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7:11-19 읽기

레위 지파 사람들이 담당해야 할 제사직에 관하여는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율법에 기록된 제사직으로 제사가 완전하다면 아론의 계통이 아닌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서 다른 제사장이 생겨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제사직분에 변화가 생기면 제사직분을 기록한 율법에도 반드시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 속한 제사장을 세우신다. 주님께서는 혈통으로는 유다지파에서 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에는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을 할 때, 유다 지파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주님이 멜기세덱과 같은 모양으로 다른 제사장이 되셨다. 결론적으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서 제사장이 되신 주님은 율법에 따라 혈통적으로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생명의 능력으로 제사장이 되셨다. 시인은 110편에서 주하나님께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서 영원히 제사장이다.” 하고 선언하셨다고 노래한다. 따라서 전에 있던 계명, 제사장에 관하여 율법에 있던 계명은 무력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게 되었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 소망을 힘입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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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등장하는 멜기세덱! 히브리서 저자는 집요하게 멜기세덱을 하나님의 계보에 연결시킨다.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니 하나님이시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니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다름이 없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주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멜기세덱의 계보를 잇는 분이심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레위자손 대제사장들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일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년회원권’밖에 발급할 권한(법)이 없었지만, 멜기세덱 계보를 잇는 우리 주님은 ‘큰’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평생회원권’을 발급하도록 법을 바꾸셨다. 우리는 이 평생회원자격만 유지하면 된다. 다만 회원자격유지가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히브리서 7:1-10 읽기

1-3 저자는 멜기세덱을 다시 언급한다. 멜기세덱을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한다. 아브라함이 개선할 때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자는 멜기세덱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멜기세덱의 이름은 정의의 왕이요 살렘(평화)의 왕이란 뜻이다. 멜기세덱은 부모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생명의 끝도 없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다고 하니,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곧 하나님이시다.)

4-10 저자는 멜기세덱의 위대성을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전리품에서 가장 좋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게세덱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의 자손 레위 지파 가운데서 제사장 직분을 맡은 사람들(아론의 후손들)이 율법을 따라 십분의 일을 받았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레이 지파 족보에 들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법이다. 그리고 예물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으로부터 받는다. 혈통을 따라 제사장이 된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백성에게 십분의 일을 받는다. 그러나 멜리세덱은 살아계신 분(하나님)의 자격으로 십분의 일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쳤으니, 결국 제사장 직을 수행하는 레위 자손들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 셈이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받았을 때 레위는 아직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저자는 멜기세덱을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심과 같이 멜기세덱도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예수께서 정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으로 이땅에 오셨음을 교훈한다. 멜기세덱의 위대성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비교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위대성, 곧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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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우리들도,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우리들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일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듯이 우리도 아브라함이 받은 멜기세덱의 축복을 누리는 상속자들이다. 아니 멜기세덱 계보를 잇는 (하나님과 동등한) 더 ‘큰’ 대제사장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을 누리는 상속자들이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멜기세덱 (의의 왕, 평강의 왕)의 계보를 잇는 주님이 다스리는 기쁨(희락)의 나라다.

히브리서 6:9-20 읽기

9-12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들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행위, 곧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섬기는 사랑을 잊지 않으신다. 저자는 이 성도를 섬기는 사랑에 해난 열정을 끝까지 나타내서 소망(구원)을 이루라고 당부한다. 사랑하는 일에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구원)을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13-2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실 때에, 하나님 자신보다 큰 분이 없으므로 하나님 자신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에 번성하게 하겠다고 맹세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오래 참은 끝에 그 약속을 받았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위대한 이름으로 맹세한다. 사람들은 맹세로써 논쟁을 그치고 일을 확정한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시려고 맹세로써 보증하셨다. 구원의 소망을 붙잡은 성도도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함으로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거짓 약속과 맹세를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는 (구원의) 소망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다. 예수께서는 성도보다 앞서서 하나님께 달려가신 분이시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돌아가셨고,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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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장 좋은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성도는 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한다. 사랑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 것이 믿음과 인내로 약속된 구원을 이루는 길이다. 나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성령의 도움으로) 믿음과 인내로 구원의 소망을 붙잡은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된다. 예수께서 앞서 가신 길이요 성도가 따라야 할 길이다.

히브리서 5:11-6:8 읽기

5:11-14 저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멜기세덱’을 다시 언급한다. 독자들의 귀가 둔해진 까닭에 설명하기 어렵다고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저자는 귀가 둔해진 독자를 탓한다. 이미 교사가 되어 가르쳐야 할 텐데,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들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고. 단단한 음식물을 먹어야 할 어른이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젖을 먹고 사는 어린아이는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하다. 올바른 가르침은 단단한 음식물과 같아서 신앙적으로 장성한 사람들의 몫이다. 신앙적으로 장성한 사람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게 된다. 

6:1-8 따라서 성도라면 그리스도교의 초보적인 교리를 뒤로하고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초보적인 교리, 곧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세례, 안수, 부활, 영원한 심판에 관한 기초만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배우기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대로 회개 믿음 세례 산수 부활 심판을 누려야 한다. 유지해야 한다. 저자는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 본 사람들이 타락하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를 흡수하여 농사짓는 사람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는 땅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땅이다. 만약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그 땅은 쓸모없는 땅이요 저주를 받아 마침내 불에 타고 말 것이다. (저자는 타락을 유익한 농작물 대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쓸모 없는 땅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곧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 불순종이 타락의 증거다.)

//성도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둔해질(게으를)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의 도움을 너머,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올바른 가르침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고 성령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신앙적으로 어리다. //성령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다. 성령을 따라 행해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사람이라도 불순종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곧 육체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이 얼나나 두려운 교훈인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교리를 아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도움으로 순종해야 한다. 순종의 경험들이 쌓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지각을 갖추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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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14-5:10 읽기

14-5:4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벌거숭이와 같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도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신다. 이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굳게 지켜야 한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이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죄는 없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누리는 길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길이다. 사람들 가운데서 뽑힌 대제사장은 사람들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의 희생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용납하게 된다. 그는 백성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런 대제사장 직분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 

5-10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영광을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론의 혈통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예수께서는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제물 대신 눈물의 제사를 (기도와 탄원을) 드리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경건함을) 보시고 예수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받으심으로서 순종을 배우셨다. 이 순종으로 완전하게 되셨다. 그리고 예수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저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다고 재차 강조한다.

//성도도 하나님나라의 제사장들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제사장들이 된 것이 아니다. 예수를 영접함으로,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은,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성도도 예수께 순종함으로 고난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을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 복음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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