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11-19

마태복음 11:11-19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외쳤다. 하늘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나라가 올 것을 예언했다. 너희가 그 예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요한이 바로 메시야보다 먼저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는 것을 알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요한에 대해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말했다.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9/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된다. 예수께서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로 입증되는 나라다.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 놀이에서 대장/술래를 따라하지 않으면 그 놀이는 재미가 없다. 무리가 대장/술래에 관심이 없으면 더 이상 놀이가 진행될 수 없다. 예수님 당시 지도자 유대인들은 요한도 예수님도 대장/술래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끼리만이 북치고 장구치고자 했다. 한편으로 세리와 죄인들, 소위 사회적 약자들은 하늘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놀이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께서 대장/술래가 되어 하는 놀이에 재미있게 참여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다.하늘나라 놀이가 재미있다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11:1-10

마태복음 11:1-10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일이라는 표현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고 기록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 있다.” 하고 덧붙이셨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자 예수께서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예언자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성경에 기록된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는 구절의 심부름꾼이 바로 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직전, 빌립이 예수께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하고 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해서도 이미 같은 맥락에서 하셨다. 내가 메시야인지 (오실 그분인지)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오실 그분의 메세지는 세례자 요한이 외친 그대로 ‘회개하. 천국이 가까이 왔다.” 였다. 요한은 회개에 대해서는 바로 알고 있었지만, 천국에 대한 이해는 적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례요한에 대해 여자가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고 평가하셨지만, 한편으로 천국에서는 작은 자라고 하셨다. 메시야가 하시는 일은 임마누엘이다.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눈 뜨는 것보다,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듣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핵심이다. 사람은 죽었다 살아나도 나사처럼 몸은 다시 죽는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복을 깨닫는 것이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8/

마태복음 10:34-42

마태복음 10:34-42

예수께서는 느닷없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부모 자식간에 고부간에 맞서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신다.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주님보다 부모나 자녀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신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주님의 제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선언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지만,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의 제자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맞아 들이는 것이요,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언자를 맞아들이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고, 의인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곧 주님을 맞아들이면 주님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주님의 제자로서 (제자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7/

//예수께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한다면 집안 식구를 사랑해야 한다.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던가? 다만 주님보다 집안 사람을 ‘더’사랑해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집안 사람을 지금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집안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집안 사람들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주님의 제자를 맞아들이은 사람은 주님을 맞아 들이는 것이요, 나아가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집안 사람들에게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우리가 집안 사람들을 지금보다 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주님의 제자라면 집안 사람들을 사랑할뿐 아니라, 작은 사람들도 사랑해야 한다. 작은 사람이란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이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자의 이름으로 온정의 손길을 나눠야 한다. 제자의 이름이라고 해서 우리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옷입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요, 주님이 받을 상을 받는 길이다. 주님과 같은 상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상은 없다.

마태복음 10:24-33

마태복음 10:24-33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청출어람이 있을 수 없다. 그래도 제자들이 그리스도 예수에까지 자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이 바알세불의 이름을 빌러 귀신을 내쫓는다고 비아냥 거렸으니, 주님이 종된 제자들을 귀신의 종들이라고 얼마나 더 비방할까 하고 염려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들의 비난은 거짓된 것임이 들어날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로 (어두운데서, 귓속말로) 가르치셨으나 제자들에게는 그들이 배운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외치라고 명령하셨다. 세상은 우리 몸을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을 죽이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몸도 영혼도 다 멸명시키실 수 있으시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주님이시다. 참새의 생명이 주님께 달려있듯이, 참새보다 더 귀한 우리의 생명을 돌보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그러니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면,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6/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여기서 ‘많다’는 단어는 앞 절의 머리카락처럼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많다’를 ‘모든’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어색하 않다. 그만큼 주님의 제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다. 그 이유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죽으면 참새와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몸은 죽는다. 그러나 영혼까지 죽는 일이 없도록 ‘영혼’을 불어넣어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 바람빠진 풍선처럼 될 수 있다. 어쩌면 성도는 바늘 구멍이 난 자동차 타이어다. 한동안은 잘 굴러다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구를 수 없을 때가 온다.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할 이유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는 것이 성령충만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말과 혀로 만하는 시인은 소용이 없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마태복음 10:16-23

마태복음 10:16-23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라. 슬기와 순진이 만나야 한다. 계산에만 빠르면 순진할 수 없다. 순진하기만 하면 속기 쉽상이다. 어떻게 하면 슬기로운면서도 순진하고, 순진하면서도 슬기로울 수 있을까?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실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 곧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된다. 내가 말하지 않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니 슬기롭고 순전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끝까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러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한 고을에서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인자가 온다는 뜻은 무엇을 가리킬까? 돌아가시기 전이니 재림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예수께서 곧 ‘인자’로 드러나신다는 뜻이 아닐까? 하늘 나라의 핵심은 인자이신 ‘예수’ 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가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다. (말장난 같지만, 예수의 다스림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임마누엘이다.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나니의 영, 곧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삶이다. 이것만이 이 땅에서 끝까지 견디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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