿐이다. 욥은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에게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구체적으로 고소하라고 묻는다. 무엇으로 자신을 책망하는지 따진다. (11-25)

욥은 입을 열어 자신의 출생을 저주한 것은 절망에 빠지 자신의 상황을 말한 것이요, 바람과 같이 마음에 담을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야 말로 친구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진정한 친구라면 얼굴을 맛대고 거짓말은 하지 못하지 않냐고 반문한다. 친구라면 자신의 정직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악한 행위는 고사하고 옳지 않은 말이라도 한 적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26-30)

//극심한 고통가운데, 자신의 출생마저도 저주했던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악한 행동도, 심지어 옳지 않는 말도 한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엘리바스와 친구들에게, 친구라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라고 도전한다. 자신은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멀리 떠났다는 평가에 부합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더이상 친구들의 위로를 기대할 수 없으니, 주님이 자신의 목숨을 취해 가시면 오히려 그것이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냥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낫다는 태도가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주님을 대면하기를 원하는 것이다.(바울처럼 사나 죽으나 주님의 소유라고 말은 하지만 정작 당장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러나 그마저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 ////우리에게 위로를 주실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러주셨다. 예수께서 말한 친구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공유한 자들이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형제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셨으니,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신 친구도 믿음의 가족이다. 주님만이 나의 위로가 되신다. 주님의 말씀만이 나의 위로가 되신다. 나에게는 참 친구가 되신 주님이 계심을 감사하는 아침이다. 그러면 나는 좋은 믿음의 가족/친구 인가? 

욥 5:1-27

욥 5:1-27

엘리바스의 욥에 대한 정죄는 계속된다.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로 가고. ㅠㅠ 심판/정죄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아니다.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주님의 자리에 앉아 버렸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죄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죽음과 패가망신을 죄 때문이라고 자신이 본대로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고난을 타고 태어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말한다. (왜 욥에게만 적용할까?) 그러니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께 사정을 털어놓으라고 다그친다. 창조주 하나님 낮은 사람을 높이시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하면서도, 간교한 사람의 계획은 꺾으시는 분이라고 말하며, 욥을 낮은 자도 슬퍼하는 자도 아닌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로, 교활한 자로 몰아간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욥을 그저 불의한 사람으로 낙인 찍고야 만다. 위로라고 한답시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그래도 복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전능자의 훈계를 거절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상하게도 하시지만 손수 낫게도 해주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한다. 6전7기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맞는 말을 다시한다. 그러니 지금의 고난/고통이 주님의 훈계니 달게 받으라고 말한다.

//엘리바스의 욥에 대한 정죄는 계속된다.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로 가고. ㅠㅠ 심판/정죄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주님께 맡겨야 한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주님의 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엘리바스의 말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니 문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데, 마치 자신은 욥보다 의롭다는 태도다. 가난한 자의 복과 애통하는 자의 복을 말하면서도, 온유(겸손)한 자의 복을 쏙 빼고 욥을 아예 죄인 취급을 해버린다. 예수님은 죄인들도 친구삼지 않으셨던가? 나의 간증과 깨달음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간증과 깨달음을 욥에게 잘못 적용했다. 자신의 안정에 도취되어 하나님(심판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러니 욥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욥과 하나님과의 교제에 걸림돌이 된다. 지금 욥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다. 말의 위로가 아니라, 차라리 지난 일주일 동안처럼 함께 애통해야 한다. 

욥 4:1-21

욥 4:1-21

일주일 동안 어떤 말로도 욥을 위로 할 수 없었던 세친구. 욥이 입을 열어 자신의 출생에 짜증을 내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입을 열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말이 욥의 짜증을 불러올 것을 알면서도 말을 시작한다. 엘리바스는 먼저 욥의 과거를 언급한다. 욥은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힘 없는 사람들을 굳세게 붙들어 주었다. 쓰러지는 이들을 격려하고 세워주었다. 그런데 정작 욥 자신이 힘 없이 쓰러지니 짜증내고 낙담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엘리바스는 욥에게 짜증내고 낙담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고 온전한 길을 걷는 희망이냐고 반문한다. 

엘리바스의 말에는 가시가 있다. 죄가 없는데 망하고, 정직한 데 멸망당하는 일이 있냐고 다그친다. 사람은 그 행한대로 거둔다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입김에 쓸려간다고 말한다. 늙은 사자와 같이 아무리 믿음이 좋았어도 그 믿음이 그치는 날이 있다고 말한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두려움 가운데 들은 영혼의 소리를 들려준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다.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까지도 허물이 있다고 하신다. 하물며 흙으로 만든 몸을 입고 티끌로 터를 삼고 사는 사람들이랴.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영원히 망할 존재들이다. 생명줄만 끊기면 사람은 그냥 죽고만다. 생명줄이 끊어지면 지혜를 찾지 못하고 죽어간다.

//엘리바스는 고통의 이유를 죄에서 찾는다. 하나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반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또한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모세는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라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몇번이나 간구했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다. 반면 인간의 연약함은 잘 았았다. 엘리바스 생명줄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영혼의 소리를 통해 알았다고 간증한다. 참 생명이 끊어지면 지혜를 찾지 못하고 죽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을 모르니 욥을 위로하지 못하고 정죄하고 만다. (그러나 나의 간증을 다른사람에게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다.) ///참 생명의 끈을 놓치면 안 된다. 이 생명의 끈을 놓치 않는 것이 지혜다. 그런데 연약한 우리의 힘으로는 이 생명의 끈을 놓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욥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사실 우리의 생명줄을 잡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끈 저쪽 편에 계시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그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끈 저쪽 편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잡아주시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육신인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손을 내미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