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 13:44-58

마태복 13:44-58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요 극히 값진 진주다. 밭에 감추인 보화는 그 자체로서 가치가 없다. 발견되어야 가치가 있다. 그래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만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다. //천국은 극히 값진 진주다. 값진 진주는 감추어져 있지 않고 진열되어 있지만, 분별하기는 쉽지 않다. 보석 전문가여야 그 참된 가치를 알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산다. //금은 보화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도 보면 알 수 있으나, 진주의 가치는 전문가의 눈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통사람도, 전문가도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야 살 수 있다. 차별이 없다. 많이 가진 자는 많이, 적게 가진 자는 적게, 없는 자는 돈 없이 값없이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이처럼 공평할 수가 또 있을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두가 초청을 받는다. 마치 그물을 던지면 온갖 고기가 잡히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신다. 그러나 어부는 좋은 물고기는 담아두지만, 못된 물고기는 버린다. 좋은 물고기의 ‘좋은’은 ‘아름답다’, ‘착하다’, ‘선하다’, ‘마땅하다’, ‘낫다’로 사용되는 단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하신 단어가 떠오른다.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좋은 물고기다. 반면 ‘못된’ 물고기는 ‘썪은’, ‘무가치’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고보니 천국은 내가 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사야할 나라라고만 묵상해왔는데… 하나님께서 성도라는 보화가 있는 세상을 사시고, 하나님께서 성도라는 값진 진주를 사신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우리가 보화가 감추인 밭을 사고, 우리가 진주를 찾는 장사꾼이 아니라) 익숙한 것에서 낯섬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사셨다. 성자 예수께서 상속자이시니, 예수를 대속물로 내어주셨으니,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값으로 치르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천국을 산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그릇에 담으신 것이다. 이것이 은혜요, 감사의 제목이다. 질그릇 같은 내가 진주를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한다. 자비와 긍휼을 맛보게 하셨으니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라고 하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19/

마태복음 13:31-43

마태복음 13:31-43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는 겨자씨 같이 작고 미약할지 몰라도, 공동체적으로 다스림을 받을 때는, 겨자나무와 같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기 힘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공동체로 성장하면 좋겠다. 물론 한 개인의 신앙이 겨자씨에서 겨자나무로 자라는 것도 기대해야 할 것이다. //누룩은 배양 증식된다. 미생물이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밀가루 반죽을 부풀려서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한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다. 제사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 외식할 수 있지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은 성령 충만 없이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 때에 소돔에 열명의 의인만 있었어도, 예레미야 때에 한 명의 정의로운 사람만 있었어도 그 사회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성도라면 제사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서 살아있는 신앙을 증거해야 한다. //어제 밭은 마음이요, 좋은 씨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적용했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풀어내신다. 겨자씨와 누룩을 개인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지만, 공동체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다. 좋은 씨를 뿌리는 분은 인자, 곧 예수님이시고,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곧,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뿌려져 그 열매를 맺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원수 마귀가 심은 가라지, 곧 악한 사람들은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담지 않는 불순종의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을 죄짓게 하고 자신들도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주여 주여 부르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속일 수는 있겠으나, 심판의 날에 주님은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비와 긍휼이 차별없이 베풀어지는 곳이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18/

마태복음 13:18-30

마태복음 13:18-30

예수께서 귀 있는 자들에게 씨뿌리는 비유를 풀어주신다.

//씨뿌리는 사람은 과연 농부일까? 농부라면 씨를 아무곳에나 뿌리지 않을 것이다. 밭에 뿌려야 농부다. 그렇다면 마땅히 밭이었던 땅이 더러는 길이 되고, 더러는 돌짝밭이 되고 더러는 가시덤불이 된다는 설명이 더 합리적이다. 곧 수확을 거두는 땅만 좋은 땅이다. 씨가 뿌려질 때는 같은 밭이었지만, 좋은 땅인지는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맺는 땅이 좋은 땅이다. 예수께서는 좋은 땅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악한자, 환난이나 박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혔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곧 말씀을 마음에 두지 못한다면 결코 열매 맺는 좋은 땅이 될 수 없다. //땅만 좋아서는 안 된다. 좋은 씨를 뿌려야 한다. 마음이 좋다고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원수들은 좋은 땅에 나쁜 씨를 뿌린다. 악한 사람이 좋은 마음에 뿌려진 좋은 씨를 빼앗는 경우나, 환난이나 박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보다 더 나쁜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나쁜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지면 악한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가 좋아야 한다. 좋은 씨는 주님의 말씀이다. 씨는 싹이 나서 자라야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 싹수가 노랗다고 이웃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분별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땅에 가라지가 난다고 바로 뽑아버리지 말라고 하신다. 곡식이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비와 긍휼이 우선이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시는 일은 씨뿌리는 자의 역할이 아니라 추수꾼의 역할이라고 하신다. (우선순위는 좋은 땅에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좋은 땅은 예수와 함께 함이다. 임마누엘이다. 비유의 해석이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이유다. 제자들은 물리적으로 예수와 함께 있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또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 있어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게 한다. 믿음의 여정의 마지막 단계다. 우리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거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이다. 믿음의 초짜에게는 악한 자들이 훼방하고, 악한 자들 훼방을 이길 때쯤이면 환난이나 박해, 즉 어려운 환경이 믿음이 자라는 것을 훼방한다. 이것을 이겨내면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믿음의 성숙을 훼방한다. 이 훼방들을 통과하면 예수와 함께 하는 온전한 기쁨의 열매를 누리게 된다. 주변의 가라지에 핏대를 세울 것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로 예수를 닮아가야 한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17/

마태복음 13:1-17

마태복음 13:1-17

예수께서 바닷가에 앉으셨다. 많은 무리가 모이자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앉으셨고 무리는 물가에 서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1 [보아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뿌린 씨는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고,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 먹었다.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 밭에 떨어졌고,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났지만 해가 뜨자 타서 뿌리가 없어져 말라버렸다.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고, 가시 덤불이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다.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배, 어떤 것은 삼십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물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셨다. 덧붙이기를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일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리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무리가 보지도 듣지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유는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긴 백성들을 고쳐주지 않으시겠다고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고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도 제자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제자들이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16/

//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이 (제자들 처럼) 허락된 사람들이 있으나 허락되니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답하신다. 천국의 비밀이 허락된 자는 천국의 비밀을 더 잘 알게 되지만 천국에 대해 아는게 없는 사람은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게 된다고 하신다. 이것을 이사야의 말씀의 성취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귀도 닫고 눈을 감았다고 하신다. 일부로 듣지도 보지도 않는다고 하신다. 들어서 깨닫고 보아서 알아 예수님께 고침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하신다. 옛포도주에 길들여져 새포도주 맛보기를 거부한다고 하신다. 제사에 미혹되어 자비와 긍휼의 복음에 순종하지 못한다. 그와 반면에, 제자들은 새포도주를 맛보았다. 제자들은 보아서 알고 들어서 깨달을 수 있는 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예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지금 제자들이 맛보는 포도주는, 오래전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아서 알고 들어서 깨닫고자 하였지만 결코 맛보지 못한 새포도주라고 하신다. 물론 제자들이 아직은 좋은 땅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곧 열매를 보고 알게 될 것이다. ////매일 말씀을 펼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말씀을 펴고도 나의 마음이 완악하여 주님의 말씀을 보지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일이 없도록 삼위 하나님께서 도와주소서.

마태복음 12:38-50

마태복음 12:38-50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무리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 나머지 예수께 표징을 구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지칭하신다. 그들에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다른 표징은 없다고 하시며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요나보다 더 크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솔로몬보다 더 크다” 하고 말씀하셨다.
[악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서 그는 물 없는 곳에서 쉴 곳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 악한 귀신은 자기가 나온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와서 보니 그 집은 비어 있고 말끔히 치워져서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그 집에 들어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함께 살았다. 그래서 귀신 들린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다. 이 악한 세대로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전히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찾아왔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예수께서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반문하시며,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나의 표징은은 니느웨가 악한 세대라도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사람들이,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께서 선포하신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선포에 마땅히 회개로 반응해야 함을 비유적으로 교훈한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교적 열심이라는 악한 귀신에서 나와 예수의 물을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자비와 긍휼이라는 멍에를 메지 못하고, 제사에 얽매인 삶으로 돌아간 것이다. ㅠㅠ. 물 없는 곳에서 쉴 곳을 찾는 사람들이다. 완전 넌센스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성령없는 곳에서 쉴 곳을 찾을 수 없다. //가족! 영혼의 오아시스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는 곳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 곧 성령이 계신 곳이 성도가 쉴 곳이다. 예수와 함께 멍에를 메는 삶이다.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사는 곳이다. 말씀 바깥에 서서 내 말만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물 없는 곳에서 쉴 곳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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